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40 - 340화-속았다는 걸 알게 된 복수귀의 선택은?
"저희는 처음부터 주인님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르웬을 향해 미네는 지금까지 숨겨온 내막을 전부 말했다.
"당신을 강화해라. 최소한 스승님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까지 높여라. 어떤 부작용이 생기든 수단과 방도를 가리지 마라. 그게 저희한테 내려진 명령이었습니다." "확실히 위협적이긴 했지."
아르웬에게 당한 상처가 다시 쑤셔오는지 테리스는 표정을 찡그리며 붕대를 감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조금 진지하게 가지 않았다면 내가 당했을 거야. 실제로 당했지만." "…."
아르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듣고 있지만, 두 눈은 절망감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미네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주인님의 명령대로 저는 제가 가진 모든 전투 경험을 당신에게 전수했습니다." "…." “그 대가로 더는 용병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젠 검을 쥐는 방법도 떠오르지 못해요.” “….” “그래도 저는 상관없답니다.”
강림의 왼쪽 팔에 엉겨 붙으며 미네는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텅 빈 머릿속을 주인님의 사랑으로 채우면 그만이니까요." "…." "그리해주실 거죠, 주인님?"
마치 먹이를 달라고 애원하는 강아지 같은 눈길로 미네는 강림을 올려다봤고,
"당연하지."
강림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위해 희생했으니 당연히 보답해줘야지. 텅 빈 네 머릿속을 꽉꽉 채워줄게." "감사합니다!"
미네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런 미네의 머리를 강림은 기특하다는 듯이 쓰다듬어주었다.
"자, 미네는 끝났으니 두 사람도 나서야지."
강림은 네리와 리미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한 명이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니까.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충격을 주기 위해서. 믿었던 자들이 실은 자신과 한통속이라는 걸 보여주고, 처음부터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놀아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적어도 원수인 자신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아군이었다고 믿었던 자들이 설명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거라고 강림은 판단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다, 당신들 결, 결국…역시 믿는 게 아, 아니었는데….”
같은 편이라고 여겼던 자들이 실은 악마의 편이었다는 사실에 정신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미네 대장이 말한 대로 저희는 당신을 속였습니다."
두 번째 타자는 도적 네리였다.
"주인님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까요." "…그 대가로 모유를 먹인 건가요?"
입 다물고 있던 아르웬이 드디어 질문을 던졌고,
"응."
네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몸뚱이가 되었는데도 저 악마 새끼에게 빌붙겠다는 건가요? 다신 도적이 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는데도요?" "그래요."
아르웬의 두 번째 물음에도 네리는 눈 하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 주인님이 내려주신 축복이니까요."
자신의 가슴을 거칠게 주무르며 네리는 매우 기쁜 듯이 말했다. 주무를 때마다 함몰 유두에서 모유가 콸콸 쏟아졌고, 쏟아진 모유로 인해 군복 상의가 금세 축축해졌다. 옷에서 새하얀 물이 뚝뚝 흘러내려도 네리는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어서 주인이 이걸 봐주기를 바라는 듯이 계속 가슴을 주물렀다.
"이렇게 큰 가슴을 하사해주셨고, 이렇게 우유를 왕창 짜낼 수 있게 되었어요. 더는 의뢰를 구하지 못해 쫄쫄 굶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고요!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제가 왜 싫어해야 하죠?"
너무 세게 주무르는 탓에 상의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속살이 보였으나, 네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손에 쥐가 나도 계속 가슴을 주물렀다.
"더는 도적이 될 수 없어도 괜찮아요. 도적이 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주인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셨으니까." "…." "그런 분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요? 생명의 은인인데?" "…아니야."
아르웬은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몰라. 모르지만, 당신이 저 악마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어."
지금까지 그리드에게 은혜를 입고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없었다.
전원 그리드에게 소중한 것을 잃었다. 그리드에 대한 분노로 넘쳐났으며, 그리드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전원 그리드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지만, 예외 없이 패퇴 당했고,
영혼이 가루가 될 때까지 능욕에, 능욕을 당하다 끝내 타락하고 말았다. 악마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에 빠져버렸고, 그 저주로 인해 악마를 신봉하는 광신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미네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그리드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 그 그리드에게 저항했지만, 실패했으며, 끊임없는 조교를 받고, 개조를 받은 끝에 광신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악마에게 놀아났다.
그걸 알기에 아르웬은 이들을 원망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힘을 줬다는 것도 있지만, 눈앞에서 이들이 타락하는 모습을 봤으니 배신당했다는 충격보다는 동정심이 먼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용당해?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정신마저 마기에 오염된 네리에겐 불쾌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저희는 이용당한 게 아닙니다. 원해서 이 모습이 된 거라고요. 안 그래, 리미?" "네, 맞습니다."
친우의 말에 여사제 리미는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이용당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주신을 모시게 된 것에 불과하답니다." "진정한…주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저 악마를 주신으로 여기는 거야? 설마, 라는 단어가 아르웬의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분이 우리의 진정한 주신입니다."
리미는 강림의 오른팔을 끌어안으며 그리 선언했다. 그 선언으로 아르웬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 ‘설마’는 사라졌다.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얼굴로 리미를 쳐다보았다.
"저도 믿기지 않았어요. 근데, 믿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저보다, 아니 성국에 사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분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런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신뿐이고요." "신성력을? 저놈이?"
그리드가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아르웬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나도 믿어지지 않아."
사실 강림도 자신이 쓰는 마기가 실은 신성력과 똑같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보통 신성력이나 마기는 무조건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니까.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말하자면 물과 기름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만약 억지로 두 힘을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폭주해서 사망하게 될 거다.
그게 정상일 텐데, 마기와 신성력이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거라고? 아예 같다고? 사이트 수녀와 다른 사제들, 그리고 12군단 티아스도 이 사실에 경악한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주신은 대체 누구일까? 누구이길래 마기와 신성력이 같다는 결론이 나온 걸까? 혹시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원작 게임인 <여우의 은총>에서 이와 관련된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아니었다. 주신과 그리드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원작 게임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강림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추측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신이라 불려도 상관없겠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그걸로 세계 정복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자신의 생사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나중에 밝히면 그만이다. 그리고 정복 활동에 도움이 된다면 강림은 기꺼이 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작정이었다.
“….”
정작 이 소리를 들은 아르웬은 경악한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자, 아르웬. 여기서 기회를 줄게."
세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자, 강림은 아르웬에게 제안했다.
"항복해라." "…." "항복하고, 내 밑에 들어와라. 언니와 함께 나를 위해 일해라." "…." "만약 여기서 백기를 든다면 여기서 멈출 수도 있어."
이는 반쯤 진심이었다.
'계속 나가고 싶지만….'
만약 아르웬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굴복한다면 여기서 끝낼 거다. 그리고 바로 시험에 들어갈 거다. 정말로 아르웬이 자신에게 복종하기로 맹세했는지. 그 맹세에 거짓이 없는지 확인할 거다.
어쩌면 아르웬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당장 그녀의 표정을 봐라.
"…."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지 않은가? 자신을 도와줬던 미네 일행이 실상은 강림의 말에 복종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이용한 거라는 걸 알았으니 울화통이 터지겠지. 그리고 울화통이 터져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테고. 설령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다.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기서 아르웬이 백기를 들지 않을까? 강림 그리 예상했으나,
"거절한다."
유감스럽게도 아니었다.
"난 항복하지 않아."
두려움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아르웬은 또박또박 말했다.
"절대로, 절대로 네놈에게 굴복하지 않아. 무슨 짓을 해도 난 절대 굴복하지 않아!" "…." "어디 해볼 테면 해봐. 난 무섭지 않아!" "…그러냐? 아쉽게 됐네."
역시나 끈질기군. 그래도 강림은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아흐으윽?” “네가 선택한 지옥이니 잘 감당해, 알았지?”
저 건방진 소리나 하는 여자를 다시금 공포에 빠뜨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강림이 손뼉을 치자, 아르웬을 구속하던 촉수가 더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악, 아아아악! 그, 그만…이런 짓 했다간…아아아아악!"
어리석은 선택지를 고른 복수귀는 또다시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