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1 몰락한 빌런이지만 포기는 없다(3)
“참모, 참모 살아있냐.”
“......살아있습니다.”
빌런 조직 어비스의 아지트 의무실. 딱 한 명 있는, 붕대를 온 몸에 둘둘 감은 환자가 침대에 누운 채 대답했다.
어비스의 참모 역을 맡고 있으며,버젓한 빌런명도 있건만 동료들도 히어로들도 ‘참모’라고만 부르는 유능한 사내다.
단정한 남색 머리에 안경, 표정변화가 적은 얼굴. 차가워 보이는 외모에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참모는,실제로 능력도 뛰어나다. 똑똑한머리에서 나오는 여러 책략들로 크나큰 전과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줄어든 부하들과 약해져버린 나를 대신해 무리해서 작전을 수행하다, 얼마 전 클럽이라는 히어로에게 끔찍하게 당해 이렇게 침대 신세를 질 수 밖에 없게되었다.
스페이드에게 당했을 때 나를 구출해낸 것도 참모다. 고마움도 많고,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남자다.
다만 결점이 있다면,
“암컷 냄새?!”
“나야, 나.”
“어, 어째서 13호 님에게서 여자 냄새가....”
그런 게 나나? 옷에 대고 냄새를 맡아봤지만 잘 모르겠다. 일단 세뇌도구를 시험한다고 붙잡아 놓은 히어로와 이런저런 짓들을 하긴 했지만.
“여, 여자를 주세요! 예쁘고 귀엽고 살짝 쿨한 느낌의 새침한 여자, 거기다 가능하면 저를 돼지처럼 내려봐주는 건방진 여왕님 같은 느낌의 여자로! 그러면 당장에라도 이 침상에서 일어나 보이겠습니다!”
“아니, 멍청아. 닥쳐봐 좀.”
이야기를 이어서, 단점이 있다면 이런 점이다.
여자를 지나치게 밝혀서, 그 뛰어난 두뇌의 대부분이 그 쪽 방면으로 돌아간다는 점.
그런 소소한 결점만 빼면 유능해서 좋은 남자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참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마지막 임무에 대한 것이나 세뇌도구들에 대해.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참모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7번대의 히어로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이 말입니까?.”
“그렇지. 그리고 우린 전력이 약하니까. 세뇌약을 이용해 말을 늘려가면서 각개격파, 같은 걸 생각하는데.”
“그것 참 상당히 꼴리는...아니, 이게 아니라. 세뇌약의 효과를 떠나서, 일단 히어로들한테 그런 틈이 있을까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그게 문제라서너를 찾아온 거다, 짜샤.
“뭐라도 좋은 방법을 생각해 봐. 참모잖아.”
“아니, 포 떼고 차 떼고 졸까지 다 뗐는데 무슨 장기를 두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계속 그러시면13호님의 TS 망상으로 한 발 빼버릴 겁니다.”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무시무시한 오한이 들어서 필사적으로 말렸다.
“요컨대 말이 부족하단 거지? 일단 잡아 놓은히어로는 한 명 있는데.”
“진짜입니까?! 여자입니까?! 여자죠?! 여자야! 그렇다고 말해!”
“누워라 멍청아.”
“방금 다 나았습니다!”
그럴 리가 있냐.
진짜 나은 건 아닌 듯 아픔을 호소하는 참모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고통에 눈가를 찌푸린 참모는, 그럼에도 입가는 계속 웃고있다. 미쳤나보다.
“좋은 책략이 있습니다, 13호님.”
“진짜?”
“예. 분명 성공할 겁니다. 잘만 되면 저도 금방전선에 복귀할 수 있을테고요.”
이제는 유일한 부하인 참모가 복귀해 준다면 든든하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부터 말씀드릴 테니, 잘 들어주십시오――”
* * *
“Fuck! 스페이드 씨! 큰일이에요!”
“응? 나? 무슨 일인데?”
“13호입니다! 우리 7번대의 애플을 납치했대요!”
평소대로 소파에 누운 채 지루함을 달래던 스페이드가 벌떡 일어났다.
납치라니, 그 녀석이?
“무슨 일이야? 애플은 휴가 갔다며.”
“방금 전화가 와서... 애플을 납치했다고, 지정된 장소로 스페이드 씨를 보내라고....”
굳이 자신을지명했다고? 아니, 그럴만한 이유가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다시 자신감을 되찾기라도 한 걸까?
“그 자식, 떨어질 대로 떨어졌잖아. 그거정말 13호였어?”
“본인이 그렇게 말했어요. 목소리도 제가 기억에 있는 것과 일치하고요.”
스페이드는 곧바로 풀어두었던 홀스터와 대검을 장착했다. 13호가 맞다면 섬멸할 뿐이다.
“어쩌죠. 마침 남는 대원이 없어서, 저희 둘 다 나갔다간 기지가 비어버려요. 다른 부대에 응원을 요청하는 편이....”
“나 혼자면 돼. 클럽은 남아있어. 응원도 필요없고.”
“하지만 함정일지도 모른다고요?!”
“괜찮아, 괜찮아.”
스페이드는 태평하게 연하인 후배의 머리를 통통 두드려주었다.
“A급 히어로인 내가 그런 놈한테 당하겠어?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별 다른 힘도 없는 녀석인걸.”
“뭔가 있으니까 지명해서 부른 거 아니겠어요...?”
“그렇겠다 싶으면 애플만 잽싸게 구출해서 도망쳐 나올게.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클럽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그렇게 대답했다. 선배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한다면 후배인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야.”
“예?”
“그 녀석을 다른 녀석한테 뺏기는 것도 싫거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내 손으로 붙잡을 거니까.”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의욕을 불태우는 그녀를 보자니, 어쩐지 단순한 히어로와 빌런 사이는아닌 듯한 미묘한 공기를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클럽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약 15분 후, 스페이드는 지정한 창고 앞에 도착했다. 차 같은 교통수단은 이용하지 않았다. ‘신체강화’가 특기인 그녀라면 그냥 달리는 편이 더 빠르다.
‘......으스스한 분위기네.’
딱히 유령 같은 걸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늦은시간인 만큼 시야가 어둡다는 건 좋지 못하다.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하면 어느 정도는 보이지만, 역시 밝을 때에 비해 불리한 건 어쩔 수 없다.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창고 안에는 컨테이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피어오르는 먼지를 손으로 털어내고, 스페이드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13호! 어디냐! 말한대로 왔다고?”
대답은 없다. 스페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가 불러놓고 늦게 오는 거야 뭐야?
“읍――! 읍읍읍읍!”
“애플?! 애플이야?! 안쪽이구나!”
테이프 같은 걸로 입이 막혀있는 걸까? 창고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당장에라도 달려나가려 했지만, 타이밍 좋게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발신번호 제한]이라는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대자, 이런 짓을 하는 빌런에 어울리는 저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왔다, 스페이드. 방금 들은 대로 인질은 무사해.]
“13호 이 새끼... 떨어질 대로 떨어졌구나. 항상 치졸한 범죄는 저질러도 민간인한테 직접 손을 대는 일은 없었는데.”
[이쪽도 사정이 좀 변했거든. 상사가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해서 말이야. 근데 이 일에 내가 백수가 되느냐 아니냐가 걸려있거든. 물불 가릴 수가 없어.]
“평소 하는 짓이 백수 이하잖아.”
[어허, 월급도 나오고 엄연한 일이거든. 아무리 유치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될때도 있고. ......다시생각하니 일하기 싫다... 나는뭘 하고 있는 거지... 왜 맨날 욕이나 먹으면서 이런 걸하고 있을까... 그냥 다 포기하고백수나 될까....]
뭔가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심함이 배가 되는느낌이다. 빌런도 평범한 직장인 같은 고충이 있나보다.
“네가 백수가 되든 말든 신경 안 쓰니까, 어서 그 애나 놔줘. 싸울 능력도 없는 여성을 납치하다니, 네가 사람이야? 손끝 하나라도 댔단 봐, 히어로고 뭐고 손가락 끝부터 잘게 다져줄테니까.”
[지금 가슴 만지고 있는데.]
“......죽여버리겠어.”
다리에 마력을 담고, 힘차게 눈앞의 통로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불규칙적이게 늘어선 컨테이너가 미로처럼 자꾸 방향 감각을 흐뜨려놓았다.
“귀찮게.”
무릎을 튕겨, 컨테이너의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이렇게 하면 길을 헤맬 염려도 없이,일직선으로 도달할 수 있다.
“읍――!”
“애플! 거기구나!”
생각 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컨테이너 사이를 두세 번 도약하고 나니, 금방 애플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애플은 창고의 거의 최중심부에 의자에 구속되어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치졸한 빌런 13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읍, 읍읍...!”
뭔가 말하려는 듯 발버둥치는 애플에게, 스페이드가 서둘러 다가갔다. 한편으론 주변을 경계한다.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13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뭔가 함정이 있다는 뜻이다.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니,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애플은 쓸데없이 튼튼해보이는 의자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꽁꽁 묶여있었다. 뒤로 돌린 팔은 물론이요 굵은 밧줄로 등받이에 배와 가슴을 둘러서 묶어놓고, 의자다리에 발목을 각각 묶어놨다.
척 봐도 푸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은 구속방법에 스페이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단 눈앞의 서무계 히어로의 입을 틀어막은 테이프를 떼주었다.
“괜찮아? 무서웠지? 내가 왔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스페이드 씨! 도망쳐요!”
애플은 입이 자유롭게 되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 그게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저 멀리서 구구궁-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고의 유일한 출입구인 녹슨 철문이 닫힌 소리라는 걸 깨닫기 까지 조금 걸렸다.
그리고,
파캉, 파캉, 파캉-!
근처에 있던 작은 상자 크기의 컨테이너들이 열리며, 뿌연 연기가 뿜어져나왔다. 소리가 꽤 멀리서도 들린 것으로 봐서, 아마 이곳만이 아닌 창고 전체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가스?!’
이게함정의 정체였나! 이 넓은 창고의 최중심부까지 오게 만든 것도 출구에서 멀어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저는 버리고 도망치세요! 스페이드 씨의 각력이면 숨을 참는 동안에 출구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시끄러워, 애플! 알아서 할게!”
아무튼 스페이드는 정의를 사랑하는 여자다. 동료를 버리고 간다니, 스페이드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단순한 최루탄이나 기절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몰라도, 인체에 유해한 독가스 같은 거라면....
하지만 애플을 데리고 탈출하려 해도, 구속이 너무 꼼꼼하게 돼 있다. 의자째로 들어 올리려도 해봤지만 의자 다리가 바닥에 용접되어있었다. 총을 꺼내 쏴봤지만, 살상능력을 낮춘 고무탄으로는 흠집 정도밖에 낼 수 없었다.
‘어쩌지, 어쩌지어쩌지어쩌지어쩌지?!’
가스는 시시각각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대로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