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1 몰락한 빌런이지만 포기는 없다(1)
현재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커다란 조직이 존재한다.
하나는 히어로 협회. 적지 않은 각성자들이 소속된 이 조직은, 주로 특수능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일반 경찰들이 대응할 수 없는 빌런들을 상대한다. 이른바 특수한 경찰 같은 기관이다.
그리고 빌런 연합. 히어로 협회가 생겨난 원인이기도 한 이들은 갖가지 빌런 조직들을 통합하여 이루어졌으며, 각성자들을 중심으로 세상에 해를 끼치는 무리들이다.
이들의 목적은 불분명하다.
언젠가 누군가 말하길, ‘그들의 목적은 국가전복이다’라는 말이 언론을 통해 전파된 적이 있다. 일부 시민들은 그 말을 굳세게 믿고 있다.
아무튼 실제 활동 목적은 불명, 다만 갖가지 활동들은 충분히 사회에 물의를 빚어내며 어마어마한 민폐 덩어리인 그들이지만.
의외로 그 빌런들의 일상은 생각 이상으로 평화로울지도 모른다.
“커피.”
“예엡!”
커다란 사무실.
공간에 비해 사람이 적어 휑한 사무실에서, 나는 다급하게 일어나 커피를 준비했다.
과거 13호라고 하면 빌런의 카리스마라고도 불렸지만, 지금은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상사의 비위나 맞추고 있다. 그런 현실에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나는 포트를 기울였다.
“여, 여기... 에티오피아 에스프레소입니다.”
“향이 다 죽었는데.”
“다시 내리겠습니다!”
잔 속의 내용물을 창 밖에 부어버리고, 새로운 커피를 준비한다.
커다란 사무용 책상 앞에 앉은 젊은 여성은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듯 노려봤다.
“13호.”
“예입!”
“근 두 달간 실적 제로, 실화야?”
“......예입.”
“짜증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겠어?”
“예, 예에. 그렇습니다만.”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다도 연하인 그녀는 빌런 연합에 소속된 빌런 조직 중 하나, 【어비스】의 수장.
즉, 보스다.
수장이라고는 해도, 지금 어비스에 소속된 사람은 그녀를 포함해 넷 밖에 안 되지만.
빌런명 바이올렛.
그 이름대로 흘러 떨어지는 바이올렛색 머리. 아름다운 얼굴 생김새에 타이트한 미니스커트, 검은 스타킹, 적당하게 부푼 가슴이나 여성스런 나긋나긋한 몸은 시각적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이지만, 상사로서 늘 가혹하게 떠미는 일거리나 신랄한 비판에 나는 늘 몸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졌다.
“우리 조직도 얼마 전까진 잘 나갔는데... 그러네. 분명 그 때 부터였지. 네가 한심하게 나가떨어지고, 그 자리에 있던 부하들은 전부 잡히고, 잡힌 녀석들이 아지트를 토해내는 바람에 히어로들이 급습하고... 전부, 그 날이 문제였지.”
“아니! 그건 어쩔 수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뚝뚝 끊어서 말하는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억울하다. 너무 억울하다.
갑자기 별자리님께서 노망이 들었는지 머리가 돌아버렸는지 마력공급을 중단하고, 덕분에 평범한 사람 레벨로 떨어져버리고.
단 한 번의 실패로 이 꼴이 났다.
나는 함께 있었던 참모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아지트에 있던 부하들과 동료들은 이어진 히어로들의 일제 강습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버렸다. 한차례 갱생시설을 거친 그들은 조직으로 돌아오려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듣자 하니 144시간에 달하는 EBS 도덕 강의 같은 걸 들었다는 것 같은데. 끔찍하다.
그 날의 전언대로, 별자리는 더이상 내게 마력을 공급 해주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얼마 남지 않은 부하들을 데리고 수차례 빌런 짓을 시도해봤으나, 잽싸게 찾아온 히어로들에게 된통 깨지기만 하는 나날이다.
거듭된 실패에 부하들도 하나둘 떠나가 이제는 조직에 넷밖에 남지 않았다. 비참하다.
“능력도 잃고, 부하들도 잃고, 실적도 못 내고, 거기다 커피도 못 끓여. 저기 있잖아, 13호 너 사는 의미가 있어? 있을까? 있는 거야? 있겠지? 있는...걸까?”
“너무하잖아!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지금 말대답한 거야? 보스인 나한테?”
“그럼 어쩌라고! 나도 이런 대우 못 참아! 내가 이 조직을 위해서 얼마나――”
“월급, 깎아도 돼?”
“저도 보스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보스는 신! 저 같은 한심한 인간은 살아있을 자격 따위 없죠. 그렇고 말고요! 당장 오늘밤에라도 수면제 먹고 죽어버릴까요?”
세상은 더럽지만 돈에는 죄가 없다.
그리고 상사의 명령에는 절대복종 하는 것이 슬픈 사회의 현실이다. 결국 빌런도 직장이다. 상사한테 밉보이면 답이 없다. 심지어 돈줄을 쥐고 있는 상사라면 더욱 더.
하지만. 그래도. 너무한다고는 생각한다.
나름 한 때 이 어비스라는 조직의 이름을 만중들에게 퍼뜨렸었던 난데, 능력이 사라지자마자 이런 꼴을 당할 수 밖에 없다니.
“13호.”
“......예.”
“삐졌어?”
“아니요. 그럴 리가. 낼 모레면 서른인데 이 나이 먹고 삐질라고요.”
“13호.”
“왜요, 또.”
“삐졌구만 뭘.”
바이올렛은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세워서 탁탁 두드려 정리하고는, 옆으로 치웠다.
“있잖아. 13호에게 마지막 임무를 줄게.”
“......실패하면, 잘리는 건가요?”
“비슷해. 조직을 해체해야지.”
“?!”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우아하게 웃을 뿐이다.
“연합쪽에서 말이 나왔어. 뭐라도 주목할 만한 실적을 올리래. 실패하면 그 쪽에서 제적당할 거야. 연합의 비호를 벗어나면 더이상 버티기도 어렵겠지. 그러니 그냥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나도 포기를 하려고.”
“진심입니까, 보스.”
“진심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13호가 걱정이네. 당신은 눈에 너무 많이 띄었으니까, 별 다른 능력이 없는 부하들처럼 미적지근하게 끝나진 않을테고.”
현재 어비스는 인원조차 거의 남지 않았지만 자금만은 있다. 월급도 꼬박꼬박 받고 있고 성과상여금도 있고, 무엇보다 히어로협회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주지를 제공해 준 덕분에 나름 안전한 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어비스가 사라진다면?
......아, 맙소사.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렇게 되면, 마지막 자비로 박스 정도는 베풀어줄게... 아마 입구 옆의 창고에 많이 넣어놨을 텐데.”
“멋대로 제가 노숙할 거라고 단정 짓지 말아주실래요?!”
“그치만 너, 언론에 얼굴이라던가 신분이라던가 다 드러났잖아. 집을 구할 수 있을까? 취직이 가능할 것 같아?”
“너무 현실적이라 싫어...... 무서워....”
“뭐, 그게 싫다면 마지막 임무. 최선을 다해. 임무에 실패하면 죽겠단 각오로.”
그래서, 그 임무란 게 뭔데.
체념하는 눈으로 바이올렛색 머리의 수장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활동 범위는 S시 동부야. 그쪽 지역은 히어로 협회 7번대가 관할하고 있지. 덕분에 사사건건, 무슨 일을 하든 방해받고 있어.”
7번대.
이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던 절망의 날, 나를 쓰러트린 히어로 스페이드가 속해 있는 히어로 지부.
그 뒤로도 끈덕지게 우리를 방해하고, 체포하고, 온갖 굴욕과 절망을 안겨줬던 히어로들.
일반적으로 여성들만이 각성자가 되다보니, 7번대도 여성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전투능력은 무시무시하다.
바이올렛은 무겁게 선언했다.
“7번대를 함락시켜. 무슨 수단을 써도 좋아. 목숨 따위 돌보지 않아도 좋아. 독을 써도 좋고, 가족을 인질로 잡아도 좋아. 철저하게 굴복시켜. 7번대를 없애버려.”
“보스, 그건――”
“번복하지 않을 거야. 나는 진심이야. 어떤 저열한 짓을 써도 좋고, 윤리와 도덕 따위 폐기처리해버려도 좋아.”
바이올렛에 눈에, 어두운 불꽃이 깃들었다.
“나는, 히어로가, 싫어. ......나머진 어떻게든 맡길게, 13호.”
* * *
“하아.......”
“뭐야, 시끄러. 왜 들어오고 지랄이야. 나가. 꺼져.”
상사로부터 분에 넘친 임무를 부여받은 내가 향한 곳은, 아지트의 기술부였다.
기계식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신랄한 욕설이 들려왔다.
정돈하지 않고 대충 묶은 흑발, 다크서클, 흰색 가운을 걸쳐 입은 소녀가 있었다.
소녀, 라고 할까 나이는 죽어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동안인 점을 감안해도 가까스로 스물 쯤 될 것 같다.
분명 내가 연상이고 상사겠지만, 그런 건 신경 안 쓴다는 듯 반말을 한다.
이름은 도로시. 이름이 이렇지만 토종 한국인이다. 성이 도, 이름이 로시. 부모님의 네이밍센스를 의심하게 되는 이름이다.
빌런명은 귀찮다고 만들지 않았다. 과학자이자 기술자, 의사인 그녀는 딱히 밖에 노출될 일이 없으므로 문제는 없겠지만. 히어로의 아지트 습격 때도 납치당한 여자애라는 연기로 어떻게 잘 빠져나왔다던가, 얼굴이 노출되지 않아서 가능했던 거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유능하다.
각성자인 그녀는 몇 가지 신비를 다루는 것 뿐만 아니라 각종 현대의 과학 기술을 뛰어넘는 발명품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각성자가 적은 우리 조직의 평균적인 수준을 높여 준 유공자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일반인 수준으로 떨어져버린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녀석이기도 하고.
나는 일단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흐음, 이게 마지막이고, 실패하면 조직이 해체될 거라고....”
“그래. 도로시 너도 그런 건 바라지 않을 거 아냐? 그러니까 뭔가 도움이 될만한 발명품 없을까? 세균병기라던가 로켓포라던가....”
“너도 참 궁지에 몰리니까 막 나가는 구나.”
“다른 방법이 없다고! 종이박스로 만든 집에 사는 건 싫어!”
무슨 소리냐며 도로시가 고개를 기울였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도로시는 뭔가 생각하나 싶더니, 금방 결론을 냈는지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그래서 13호. 장례는 어떤 식이 좋아? 그 정도 리퀘스트는 들어줄 수 있어.”
“벌써 실패한단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그보다 내가 실패하면 너도 좋을 게 없잖아!”
“나야 나쁠 것도 없거든. 유능하니까. 어딜 가든 쾌적한 생활 정도는 보장 받을 수 있어. 너 같은 사회 밑바닥의 쓰레기랑 같은 급으로 보지 말아줄래?”
재수없어.
하지만 이쪽은 도움을 바라는 입장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도 하고. 인간을 뛰어넘은 천재성을 가진 그녀를 받아 줄 곳은 많다.
아아, 부럽다. 이래서 재능 있는 녀석들이란. 나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그래도.
나는 걸터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도로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하는 거야?”
“최소한의 성의. 네가 말한 대로 지금 나는 밑바닥의 쓰레기랑 다를 바 없으니까. 그나마 실낱같이 남은 거라도 다 써버려야지.”
그대로 이마를 바닥에 비비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제발, 도와줘. 나는 그렇다 쳐도, 이대로면 보스는... 보스를 저대로 보낼 수는 없어.”
보스는 당찬 여성이지만, 완벽한 것도, 강철의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녀의 바람을 여기서 끝내고 싶지도 않다.
“부탁해. 내가 의지할 건 너밖에 없어. 이 몸뚱아리랑 목숨을 칩으로, 마지막 도박만이라도 걸어볼 수 있게 해줘.”
“......힘도 능력도 잃고 일반인 수준의 그 값싼 몸뚱아리로, 초인들의 모임인 히어로 지부에 싸움을 건다고? 등신 짓도 정도껏 해야지.”
“그래도!”
“뭐, 그렇다면 알았어.”
뭔가 더 필사적으로 빌어야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위에서 들려온 것은 의외로 순순히 승낙하는 목소리였다.
“진짜?!”
고개를 들자, 눈 앞에 뭔가가 다가왔다.
툭, 하고 얼굴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이건.......
“우붑?! 발을?! 무슨 짓이야?!”
“어허, 정지. 받아들이지 못할까. 부탁하는 태도야, 그게?”
스타킹에 감싸인 그녀의 발이 내 얼굴을 밟고 있었다. 그 너머로 스타킹에 감싸인 팬티가 보이고 있는데, 눈치채지 못한 걸까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이 년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
“무릎 꿇은 모습을 보니까 어쩐지 괴롭히고 싶어져서. 귀엽잖아. 멍멍이 같아서.”
“내가 연상일 텐데....”
“뭐, 난 애초부터 도와줄 마음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