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2 일상이 패배인 빌런, 패배가 싫은 히어로(4)
“두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목적이 저인지 아니면 제 친구들인지 몰랐거든요. 이렇게 보니 저였던 것 같네요. 다행이에요, 친구들에게 무서운 경험을 시키지 않아서.”
“이봐. 난 그냥 아는 여자랑 쇼핑하러 나온 것 뿐이거든? 아직 나쁜짓도 안 했는데 그냥 보내주면 안 될까?”
“빌런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히어로가 있을까요. 그보다 당신은 수배까지 된 빌런이라고요?”
“그래서 끝까지 나를 잡으시겠다... 그런데 너, 지금 무기도 없잖아? 오히려 네가 반격 당하는 건 생각 안 했어? 그대로 도망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도망? 누가요? 제가요?”
클럽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길게 찢어진 미소는, 잔혹하리만치 자신감과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클럽의 손이 움직이고, 나는 반사적으로 도로시를 끌어당겨 급하게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퍼억-!
“억?!”
“13호!”
명치를 뚫어버릴 듯 파고든 일격에 허리가 푹 고꾸라졌다.
클럽이 직접 움직인 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오만하게 서있었다.
아무런 무기도 없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날렸다’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탱그랑, 하고 100원짜리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다.
클럽은 유쾌하게 웃으며, 머리 위의 리본을 꾹꾹 당겨보였다.
“확실히 오늘은 비번이라 화기류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히어로들은 비번이라도 이런 표식을 하고 있다고요? 언제 어떻게 빌런들이 덮쳐올지 모르는데, 뭔가 대비를 하는게 당연하죠.”
“동전을, 날리다니... 중국 무술의 달인이냐, 넌?”
분명 무술 중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나한전이었나.
“하하. 무술의 고수라면 체크 씨죠. 저희 7번대의 동료 중에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전 그냥 대충 모양새만 배운 거고――”
나머진, 능력 보정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엄지에 올린 동전을 위를 향해 탁, 튕겼다.
빙글빙글 돌며 솟아오른 동전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나 싶더니, 순간 멋대로 방향을 바꿔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콰악-!
“크으!”
도로시를 노리고 쏘아진 동전을, 팔을 내밀어 막았다.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에 이를 꽉 깨물었다.
이 녀석, 여자 상대로 인정사정없이...!
“뭐야, 그냥 개쓰레기 빌런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좋아요. 제 안에 13호 씨의 이미지를 조금 상향 수정하도록 할게요. 쓰레기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킨다. 스페이드 씨를 생각해서도 유익한 정보네요.”
“이봐! 이 녀석한테는 전투능력 따위 없다고! 나만 노려!”
“에, 빌런의 말을 믿기는 좀 그런데요.”
클럽은 난처하다는 듯 뺨을 긁고는, 좌르륵, 주머니에서 동전을 잔뜩 꺼냈다.
“그리고, 빌런을 배려할 이유도 없습니다.”
짤그랑-! 짤랑-!
클럽이 손에 든 동전을 그대로 공중에 흩뿌리듯 집어던지자, 허공에 떠오른 동전들이 일제히――나와 도로시를 노리고 쏘아졌다.
투두두두두두두!
탄환처럼 날아드는 동전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나는 필사적으로 달려 도망쳤다.
“13호!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아파 뒈지겠네! 저 여자 저거 나중에 반드시 복수해 주겠어! 구체적으로는 고양이 귀를 달게 해서 열 번 빙글빙글 돌고 냥냥 하고 울게 만들어주겠어!”
“괜찮아 보이네!”
달린다달린다달린다달린다!
간당간당하게 남아있던 스페이드의 마력을 전부 소진할 기세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계토끼마냥 필사적으로 달려나갔다.
날아오는 동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담벼락을 엄폐물로 이용하며 필사적으로 피해냈다.
“트하...! 후우! 빠져나왔다!”
골목길을 몇 번이나 꺾었을까. 왔던 길을 되돌아와 드디어 인파가 북적이는 거리로 나온 나는 담벼락에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이대로 사람들 틈에 섞이면, 그 동전을 통한 저격은 더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무기도 없겠다. 들켜도 상관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착각이었다.
저건 존재 자체가 머신건이잖아. 저런 걸 길거리에 풀어둬도 되는 거야?
“......훠이, 저리 가라, 고양아.”
사람을 안고 있는 게 신기해 보였을까, 골목길 초입에 머물러 있던 고양이가 내 발목에 뺨을 문질렀다.
조금 전까지 대치했던 ‘동전살인마’와는 다른 평화로운 모습에 그만 몸에서 힘이 빠지려 했다.
“13호! 머리!”
도로시의 말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슉-! 콰앙!
비스듬하게 위에서 쏘아져 내린 동전 하나가 내 관자놀이를, 도로시의 뺨을 스치고 바닥에 꽂혔다.
수직으로 꽂힌 동전은, 바닥에 쩌적쩍 거미줄 같은 금을 내며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와오.”
“단순한 일직선 저격이 아니야! 허공에서도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고 있어! 인파 속에 있어도, 아니 인파 속이면 더 피하기 어려울 지도...! 아, 또 온다!!”
판단은 빨랐다. 인파 속에 숨어봐야 움직이기도 어렵다. 나는 서둘러 거리를 지나쳐 인적이 뜸한 골목길을 향해 뛰어들었다.
동시에 다시 시작된 머신건 같은 동전세례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투두두두두두두두-!
“아악! 아파아아아아!!! 다리에 맞았어!! 진짜 미쳐버리겠네!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여길 핀포인트로 노리는 거야!”
“그거야말로 저 계집의 능력이겠지. 하지만 자동 유도탄은 아니야. 그렇다면 빗맞힐 일도 없을 테고, 저렇게 각도가 다양해질 일도 없어.”
동전을 피하기 위해 꺾어지는 길은 무조건 꺾으며, 달려나갔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슬슬 마력이 바닥날 정도로 도망쳤을 때,
“...이봐, 13호. 멈췄다.”
“어, 응?”
도로시의 말에 그제야 발을 멈출 수 있었다.
온 몸이 땀 때문에 끈적끈적해 기분 나쁘다. 잠깐 숨을 고르고 가기로 했다.
길가 한복판에 서 있다가 재수 없게 클럽과 마주칠 수도 있으니, 근처의 주차장에 숨어들어 사각지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아? 꽤 많이 얻어맞았는데.”
“허억, 후우...... 많이 아픈데, 침이라도 발라주게?”
머리를 따악 얻어맞았다. 기껏 몸을 날려 구해줬는데 좀 더 상냥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
“어쨌든 능력을 사용하는 장면을 본 건 이득이야. 참모 녀석이면 뭐라도 기믹을 발견할 수 있겠지. 뭔가 대책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되네.”
안 그러면 손해만 본 셈이니까.
끝까지 따라오는 탄막 공격이라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분명 저 능력에도 뭔가 허점이 있을 것이다.
클럽의 히어로 랭크는 B. 낮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높지도 않다. 이 급수에는 실적도 포함되지만, 그 외에도 능력에 뭔가 제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제약'이 뭔지만 알면....
『냐아~.』
“이런 곳까지 고양이가 있네. 이번엔 삼색고양이야.”
“만지려하지마. 길고양이한테 균이며 벼룩이 얼마나 많은데.”
가볍게 쓰다듬어주려 하자 도로시에게 제지당했다. 에이, 아쉬워라.
그 때, 시야 한구석에 뭔가가 보였다.
그게 소리도 없이 날아온 동전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아주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도로시!!!!”
“에?”
얼빠진 목소리를 내는 도로시를 껴안는 것과 동시에, 머리 측면에 강렬한 충격이 엄습했다.
* * *
“13호! 야! 정신차려!”
어비스의 두 사람이 숨어들어온 주차장에 클럽이 발을 들였을 때, 빌러 13호는 천장을 올려다 보는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여성 빌런――다크서클이 짙은 가운을 쓴 앳된 여성은 당황한 눈치로 13호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일격을 정통으로 맞은 모양이다. 특별히 공들여 마력을 주입했고, 아까 전 마구 쏴댔을 때보다 몇 배는 위력이 강했을 테니.
“기절......은 아니군요. 가볍게 골이 흔들린 정도일까요. 괜한 고통을 줘서 죄송합니다. 다음 한 방으로 깔끔하게 기절시켜드리겠습니다. 죽이진 않아요. 이것저것 조사할 게 있으니.”
“너...... 히어로 계집.”
감정기복이 적어 보이는 얼굴이면서, 다크서클이 짙은 눈은 사납게 클럽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걸 안 거지?”
“그게 제 능력입니다. 쉽게 말하면 ‘천리안’이죠. 제 표적이 된 이상, 당신들은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습니다.”
주저앉은 악의 과학자를, 클럽은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며 타박타박 다가갔다.
오만해 보이는 표정은 여전하지만, 그 얼굴에 웃음기는 없다.
“스페이드 씨가 신경 쓰는 상대라고 하니 제가 손을 대는 것도 죄책감은 들지만요... 히어로로서, 빌런을 그냥 둘 수는 없어서요.”
“개소리.”
클럽의 말을, 도로시가 일축했다.
“난 과학자이면서 심리학자야. 오늘 미행하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네 작은 몸짓, 작은 헤프닝 하나하나, 그리고 너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며 네 성격에 대해 대강 분석해봤다.”
친구들과의 대화, 점원을 대할 때, 얼버무리는 표정, 게임센터에서의 일, 참모에게 전해 들은 그녀의 정보.
“너는 단번에 우릴 무력화 시킬 수 있었으면서도 굳이 도망치게 두었고, 몰이사냥마냥 우리들을 위협하고 유도했지. 단순히 괴롭히는 걸 즐길 뿐이었잖나, 계집. 도망치는 우릴 보며 거기가 젖어버린 거 아닌가? 네년은 그저 단순히 가학체질의 오만한 여자일 뿐이야. 상대방에게 학대를 가하는 것으로 기쁨을 누리며, 상대보다 우위를 점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정말이지, 아니꼬우면서 불쌍한 여자야, 너는.”
“............................................흐응.”
티잉-!
아무 말 없이, 클럽은 손가락의 동전을 튕겼다. 공중에 빙글빙글 돌며 떠오르는 동전. 그러다 어느 순간 도로시를 향해 쏘아져, 도로시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맞췄다.
따악!
“윽......!”
백의에 감싸인 작고 가느다란 몸이 풀썩 쓰러졌다.
탱그랑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던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것 참. 남이 저를 분석한다고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네요.”
인적이 없는 주차장 안, 홀로 선 클럽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쨌든 빌런 두 사람은 무력화시켰다. 나머지는 체포전담반에 연락해서 이송해 갈 뿐.
――가학체질의 오만한 여자일 뿐이야.
――아니꼬우면서 불쌍한 여자다, 너는.
.......
조금, 불쾌하네.
“도......로시.”
“어머나, 깨셨군요.”
“너...... 이 자식.......”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아요. 머리가 흔들리면 어지러울 테니.”
기분이 나쁜 듯, 클럽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말하지 않아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이 저리다. 어디를 잘못 맞은 건지 아니면 능력의 영향인지 알 수가 없지만,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거냐...!
클럽은 쓰러진 13호에게 다가갔다.
스페이드가 관심을 가진(것처럼 보이는) 남자. 과거 빌런의 카리스마라고 불렸던, 최강최악의 빌런. 그리고 이 기분 나쁜 여자의 동료.
클럽은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잠깐 즐기는 정도는 괜찮겠죠.”
“......응?”
13호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신발을 벗고, 이어서 양말을 벗었다.
자그마한 맨발이, 13호의 얼굴을 밟았다.
“우극?!”
“확실히 이 여자가 말한 게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뭔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느끼고는 있지만, 잘 모르겠거든요. 자기 자신을 아는 건 역시 어렵네요.”
뺨을, 코를, 이마를, 얼굴 전체를 꾸욱꾸욱 밟는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은 채 여전히 드러누운 13호. 발로 가려진 시야 속에서 이따금 위에서 짓밟는 클럽의 스커트 사이로, 다소곳한 속옷이 보였다.
“저, 절경이네.”
“보여버렸나요... 이렇게 당하는 와중에도 그런 걸 눈에 담다니 변태로군요, 13호 씨는. 이것 참 부끄럽긴 하지만요. ...뭐랄까, 근데 말로 할 수 없는 쾌감이 있달까....”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부르르 몸을 떠는 클럽. 13호를 밟는 기세가 더해졌다.
클럽의 발은 얼굴에서 벗어나, 목을, 쇄골을, 명치를, 배와 옆구리를――그리고 13호의 성기에 닿았다.
“윽.......”
“단단해져버렸네요. 이런 상황에도. 당하는 걸 좋아하는 건가요.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빌런 짓을 계속 해댈 리가 없겠죠. 약해빠져서 매번 당하면서도,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나타난 건, 그런 이유였던 거군요. 터무니 없는 변태자식이었군요, 13호 씨는.”
부드럽게, 또는 난폭하게.
클럽의 맨발이 13호의 성기를 자극한다.
담담하고 차가운 표정이지만, 살짝 달아오른 뺨이 그녀가 흥분했음을 알려주었다.
“......이거, 즐겁네요. 13호 씨, 차라리, 제 것으로 만들어버릴까... 이 여자도 같이, 어딘가에 가둬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