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1 몰락한 빌런이지만 포기는 없다(2)
“진짜?!”
“다른 집단으로 이적하는 건 은근 귀찮단 말이야. 보스도 마음에 들고. 여기만큼 자유로운 데도 없고. 보스의 바람이라면 어쨌든 들어주려고 했었어.”
“오, 오오....”
“그럼, 가볼까나. 임무를 위해 자존심도 윤리도 인간의 도덕도 내버리겠다는 악당에게 어울리는, 비장의 발명품이 있으니.”
두어번 내 얼굴을 더 꾸욱꾸욱 밟은 도로시는 굽이 낮은 구두를 다시 신고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랩 안쪽으로 들어가니, 나타난 것은 갖가지 도구들이 진열된 거대한 창고 같은 방.
그리고 그 안쪽에는.......
“읍! 읍읍읍!”
의자에 밧줄로 묶인 채, 입을 테이프로 막아 놓은 여성이 있었다. 남색 제복에 스커트. 어딘가 본 적 있는 복장이다.
아니, 저거 히어로 제복이잖아. 거기다 저 마크는 7번대다.
“어, 어, 어.....? 뭐야? 납치?”
“7번대의 서무 담당 대원. 히어로명은 애플. 전투능력은 전무(全無)해서 편리하지. 그리고 내 실험체야.”
사악하게 웃는 도로시는 납치한 히어로의 입에서 테이프를 뜯어냈다.
콜록콜록 수차례 기침을 한 히어로는 우리를 반항적인 눈으로 노려봤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제가 히어로 협회 소속이라는 걸 알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가요?! 곧 히어로협회의 추적대가 올 겁니다! 어서 풀어주시고 순순히 투항하세요! 그러면 조금이나마 참작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 위세가 좋은데. 이봐요, 애플 씨. 추적대 같은 건 안 와요.”
“헛소리를. 제가 납치되고 이미 며칠이나 지났어요. 본대도 금방 제 위치를 추적해서....”
“그치만 당신, 자기 발로 왔는걸.”
히어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는 듯.
나도 무슨 뜻인지 몰라서 대답을 구하는 눈으로 도로시를 쳐다봤지만, 이 자기중심적인 과학자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선반에서 약품병과 손수건을 꺼냈다.
“당신, 자기 의지로 휴가를 써서 여기로 온 거야. 그것도 제 발로 걸어서. 오는 도중에 추적받을 만한 휴대폰이나 GPS 기능이 달린 물건들은 죄다 제 손으로 버렸지.”
“무, 슨.......”
“자, 그럼. 언제나 하던 걸 할게요.”
“읍...!”
가차 없이 약품을 적신 수건으로 히어로의 코와 입을 틀어막는 도로시. 히어로 여성은 저항하듯 몸을 이리저리 뒤틀더니, 금세 잦아들었다.
손수건을 떼자, 온 몸에 힘이 쭉 빠진 듯한 히어로는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트랜스 상태야. 학술적인 표현으론 자신의 내면 상태에 완전히 초점을 맞춘 상태라던가, 표현법은 다양하지만 대충 느낌은 알지?”
“알 것 같긴 한데... 근데 뭘 한 거야? 뭘 하려고?”
“뭘 하긴. 뻔하잖아. 치졸한 악의 조직 다운 일을 해보자고.”
악의 조직답다니, 그게 뭘까?
“세뇌야.”
도로시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애플의 턱을 붙잡아 강제로 시선을 들게 만들었다.
“이봐, 네 이름은 뭐지?”
“.............애플...신...유라....”
“네가 소속된 곳은?”
“......7번...대......서무과.......”
초점 없는 눈으로 순순히 대답하는 히어로, 아니, 애플. 그녀는 조금 전과는 달리 순순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이거... 세뇌된 거야?”
“뭐, 비슷한 거야. 그것보다 좀 도와줘. 이 밧줄 좀 풀어줄래?”
순순히 그 말에 따라 밧줄을 풀었다. 애플이라는 히어로는 자신을 구속한 밧줄이 풀렸는데도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도망칠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애플, 옷을 벗어볼래?”
“.............네에.......”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남색 상의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상의의 앞을 벌리자 브라에 감싸인 적당한 크기의 융기가 드러났다.
상의가 바닥에 떨어지고, 스커트도 후크를 풀자 바로 떨어져내렸다.
꿀꺽, 침을 삼켰다. 과시하듯 단계를 밟으며 천천히 벗어나가는 그 일련의 과정에 저도 모르게 요염함을 느껴버렸다. 아랫도리가 살짝 부풀어오른게 느껴졌다.
그녀는 옅은 분홍색의 속옷과 스타킹만을 입은 채 서있었다. 알몸이 되라고는 하지 않아서인지, 속옷은 벗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어디, 그럼 다음은 뭘 해볼까....”
그 뒤, 도로시는 애플을 거의 장난감처럼 다뤘다.
속옷 차림 그대로 납작 엎드려 고양이 자세를 시키게 하거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핥게 하거나, 내 목덜미를 핥게 하거나 이런저런 민망한 짓을 시키는 등, 이 녀석의 꼬일대로 꼬인 성격이 다분히 드러나는 듯한 요구들이었다.
“이 정도면 될까? 자, 그럼 공주님은 잠들 시간입니다~.”
귓가에 대고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리나 싶더니, 애플은 그대로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게, 세뇌.
“뭘 멀뚱히 보고 있어? 빨리 옷 입혀서 도로 앉히고 묶어.”
“어, 응.”
도로시의 말대로 애플을 다시 의자에 앉히고 밧줄로 묶었다. 깨어났을 때는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까?
그 사이에 도로시는 선반에서 갖가지 도구들을 꺼내 탁자에 늘어놓았다. 생긴 것도 용도도 전혀 다르게 생겼다. 전부 다 세뇌도구라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것. 음성에 최면 음파를 싣는 변조기야. 7번대에 문의전화는 대부분 서무담당인 이 녀석이 받거든. 일반 시민인 척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어서 세뇌한 거야.”
“그리고 제 발로 걸어오게 만들었다고? 최고잖아.”
“단순한 기계적인 음파로 최면을 거는 건 이 천재인 나라도 힘들어. 시간과 품이 꽤 많이 들지. 방금 한 것처럼 경구 흡입이 가장 효과가 좋지만 그 전투민족 같은 전투계 히어로들 상대로는 어려워. 그러니 잘 생각해보고 적절히 사용해 봐.”
“트랜스 상태가 해제되면 세뇌된 내용은 다 잊는 거야?”
“어떻게 세뇌하냐에 따라 달라. 기본적으로 정신의 핵에 닿는 거니까, 의외로 손쉽게 사람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라며 도로시는 말을 이었다.
“곧바로 심도 있는 최면을 걸 수는 없어. 애초에 트랜스 상태가 길었던 것도, 이런저런 명령에 순순히 따른 것도 실험하면서 여러 번 세뇌를 반복해서 그래. 최면 심도를 깊게 만들 필요가 있는 거지.”
“깊게라니, 어떻게?”
“일단 이것저것 실험해 봤는데, 첫 번째는 트랜스와 넌(non)트랜스를 반복하며 점점 깊이 있는 명령으로 유도하는 반복 최면, 그리고――”
도로시는 잠들어 있는 애플의 귓가에 훅, 바람을 불어넣었다.
잠든 상태이면서도, 애플은 으음, 하고 요염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가장 효율적인 건, 성감이야. 성감을 이용한 최면 심도 개발. ......알려줄 만한 건 이 정도니까, 한 번 잘 해보라구. 도구는 마음껏 써도 돼. 사용법을 모르겠으면 물어보고.”
그게 끝이라는 듯 도로시――어비스의 천재 과학자는 성큼성큼 방 밖으로 향했다.
뒤에 남은 탁자 위에 놓인 도구를 이것저것 집어들고, 확인한다.
“도로시, 잘 쓸게. 고마워.”
“뭐, 죽지만 마라. 재미 없으니까.”
도로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쿨하게 손을 흔들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세뇌라.
“앞날이 멀구만.......”
그래도 한 줄기 광명이 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나는 실험실에 남아 세뇌도구들을 살펴보았다.
총처럼 생긴 도구, 안경, 후레쉬, 다리미...인가? 이건? 어디다 쓰는 거지?
“제일 효과가 좋은 건 이쪽 세뇌약이고, 그 외에는....”
이 도구들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히어로들은 대부분 신체능력이 뛰어나다. 나는 얼굴이 알려져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고보니 인식장해의 발명품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어쩔까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대충 하나를 손에 들었다.
옆에는 여전히 묶여있는 히어로가 한 명. 일단 뭐가 됐든 실험이다.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체감해둬야겠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는 잠들어 있는 히어로에게 다가갔다.
* * *
“다녀왔~어. 애플은?”
“오셨나요, 스페이드 씨. 애플 씨는 내일까지 휴가예요.”
히어로협회 7번대의 아지트. 지금 막 임무에서 복귀한 스페이드가 터덜터덜 들어오자, 자그마한 체구의 대원이 소파에 파묻힌 채 맞아주었다. 7번대의 B급 전투원 클럽이었다.
불법 약물을 유통하려던 빌런 조직을 궤멸시키고 온 자신과 온도차이가 너무 심하다며, 스페이드는 툴툴거리며 방 안쪽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어, 없어~~~! 레몬 주스!”
“어제도 그 얘기 하셨거든요. 그럴 거면 직접 사오시라고요.”
“우응~ 귀찮은 걸... 부탁하면 애플이 매번 사와줬는데....”
“부려먹지 좀 마세요. 부조리한 갑질이니까.”
“갑질 아니야! 애초에 다른 비품 살 때 같이 사 와달라고 부탁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7번대의 분위기는 꽤나 양호하다. 부서들마다 분위기들이 판이하다고도 하고, 1번대나 4번대 같은 경우는 ‘절대 가고 싶지 않은 부서’라며 기피대상이 되는 곳도 있다.
7번대는 다들 배려해주는 사람들이고, 대원들은 불의를 싫어하고, 무엇보다 듬직한 대장이 있다. 클럽은 이런 분위기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치만 바빠! 바쁘다고! 주스 사러 갈 틈도 없이 바빠! 임무 끝나고 돌아오고나면 다시 나가고 싶지도 않고....”
“스페이드 씨의 능력은 범용성이 뛰어나니까요. 능력이 너무 뛰어난 것도 힘들겠네요. 그래도 이번에 꽤 큰 녀석들이 잡혔다면서요. 한가해지겠어요.”
오늘 검거된 건 대규모 빌런 조직 【카니발】이었다. 온갖 악랄한 악행을 저지르던 요주의 빌런 조직이었는데, 이번에 핵심 인원들이 대부분 검거되었으니 더 이상 제대로 된 활동은 못할 것이다.
이제 드디어 한가해지겠네.
스페이드는 레몬 주스 대신 감귤 주스를 꺼내들고, 클럽의 맞은편 소파에 파고들었다.
“학교 과제도 해야하는데....”
“학교 일까지 하면서 하려니 힘들겠네요. 2학년이셨나요?”
스페이드의 본업은 학생이다. S시에 있는 유명한 대학교의 학생으로, 히어로 활동은 시급 좋은 아르바이트에 가깝다.
반면 클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속 히어로로 일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요즘 스페이드 씨, 심심해 보이네요.”
“내가? 바빠서 죽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요, 그 13호인가 하는 빌런이 안 나타난 뒤로 뭔가 아쉬워보여서.”
“그 녀석....”
감귤 주스를 쭈릅 들이키며, 스페이드는 생각에 잠겼다.
약 두 달 전, 빌런 13호가 소속된 빌런 조직 【어비스】에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혀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항상 지리멸렬한 조잡한 범죄를 저지르는 주제에 무력만은 최강이던 빌런 조직. 그러나 그 핵심인 13호를 스페이드가 제압한 덕분에, 단숨에 조직 전체를 검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잡히지 않았던 13호가 잔당들을 데리고 몇 번인가 게릴라 빌런 짓을 저지르려 했지만, 그것도 어렵지 않게 손쉽게 방지할 수 있었다.
13호는, 확실하게 약해졌다.
“그 녀석, 그 상태에서도 도망치는 것 하나는 잘한단 말이야.”
“Fuck. 저도 그 참모 녀석을 놓친 게 아쉽네요. 그래도 그렇게나 뼈를 부숴놨으니 조금은 만족스럽지만요.”
얼마 안 되는 어비스의 잔당 중에 참모 역할의 빌런도 있었다. 클럽의 앙숙으로, 얼마 전 작전에서 검거는 못했지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줬다고 들었다.
상쾌하다는 듯이 후후후 웃고 있는 자그마한 동료를, 스페이드는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쩐지 13호를 생각하면 불편한 마음이 들 뿐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쫓아다녔건만, 어쩌다 날린 펀치가 영문도 모르게 정통으로 먹혀들고 끝. 그 뒤로 얼굴을 보이기만 하면 냅다 도망쳐서, 제대로 된 결판을 못 냈다.
내가 그 녀석한테 당한게 얼만데.
A급 히어로가 되고 부터 스페이드의 목표는 13호였다. 그러나 최강이었던 13호를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분한 마음에 몇 번이고 도전했지만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패배의 쓴 잔을 들이킨 게 몇 번인가.
그런데 이런 엉성한 결판으로 끝난다니, 알 수 없는 욕구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손으로 체포하고 싶다.
“안 나타주려나, 13호....”
“Fuck. 스페이드 씨, 그거 되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데요.”
“다른 의미는 없거든. 어서 체포하고 싶을 뿐이야. ......그보다 너, 그 말버릇은 고치는 게 낫지 않겠어?”
“Fuck은 제 아이덴티티에요.”
“여자애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야....”
스페이드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