〈 12화 〉#2 일상이 패배인 빌런, 패배가 싫은 히어로(5)
13호를 꾹꾹 밟으며 감촉을 즐기던 클럽은, 별안간 울리는 휴대폰에 깜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보면 친구들을 기다리게 했었다. 자리를 너무 오래비웠나.
분명 친구일 거라고 생각하고 휴대폰을 꺼냈더니, 웬걸, 화면에 뜬 건 [발신번호 제한]이라는 여섯 글자였다.
“.......”
뭐지? 한순간 받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클럽은 순순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그녀에게 나름 익숙한 목소리였다.
[안녕하신가요, 클럽 양. 잘 즐기고 계신가요.]
이 목소리는.
“참모.....!”
[아하하, 제 목소리를 기억해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뿌드득, 돌덩이라도 으스러뜨릴 기세로, 클럽이 거세게 이를 갈았다.
빌런 조직 【어비스】의 참모는 악의 카리스마였던 13호와 비등할 정도로 유명하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략으로 몇 번이나 히어로 및 각종 국가기관들을 농락했기 때문이다.
그의 귀신 같은 지모와 책략은 언젠가 나라를 전복시킬지도 모른다며 두려워 하던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클럽은 몇 번이나 도전했으며, 그리고 패할 수 밖에 없었다.
17전 16패 1무.
그게 두 사람 사이의 전적이었다.
“어머나, 목소리만은 허세가 가득하군요. 저번에 저에게 당해서 온 몸이 아작이 났을 텐데.”
[그 때는 감사했습니다, 마드모아젤. 아작난 뼈를 고치느라 수고는 좀 들었습니다만, 지금은 예쁜 아가씨를 희롱하며 즐길 정도로는 나았거든요. 아쉬우시겠네요, 당시 작전에 투입했던 제 부하 11명과 맞바꿔서 얻어낸 쾌거였는데.]
그 말대로.
일전 클럽이 참모에게 입혔던 중상은 단순히 실력에서 낸 것이 아닌, 붙잡았던 어비스의 잔당 11명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얻어낸 전과였다.
그렇게 하고서도 결국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렸으니, 클럽이 참모에게 잔뜩 열을 낼 만도 하다.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죠.”
[지나가던 예쁜 아가씨가 알려주셨습니다. 문제 있나요?]
빠득, 이를 갈았다.
히어로의 사생활은 비공개다. 그런데 휴대폰 번호가 알려졌단 건, 이름부터 시작해 웬만한 개인정보는 전부 저쪽 손에 들어갔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그 때의 답례는 다음 번에 해드리도록 하지요. 일단 거기 있는 두 사람은, 실례지만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이익!”
말리고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눈 앞에 쓰러져 있던 두 사람, 13호와 백의의 다크서클 여성이, 바닥의 그림자에 파묻히듯 안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이게 무슨?!
[당신에게 당하고 눈을 뜬 새로운 능력입니다. 당신의 뜨거운 접대,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몸은 좀 아팠지만 지금은 큰 은혜를 느끼고 있을 정도예요.]
“반드시, 반드시 쳐 죽여버리겠습니다, 참모.”
[아하하하, 이거 무섭네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만.]
지금껏 가벼웠던 참모의 목소리에, 일순 진지함이 깃들었다.
[......13호님과 도로시에게 손댄 것, 후회하게 해드릴테니 기대하시지요. 목을 씻고 기다려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후회하게, 인 걸까.
“바라던 바입니다, 참모.”
이쪽이야말로, 다음번엔 태어난 걸 후회할 정도로 잔뜩 벌해주겠다. 클럽은 홀로 결의를 다졌다.
우웅- 웅- 우웅-
그 때,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발신번호 제한]이라고 떠있다.
참모? 어째서 다시 전화를 건 거지?
의아해하며 통화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예상했던대로 참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목을 씻고 기다리라’고 했는데, 좀 더 웃을 수 있게 ‘가슴을 씻고 기다려 주십시오’던가, 아니면 ‘은밀한 그곳을 깨끗하게 준비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클럽양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가슴이 얄팍한데 저와의 결전 이전에 두유와 마사지를 통해 어느 정도 크기를 키워서 준비해주는 노력 정도는 해주시길 진짜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마주했는데 제 물건이 반응하지 않거나 하면 저에게도 당신에게도 상당히 곤란하지 않겠습――]
뚝, 끊어버렸다. 이번에는 클럽 쪽에서 통화를 끊었다.
당장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과 귀를 세척해서라도 방금 전 들었던 개소리를 씻어내고픈 마음, 그리고 이번엔 자신이 통화를 끊어주었다는 약간의 만족감 사이에서 클럽은 잠시 깊은 고뇌와 갈등을 느꼈다.
* * *
“사, 살았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13호님.”
클럽에게 희롱당하나 싶더니, 다음 순간 시야가 새카매졌고, 그리고 눈을 떠보니 어느 방 안으로 옮겨진 채였다.
대강의 인테리어를 보니 호텔로 보였고, 의자에는 여유로운 얼굴의 참모가 앉아 있었으며, 그 옆에는――
“......뭐하고 있는 거냐, 너.”
“보면 모르시나요. 마사지를 해주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손의 혈을 눌러주는 겁니다. 잘 하면 기분 좋다구요?”
다소곳하게 앉은 애플이라는 이름의 히어로가, 그런 참모에게 손을 맡기고 있었다.
눈은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멍한데다 약간 상기된 표정. 그러나 겉옷을 탈의해 얇은 블라우스 차림이 되었을 뿐이지, 딱히 야한짓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진짜 뭐하고 있는 거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참모는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해주었다.
“애플 양의 세뇌심도 개발의 일환입니다.”
“......여자랑 단 둘이 있으면서 야한 짓을 안 한다고? 너 정말 참모냐?”
“13호님의 안에 제 이미지가 어떤지 상당히 신경 쓰이는군요. 저도 여자랑 단 둘이 있다고 야한 짓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랬구나. 항상 네 언동엔 신경 쓰여서. 오해해서 미안하다.”
“13호님이 오시기 전에 이런저런 장난은 쳤습니다만.”
“역시 그렇잖아!”
13호는 어허허 웃으며 애플의 손을 주무르길 계속했다. 천천히, 부드럽고 리드미컬하게. 이쪽저쪽을 누르고 때론 손가락을 깍지끼기도 하고, 또는 다정하게 양손으로 덮어주기도 한다.
손을 멋대로 희롱당하는 애플은, 방 안에 나타난 13호나 도로시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다만 13호의 움직임을 따라 숨을 거칠게 내거나, 몸을 떨거나 하며 행동 하나하나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뭐지. 단순한 손마사지일텐데, 되게 음란한 광경처럼 보인다.
참모의 말로는, 강한 자극도 필요하지만 이처럼 소소하고 약한 터치로 의식의 바깥을 점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 같다. 중요한 건 강약의 조절이라고.
도로시도 금방 깨어났다. 머리에 살짝 상처가 남긴 했지만, 흉터가 남을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클럽이란 계집한테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있을 때, 너는 여기서 그 여자랑 찐득찐득 끈적끈적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잔뜩 분이 난 도로시가 길길이 날뛰긴 했지만.
결국에는 에너지바와 닥터페퍼 두 달 분으로 타협을 보고, 우리는 회의를 위해 적당히 둘러앉았다. 나와 참모는 의자에, 도로시는 침대에. 애플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간다’라는 암시를 걸어 돌려보냈다.
“이번엔 정말 위험했어요. 참모가 되어서 적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 실책입니다.”
먼저 참모가 고개를 숙였다.
“그 능력을 포함해서 알아보기 위해 했던 미행이니까. 네가 고개 숙일 게 아냐. 하지만 도로시한테는 미안하게 됐어. 휘말리게 해서.”
“그렇습니다. 거기다 다치기까지 했으니까요.”
나와 참모가 나란히 사과하자, 악의 과학자는 흥,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다.
“그런 건 됐어. 그것보다는 그 계집에게 세 배로 복수할 수 있는 방책이나 마련하도록 해.”
“문제 없습니다, 도로시 양.”
참모는 싱글싱글 미소지었다.
“애플 양에게서 빼낸 정보, 그리고 조금 전 접촉 때 촬영한 영상. 덕분에 클럽 양의 ‘천리안’의 정체를 알 게 됐으니까요.”
“진짜냐?”
“그렇습니다, 13호님.”
클럽의 천리안. 우리의 미행을 알아채고, 날린 투사체를 조작하는 능력을 보조해 주는, 얼핏 보면 틈을 찾을 수 없는 만능 능력.
그러나 그 정체를 알았다며 참모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강의 대책은 세워뒀습니다. 아직 준비는 더 필요하지만, 다음 번엔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13호님과 도로시 양을 괴롭게 한 그 아가씨에게는, 철저하게 매운맛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그는 드물게도.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듯, 그러나 평소와 다름 없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했다.
* * *
“클럽, 언제까지 그렇게 꽁해있을 거야?”
“......전혀 꽁해 있지 않습니다. 오해예요, 스페이드 씨.”
13호와 도로시, 어비스의 두 사람을 놓친지 이틀이 지났다.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그마한 흑발의 히어로 소녀는 여전히 종종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다.
두 사람을 놓쳤던 것보다, 그 능글맞은 참모에게 당했다는 것이 불만이 큰 모양이다.
클럽은 히어로로서 일할 때, 즉 빌런을 상대할 때는 늘 억지로 의식을 바꾸는 경향이 있다.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무정한 성격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담담하게, 오히려 다음 승리의 포석으로 삼는 집념의 소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참모에게만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매번 진심으로 분개한다.
아마 8번쯤 놓쳤을 때부터 그렇게 됐던 것 같은데, 둘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럴 때는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도와주는 거다. 오랜 경험의 산물로, 스페이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도 조깅하러 가나요? 스페이드 씨는 대단하네요. 상황대기일 때 빼곤 매일 빠짐없이 달리시니.”
“운동하면 기분 좋거든. 클럽도 마력에만 의존하지 말고 좀 더 운동하지 그래? 같이 달리자. 조금 달리면 기분이 좀 나아질 수도 있어.”
“오늘은 됐어요... 그나저나 기지 안에 샌드백 하나 설치해놔도 되나요.”
“네 방에 설치해.”
“방 좁아지니까 싫은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끙끙대는 클럽을 뒤로 한 채, 기지 밖으로 나왔다.
밤의 거리는 한산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기분 좋다. 이제 곧 한껏 추워질 시기가 오겠지만, 그 전까지는 잔뜩 만끽하고 싶었다.
운동화의 끈을 다시 한번 단단히 매고, 그대로 밤의 거리를 달려나갔다.
공원을 달리는 것도 좋지만, 거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도 순찰이 된다. 그래서 스페이드는 매일 루트를 바꿔가며 거리를 달리고 있다.
자,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H강의 야경을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N타워 쪽도 경치가 좋다던데. 그치만 그쪽은 이 시간까지 커플들이 많을 것 같고. 순찰이라는 점을 생각해 봐도 인적이 드문 곳을 달리는 편이 좋고? 으으으음~ 어디로 갈까~.’
단순한 조깅이라지만, 마력의 보조를 받기 때문에 꽤 멀리까지 갈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S시의 유명 스폿은 한 달이면 제패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래저래 고민하면서도, 이미 스페이드는 달리고 있었다. 마치 이미 목적지를 정해놓은 듯이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어라, 어딜 가려고 했더라?’
안 그래도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적건만, 달릴수록 점점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샌가 주변이 공장이나 폐건물이 잔뜩 늘어선 알 수 없는 지역으로 와버렸다.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마력의 보조가 있었음을 감안해도 꽤 오래 달렸기 때문에, 땀이 좀 났다. 차가운 밤바람에 열을 식히며, 챙겨온 이온 음료로 수분을 보충했다.
가로등이 적어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는, 생각 이상으로 으스스했다.
뭔가 볼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자신은 여기로 와 버린 걸까? 스페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뜀박질을 멈추고 어딘가로 향했다. 머리는 모르지만 몸은 알고 있는 것 같다. 묘한 기분이다.
‘여기, 처음 와본 게 아닌 것 같아.’
이런 곳에 올 일이 없을 텐데,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적어도 처음 온 건 아니다. 잠시 고민하다, 일전에 애플을 구출하기 위해 왔었던 창고 근처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여기로 오게 된 걸까?
‘분명 이 건물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 이 창고 안에서, 납치된 애플을 보호하고, 13호를 격퇴...... 했.......
“읏...!”
갑작스레 찾아온 어지럼증에, 스페이드의 다리가 한순간 휘청였다. 왜 이러지? 너무 달려서 그런 걸까?
의아해하는 스페이드의 시야에, 누군가가 보였다.
후드 차림의 누군가가, 짙은 그늘 아래서 나왔다. 가로등의 빛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비췄다.
“안녕하신가, 스페이드. 오늘도 운동이야? 열심히 하네. 건강한 모습은 남자나 여자나 보기 좋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