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2 일상이 패배인 빌런, 패배가 싫은 히어로(2)
애플이 납치되고 스페이드가 구출을 위해 투입, 13호와 대치했던 날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스페이드 씨? 저기요?”
“......핫?!”
히어로협회 7번대의 막사 안, 스페이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정신을 차렸다.
“스페이드 씨 괜찮아요? 답지 않게 왜 그렇게 멍해 있어요?”
“어라? 나... 멍해 있었어?”
“그래요. 오랜만에 복귀한 애플 씨가 특별히 힘내서 식사를 준비해줬는데,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면 슬플 거라고요.”
“아하하, 클럽 씨. 전 괜찮아요~.”
각 부대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히어로들은 웬만하면 각 부대의 막사에 거주하며 생활한다.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고, 자칫 가족들이 해코지 당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막사라곤 해도 시설이 상당히 호화롭기 때문에 생활하는 입장으로선 불만을 가지는 일은 거의 없지만, 식사만은 따로 준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각 대원들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각자 일들이 바쁜 대원들이지만, 점심이야 어쨌든 아침과 저녁만큼은 웬만해선 함께 얼굴을 보며 식사를 하게 된다. 오늘은 대장과 나머지 한 명의 대원은 일 때문에 자리에 없지만.
스페이드의 맞은편에 앉아, 발치의 고양이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단정한 흑발의 후배, 클럼이 책망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나, 멍해 있었구나....
“스페이드 씨, 왠지 어제부터 이상해요. 애플 씨를 구출하러 갔을 때 뭔가 있었던 거 아녜요?”
“아무것도 없었어. 나타난 13호는 언제나처럼 도망쳤고, 애플은 무사히 구출. 그 외에 뭐가 더 있다는 거야?”
“하지만 어제부터 계속 정신이 딴데 가 있는데요. 13호한테 무슨 짓을 당한 게 아니라면 짐작 가는 게――”
갑작스레 클럽은 아, 하고 말을 멈췄다. 뭔가 번뜩 스쳐지나간 생각이 있는 것이다.
최근 스페이드의 13호를 향한 언동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13호가 없어서 심심해보인데다, 반드시 자기 손으로 13호를 체포하겠다느니,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느니....
그런가. 그런 것인가!
‘Fuck! 깨달아버렸습니다! 스페이드 씨도 여자. 13호는 그래봬도 얼굴은 나름 못 봐줄 정도는 아니고... 여러 가지 눈 감아준다면 나름 준수하게 생겼다고 쳐 줄 수 있으니까요. 아니, 스페이드 씨라면 의외로 순정소녀 같은 면이 있으니 외모보다는 뭔가 소소한 해프닝만으로 사랑에 빠진 걸지도...!’
“......클럽, 표정이 이상한데. 너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아니 뭐, 스물 둘이면 아슬아슬하게 사랑에 빠진 ‘소녀’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싶어서....”
“무슨 소리야 그건?!”
당황하는 바람에 젓가락을 놓쳤다. 땡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가 빌런이라. 그것도 그 13호라. 적대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라니, 불타오르네요. 좋잖아요?”
“좋~지~않~아~! 진짜 무슨 소리야. 그런 소리 하면 나 진짜로 화낸다?”
“아닌가요?”
“아~니~야~.”
“어라? 그런가요? 저도 그런 줄로 알았는데.”
“애플까지? 진짜 아니야 그런 거. 하지마 진짜.”
스페이드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집었다.
“글쎄요. 그치만, 스페이드 씨 상당히 쌓여있는 거 같은데. 욕구불만 아닌가요?”
그리고 그대로 쿵! 테이블 밑에 머리를 찧었다.
“아야야...! 애플?! 요, 요, 요, 욕구불만이라니.... 아니, 그보다 그렇게 다이렉트로.”
“생리현상이니 감출 것도 아니잖아요? 성인인데 이 정도야. 전 이쪽 화제에 익숙하거든요. 땀 냄새라던가 무의식 중에 보이는 움직임이라던가... 제 판단으론 스페이드 씨.......”
스페이드는 기겁했다. 애플이 코를 가져다 대 킁킁 맡아보거나, 몸 이곳저곳을 만지거나 간지럽히기 시작한 것이다.
귓가에 훅, 하고 바람을 불어넣자, 몸이 찌르르 경련했다. 도, 동안인 얼굴로 이 무슨 대담한?!
“애, 애프을~~~~!”
“어머나, 실례. 스페이드 씨가 너무 귀여워서. 가끔 지하 감옥 같은데 가두고 철저히 더럽혀주고 싶은 타입이니까요, 스페이드 씨는.”
무서운 아이...! 스페이드는 애플을 향한 인식을 고쳐먹었다. 아니, 그러고보면 애초부터 이런 면이 없잖아 있었지. 지금까지는 먼 나라 얘기 같아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그리고 애플이 한, 욕구불만이라는 말....
‘진짠가......?’
부끄러워서 말은 못했지만, 어젯밤부터 계속, 혼자 있을 때면 알 수 없는 욕구가 서서히 올라왔다.
정말로 서서히, 감질날 정도로 미미하게, 그러나 착실하게.
속이 뜨겁고, 뭔가를 갈망하는 것 같은데 그 ‘뭔가’를 모르겠다. 채워지지 않은 듯한 기분에 속이 답답하다.
‘거기다 그 녀석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어렴풋이 13호가 떠오른다. 그 얼빠진 얼굴이 떠오른다. 따뜻하고 상냥한 손가락이 떠오른다. 척 보기엔 가늘지만 알고 보면 나름 잔근육이 있는 단단한 몸이――
‘히이이익~~~?!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냐! 아니라고!’
“스페이드 씨?”
“호오, 호오. 진심을 알아차리고 나니 혼란스러운가 보네요. 그럴 수 있죠. 애플 씨, 저흰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주죠.”
스페이드는 고개를 훼훼 저어 머릿속에 떠오른 13호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13호의 손가락이 따뜻하다거나, 몸이 잔근육이 많다거나, 단단한 걸 알고 있지? 떠올려보면 더 자세히, 뭐랄까, 이런저런 것들도 생각날 것 같은데.
‘내 망상인가?’
애초에 아버지 말고는 남자 손도 잡아본 적이 거의 없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자친구를 사귄 적도 없다.
인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는 많았지만, 선두에 선 외모와 이래저래 센스가 좋은 그녀를 그런 쪽으로 노려볼 용기가 있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자랑할 생각은 없지만, 지나치게 예쁜 것도 흠이다.
“어쨌든. 애플이 해준 밥은 늘 맛있어. 근데 어째 입 안도 꺼끌꺼끌하고 기분이 이상한 것 뿐이야.”
“입이요? 왜요?”
“진짜 뭐지? 어제 13호 녀석이 연기를 뿌렸는데, 그것 때문인가? 검댕이라도 묻은 기분이야. 어쩐지 엉덩이도 아프고....”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은 들었지만, 일단 밥부터 먹기로 했다. 버터에 구운 닭가슴살 샐러드를 입에 넣자, 견과류의 고소한 향이 스며들었다. 역시 애플의 밥은 맛있다니까.
“그러고보면 클럽 씨는, 사귀는 남자친구 없나요?”
“저요? ......으~음. 없네. 팍, 하고 끌리는 게 없어서.”
“귀여워서 인기 많을 것 같은데. 남자들한테 인기 많을 성격이기도 하고요.”
“글쎄요. 고백 받은 적도 몇 번 있긴 하지만.”
다 차버렸다. 이 놈도 저 놈도 딱히 끌리진 않았다.
“신기하네...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죠? 이상형 같은 게 있나요?”
“뭐, 굳이 말하자면,”
발목을 쓰다듬는 새카만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클럽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밟아주기 좋은 남자, 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그 미소에는, 사람의 신경을 찌르는 가학적인 빛이 희미하게 서려있었다.
* * *
“그러니까, 내가 왜 너랑 이런 곳에 와야 되나고!”
“너무 그러지 마... 참모의 의견인데 나보다 어떡하라고.”
툴툴거리는 악의 과학자, 도로시를 나는 반쯤 포기하며 달래주었다.
지금 우리가 와 있는 곳은 시내의 커다란 성인용품점. 연한 핑크빛을 기조로 한 의외로 세련된 인테리어. 그러나 섹스를 위한 갖가지 용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니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눈 둘 곳도 없을 것이다.
이 곳에 오게 된 건 참모의 발안이 원인이었다.
‘세뇌를 통해 7번대를 공략한다’라는 방침이 정해졌으니, 전략의 폭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비품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 원 탑으로, 각종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갖가지 성인용품이 필요하다, 라는 게 참모의 결론이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예산안을 만든 결과 보스의 방에서는 쫓겨났지만, 그래도 구입하는 것 자체는 허락을 받았다.
“돈이 있으면 그냥 인터넷으로 구입하면 되잖아! 왜 나까지...!”
“참모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니까’라면서 보낸 걸 어쩌겠어.”
“그럼 더더욱 그 녀석이 와야지, 왜 나를 부른 건데. 왜 나냐고!”
“그 녀석 아직 다 안 나았잖아. 스페이드의 마력이 있어도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이 녀석, 깡깡대는 소형견 같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어쨌든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까. 일행이 있는 편이 의심을 덜 산다네. 나는 잘 모르지만.”
“돌아가면 발톱 하나 쯤은 뽑아버리겠어, 참모 녀석.”
어디에 눈을 둬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시종일관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움직이는 도로시.
......뭐, 참모의 계획에 ‘처음 와 보는 성인용품점에 부끄러워하는 도로시’도 포함되어 있을 게 틀림없다. 그 변태 녀석이라면, 이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테고. 아니, 어쩌면 몰래 카메라 같은 걸 달아둬서 촬영하고 있을지도.
어쨌든 모든 행동의 중심이 ‘여자’인 녀석이니까.
그보다 그 녀석을 그렇게 만든 게, 분명 클럽이라는 히어로였지.
총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히어로로, 아무리 사각지대에 숨어도 다 보인다는 듯 놓치는 법이 없다고 들었다.
분명 ‘탐지 특화’의 별자리일 거라고 추측은 하고 있지만, 아직 자세한 내용은 불명이다.
그리고 정보만 갖추어진다면, 참모의 작전은 실패할 일이 없다. 어째서 우리 조직에 남아있는지 의문일 정도로 유능하니까, 그 녀석. 그런 만큼 단점이 쓸데없이 두드러지지만.
“이, 이, 이, 이건....”
“우와, 정교한데.”
남성의 성기를 본뜬 외설스런 모양새의 용품에, 도로시가 기겁을 했다.
아무튼 참모 녀석, 이걸 노리고 도로시를 보낸 게 분명해. 나이스다.
“끄응...... 세상은 신비하군.”
적당히 쇼핑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새침한 표정의 도로시가 붉어진 뺨을 손부채로 팔락팔락 식혔다.
제대로 보지도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주제에 이 도구는 뭔지, 저 도구는 어디에 쓰는지 물어댄 탓이다.
“대단했지, 그 점원.”
“우... 같은 여자가 해주는 설명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런 도로시의 호기심에 의외로 청순한 인상의 여직원이 친절하게 답해주었는데, 문제는 이 설명이 점차 에스컬레이트하나 싶더니 신세계의 지평선을 열 정도의 견식을 보여준 것이다.
아, 맙소사.
나도 그 도구를 그렇게 사용하는 줄은 몰랐지.
여자들에겐 그런 세계도 있었구나.
정말이지 놀라운 신세계를 경험했다. 역시 현장체험은 중요해.
“시간이 늦었네. 저녁은 먹고 들어가자. 먹고 싶은 거 있어?”
“13호, 네가 사는 거야?”
“......뭐,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있으니.”
“단 거. 무조건 단 거 먹고 싶어. 케이크 먹을래.”
“케이크는 식사가 아니야.”
“다른 건 필요 없어.”
“너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고.”
그러고 보면 늘상 에너지바나 닥터페퍼로 끼니를 때웠지, 이 녀석.
“그러니까 그렇게 말랐지.”
“필요한 영양분은 계산하면서 이것저것 보충하고 있어. 랄까, 어딜 보며 말하는 거냐 변태 새꺄. 눈깔 찔러버린다? 특제 호신용 초고온 레이저로 녹여버린다?”
“무시무시하구만.”
그런 흉악한 물건을 호신용으로 들고다니지 말라고.
케이크가 맛있을 것 같은 카페를 찾아야겠다. 가능하면 식사도 가능한 쪽으로. 역시 뭐라도 제대로 된 걸 먹여주고 싶었다.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나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다,
“?! 도로시. 실례.”
“헹?”
도로시의 팔을 확 잡아끌어, 골목길 사이에 몸을 숨겼다.
“무, 뭐야, 무슨 일이야?”
“히어로야.”
시내의 거리 한복판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 있었다.
어깨에 닿는 깔끔하게 정리된 흑발에, 클로버 문양이 들어간 리본 헤어밴드.
히어로협회 7번대의 클럽이, 이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