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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1 몰락한 빌런이지만 포기는 없다(4) (5/271)



〈 5화 〉#1 몰락한 빌런이지만 포기는 없다(4)

“끝났으려나.”

약 10분의 시간이 지나고, 환기팬을 가동시킨 13호는 창고의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아래로 가라앉은 희미한 연기가 눈에 보였지만 이 정도면 인체에 영향은 없다. 혹시 몰라 챙겨온 방독면을 쓰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이 창고는 자금은 남아도는 어비스의 건물로, 명의는 평범한 무역회사로 되어있다.

부하들이 거의  빠져나간 지금 다시 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유능한 참모 녀석은 어느 것 하나 버리는 법이 없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미로를 빠져나와, 목표하던 최중심부에 도착한 13호는, 히어로 두 명이 쓰러져 있을 거라던 예상과는 달리 텅 비어버린 공간에 눈을 크게 떴다.


“엉?”


 비었다. 아무도 없다.

중심부, 애플이 묶여있었을 터인 의자가 있던 자리가, 그 바닥이 거대한 망치로 내리친 듯 잔뜩 금이 간  와그작 부서져 있었다.

설마 이 녀석, 의자가 고정된 바닥을 부숴서――


“십, 삼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바로 위에서 들려온 노성에, 13호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내리치는 굉음과 함께 피어오르는 먼지. 위에서 떨어져 내린 스페이드가, 조금 전까지 13호가 서 있던 자리를 발로 꿰뚫고 있었다.

필살의 일격이 빗나갔다는 걸 깨달은 스페이드는, 재빨리 다음 동작으로 옮겼다.

“야아아아아아아아아!”

바닥을 꿰뚫은 것과 반대쪽 발로 바닥을 박차고, 바닥을 구른 13호를 향해 단숨에 쇄도한 것이다.

“크으으!”


무리하게 피하는 바람에 자세가 무너진 13호의 빈틈투성이인 복부에 스페이드의 주먹이 꽂혔다.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날아간 13호의 몸은, 물수제비하듯 바닥을 몇 번이나 텅텅 튀어오르며 구르다 컨테이너 벽에 등을 세게 부딪치고서야 가까스로 멈출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인지, 몸을  늘어뜨린 채로 미동도 하지 않게되었다.


“......흥. 잔꾀나 부리긴.”


 모습을 확인한 스페이드는 다리에 마력을 담고, 그대로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위에 두었던 애플을 구속된 의자째로 데리고 내려왔다.

스페이드도 괜히 A급 히어로인게 아니다. 갑작스런 가스 트랩에 당황하긴 했지만, 강화시킨 각력으로 의자가 고정된 바닥을 깨부수고 천장의 철골 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가스가 공기보다 무거워서인지 아래에만 머물렀단 것이다. 가스가 위로 솟았다면 그때는 무사하지 못했겠지.

“대, 대단해요, 스페이드 씨.”


“음~? 내가 한 대단하긴 하지~.”

스페이드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애플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밧줄이 하나 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애초에 애플은 안에만 있으니까 빌런들한테 표적이 될 일도 없을텐데.”

“그게, 어쩌다 보니 어떤 빌런 조직의 아지트에 대해 듣게 되어서요. 직접 확인해보겠다고 휴가까지 냈던 건데…. 이렇게 돼버렸네요.”


“얘가... 위험하게! 그런 거라면 우리한테 얘기를 해야될 거 아냐! 무슨 일을 하든 보고라도 해야지!”

“그치만 진짜 신빙성 낮은 소문이어서요. 바쁘신 여러분들이 굳이 신경 쓰게 하기도 그래서요. 아무튼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스페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플은 전투능력은 없지만 유능한 인재다. 하지만 지나치게 유능한 것도 생각해볼만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아참! 그보다 꼭 전해드려야 될 일이.”

“응? 뭔데?”


“아지트에 잠입했을 때 알게  건데요.”

잠입까지 했어?! 스페이드는 이제는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애플은 주머니에서 동그란 물체를 꺼냈다. 척보기에는 뭐에 쓰이는지 모를, 단순한 장식품이나 장난감으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중요한 증거품이에요. 이것 좀 자세히 봐주세요.”

“이게 뭔데?”


“안 쪽을  보면 아실 거예요.”


일단  말에 순순히 따라, 애플의 손에 들린 동그란 물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표면은 유리처럼 매끈매끈하다. 안쪽에는 뽀얀 연기가 가득 찬 것 같고, 중심부에선 뭔가 깜박깜박 점멸하고 있었다.


“좀  자세히 봐주셔야해요...  쪽에 뭐가 보이시나요?”

“응? 안개랑... 빛, 같은 게 있는데?”


빛이, 깜박깜박 빛나고 있었다.


“예.  빛을, 좀  잘 봐주세요.”


“왜...?”


물어보긴 했지만, 보면 알 거라는 듯한 태도에 스페이드는 다시금 집중해서 빛을 바라봤다.

빛이란 건 보통 직시하면 아플 테지만, 이 빛은 어쩐지 보면 볼수록 눈이 편해졌다.


빛은 밝은 것 같으면서도 안개 같은 연기에 가려져 희미해졌기에, 무심코 눈에 힘을 주고 보게 되었다.

깜박, 깜박, 깜박, 깜박.


빛은 독특했다. 독특한 파형을 이루며 작아졌다, 커졌다, 불규칙적인 타이밍으로 불규칙적인 모양을 만들어냈다.

다음엔 어떤 모양일까, 다음엔 어떤 밝기일까, 다음엔 어떤 색일까. 기대하며 바라보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스페이드 씨?”


“응......?”

“피곤하시면, 앉아서 보실래요? 자, 이 구슬에서는 눈을 떼지 마시고....”


“그럴, 까.......”


애플이 조금 전까지 구속되어있던 의자에 앉자, 스페이드는 그 손에 들린 구슬에 끌려가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은 살짝 앞으로 향하고, 두 손으론 바닥을 짚고 있지만 그런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빛을 깜박이는 구슬만을 향하고 있다.

“스페이드 씨... 뭐가 보여요?”

“응...... 빛...이 보여....”


“그러네요... 그렇죠. 스페이드 씨, 빛이  번이나 깜박이는지, 세어보실래요?”


“그게....... 하나... 둘......?”

“예, 잘하고 있어요... 셀 때마다, 스페이드의 기분은 점점 좋아질 거예요... 이건 그런 빛이니까.”


깜박, 깜박, 깜박, 깜박.

점멸하는 빛을, 스페이드는 천천히 세어나갔다.

“스페이드, 그러다  막히겠어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겠어요? 그래요, 그렇게... 천천히... 깊게.......”

애플의 말대로, 숨을 천천히, 깊게 들이쉬었다. 아직 남아있던 연기가 안에 후욱 들어왔다.

연기를 마셔서일까, 머리가 띵했다.


그런데 빛이 깜박일수록 몸이 가벼워져서, 마치 하늘 위에 둥실둥실 떠있는 것 같았다. 기분 좋다.


“스물 여덟...... 스물......어.”


스페이드는 입을 우물거렸다. 어디까지 셌는지 까먹은 것이다.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다시 세면 되니까. 다시 한  세봐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인가......?


언제까지 해야하는 걸까. 스페이드는 굳이 답을 구하지 않은 채로,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점멸하는 빛을 다시 바라봤다.


주저앉은 채인 스페이드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그러나 본인은 그조차 깨닫지 못했다.


“스페이드. 이제부터 당신은 잠에 듭니다... 빛을 보면 볼수록,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점점 졸려지게 돼요....”


아아,  말대로다. 빛이 깜박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찾아온다.

하지만 잠에 들 수는 없다. 자신은 이 빛이 몇 번이나 깜박이는지 세야한다.


“...육. .......오. ........사.”

애플은 뭔가 숫자를 세고 있었다. 아아, 헷갈리잖아. 덕분에 지금까지 세던 숫자를 까먹었다.


“삼... 이.... 일......”

어느샌가 스페이드는 애플이 세는 숫자를 따라 세고 있었다.


그리고 카운트의 끝에 다다랐을 때, 스페이드의 졸음도 정점에 치달았다.

“......제로.”


그 말을 끝으로, 스페이드는 몸에서 힘이 빠져,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앞에 앉은 애플의 무릎 위로 털썩 쓰러졌다.

애플은 무릎 위에 얹힌 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무표정하게 내려보았다. 그 얼굴에는 성취감도, 비탄도, 기쁨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조용히 내려다보는 애플의 입을, 등 뒤에서 내밀어진 수건이 덮었다.

“수고했다. 이제 푹 잠들어라.”


애플은 입을 틀어막은 수건 속에서 뭐라 웅얼거린 뒤, 그대로 전원이 나간 것처럼 잠들었다.


“......어찌어찌 성공했네. 역시 대단하구만, 참모 녀석.”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수건을 뗀 13호는, 피로가 한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정말 다신 하고 싶지 않은 작전이야. 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가능하면 첫 번째 작전인 가스 트랩으로 끝내고 싶었다. 참모가 말했던 ‘만에 하나 모종의 방법으로 피했을 경우’의 수를 생각해둬서 다행이었다.

옷을 크게 젖혀, 배에 두른 철판을 꺼냈다. 중심부가 완전히 우그러진 그것은, 스페이드의 반격에 대비해 넣어뒀던 것이다. 일부러 대비해둔 복부를 때리도록 틈을 만들어 유도하기도 했다.


주먹 모양으로 우그러진 철판을 보자니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느껴졌다.

고릴라냐,  아가씨는? 이 주먹을 그대로 맞았으면 진짜로 죽었겠네.

“저번에 맞았을 때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지.”


내가 별자리에게 버림받았던, 그 날에는 맨몸에 정통으로 맞았었지. 정말 이 아가씨에겐 쌓인 게 많다.


먼저 애플의 손에서 ‘최면 구슬’을 회수한 후, 환풍기가 돌아가며 연기가 거의 다 빠져나간  확인하고 방독면을 벗었다. 그리고 스페이드의 몸을 들어 올려 근처 컨테이너 벽에 기대었다.


“스페이드... 일어나라. 다만 지금처럼 정신은 잠든 채로... 그렇지, 둥실둥실 꿈꾸는 기분으로.”

벽에 기댄 스페이드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몽롱하게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

눈 앞에 손을 흔들흔들 흔들어보아도 반응이 없다. 제대로 트랜스 상태에 빠진  같았다.

“스페이드, 네 이름은 뭐지?”


“에......천......유진...입니다.......”

히어로명이 아닌 본명. 빌런이 정체를 특정 당하지 않기 위해 가명을 쓰듯, 히어로들도 혹시 모를 빌런의 해코지를 방지하기 위해 가명을 쓴다.

그나저나 그런 이름이었구나.

“나이는?”

“스물... 하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렸네.

이제부터 할 일을 생각하니 약간 거북했지만, 고개를 휘휘저어 떨쳐냈다.

나이 같은 건 상관없다. 우리는 각각 빌런과 히어로일 뿐이고,  입장에서 발생하는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여야한다. 그런 마음가짐조차 되어있지 않는다면 바보를 넘어서 민폐덩어리일 뿐이다.


“스페이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듣고 받아들여. 의심하지 마. 내 말은 진실이고, 거짓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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