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0 - 220화- 멀리서 결전을 지켜보는 제독
강림, 수아, 테리스, 그리고 스텔라가 아르웬과 격돌하고 있을 무렵,
"…."
카르디안은 멀리서 결전을 벌이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은 기함. 제독인 자신이 지휘하는 기함 갑판 위에 서 있다. 기함을 중심으로 두 자릿수에 달하는 철선들이 해역에 즐비해 있었다.
함선 수는 80척 이상. 동원된 강철 군단은 6만 명 이상. 디자이어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이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왕국군과의 결전은 매우 중요했으니까. 만약 왕국군을 여기서 섬멸하지 못한다면 네치아 왕국 접수는 실패로 돌아갔을 거다.
‘저것만 해결된다면 왕국 접수는 시간 문제겠네.’
섬멸은 성공적으로 끝냈다.
가장 위협적이라고 여겼던 트루퍼 무리는 탈리아에 의해 전부 몰살당했으며, 뒤이어 왕국군 함대 역시 탈리아의 공격에 절반 이상 침몰하고 말았다. 초장부터 박살이 나버린 왕국군은 이어지는 제국 함대의 공격에 맥을 못 추었다.
결국, 복수를 위해 준비해둔 네치아 왕국의 함대는 전투가 시작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멸하고 말았다. 함대라는 방어선이 붕괴하자 디자이어 제국은 곧바로 다섯 개의 섬 공략에 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왕국군은 처절하게 저항했다. 포탄이 떨어지면 돌멩이를 던져서 저항했고, 창이 부러지면 부러진 막대기를 창처럼 휘두르며 저항했고, 검이 부러지면 부러진 검을 휘두르며 저항했으며, 마법을 쓸 수 없다면 지팡이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그렇게 저항하던 왕국군은,
‘더는 왕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없을 테니.’
처참하게 패배했다. 최후의 저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허망하게 패배했다. 디자이어 제국의 무자비한 공격에 네치아 왕국이 팍팍 긁어모은 약 8만 명의 병사 중 생존자는 고작 1만. 이것도 여군들만 살아남았다. 남자들은 전투 중 전부 사망하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되었다. 원군으로 왔던 성군 12군단은 페르포네에 의해 전멸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째서야,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는 거냐고? 여기서는 이겨야 하는 거 아니냐고!
-틀렸어. 꿈도 희망도 없어. 하하, 우린 다 노예가 될 운명인가 봐.
포로로 붙잡힌 여군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리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더는 그리드에게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싸웠건만 그 결과가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압도적인 힘 앞에 어떤 노력도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은 여군들이 느낀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
"제독님, 5번 섬에 파견된 함대가 돌아왔습니다."
간부 중 한 명이 카르디안에게 보고했다.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카르디안의 지시를 받은 간부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명령을 내리는 순간까지 카르디안은 1번 섬에서, 아니 1번 섬이 존재했었던 해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인님…."
완승을 따낸 강철 군단은 포로들을 함대에 실어 조속히 철수했다. 본래라면 섬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축제를 즐기는 게 원칙이나, 강림의 명령에 따라 카르디안은 함대를 전투 해역에서 한참 먼 곳으로 이동시켰다.
이유는 간단하다.
괴수들이 싸우고 있으니까.
1번 섬이 존재했었던 장소에서 괴수들이 포효하며 싸우고 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입으로 하울링을 쏘고 있는 검은색 괴물은 카르디안의 주인인 강림이다. 주인님을 향해 내리치던 거대한 주먹이 주인님이 쏜 하울링을 맞고 튕겨 나갔다.
[전부 비켜! 화염탄 나가신다!]
아홉 개의 꼬리를 흩날리며 푸른 화염 구슬을 쏘아대고 있는 거대한 갈색 구미호는 구미호족 수장 수아다. 산탄총을 쏘아대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수아는 화염탄을 날렸다. 초거대 괴수는 신체 일부가 불타올랐다. 바로 잠수해서 불을 껐으나, 흉터는 지워지지 않았다.
-끼에에에에엑!
괴성을 내지르며 고주파를 날리는 거대한 분홍색 박쥐는 암살단 대장 스텔라다. 정통으로 고주파를 맞은 거대한 괴수는 잠시 몸이 휘청거렸다.
[잠시, 실례.]
반달처럼 생긴 외날이 달린 창을 휘두르고 있는 자칼 머리의 수인. 이 자의 정체는 그리드의 옛 스승인 테리스다. 괴물이 빈틈을 보인 기회를 포착한 테리스는 바로 공격했다. 외날에 괴수의 복부가 크게 베어졌다.
네 사람은 서로 합심하여 한 마리의 괴수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이 혈투를 벌이고 있는 상대의 정체는,
[이, 이대로 쓰, 쓰러질 것 싶으냐아아아!]
아르웬이다. 쥐가오리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괴수. 전신이 검게 물들어진 초거대 괴수가 바로 아르웬이다. 전신에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는 아르웬은 강림 일행을 몰아붙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고주파를 있는 대로 다 발사해 강림 일행이 접근하는 걸 막고, 공격 또한 분쇄하고 있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5개의 팔을 마구 휘두르며 강림 일행을 공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테리스에 의해 한쪽 팔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나,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며 강림 일행을 위협했다.
이에 강림 일행은 남은 팔들도 제거하는 것부터 최우선으로 삼고 있으며,
아르웬도 잘 알기에 더욱 매섭게 강림 일행을 몰아붙였다.
저 결전을 지켜봐야만 하는 카르디안은 속이 타들어 갔다.
'나한테도 힘이 있었다면….'
카르디안도 강림과 격렬한 섹스를 한 대가로 힘을 부여받았다.
감미로운 노래로 타인의 정신을 조종하고, 망가뜨리는 능력. 이 능력을 이용해 카르디안은 세이렌 섬 내부에 배신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세이렌 섬을 제국이 점령하는 데 크게 공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노래라는 능력만 받았지, 괴수로 변할 힘은 받질 못했다. 그렇기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 가봤자 도움은 전혀 안 될 거다. 인간에게는 통한 노래가 괴수에게도 통할지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철선 함대를 동원해 주인님을 도와주는 건 어떤가? 후방에서 포격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주인님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기각되었다.
-행여 도우러 올 생각 하지도 마.
자신의 말을 전하라는 한 병사를 통해 강림은 지시를 내렸다.
-일이 잘못되면 철수해, 알았지? 함대까지 잃어버리면 우린 끝장이야.
어차피 철선은 괴수와의 싸움에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쪽수가 많아도 소용없다. 상식을 초월한 괴수의 힘은 무적이라 자랑하던 철선 함대를 문자 그대로 지워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 전투가 벌어지는 해역에서 떨어져라. 만약 싸움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바로 병력을 철수시켜라. 함대를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된다.
그런 식으로 강림이 지시를 내렸기에 카르디안은 움직일 수 없었다. 주인님의 말은 절대적인데 노예인 자신이 그걸 거부할 권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기에 카르디안은 반발할 수도 없었다.
이미 철선만으론 괴수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 아르웬이 힘들게 모은 철선 함대가 탈리아라는 촉수 괴물에 허망하게 전멸하는 걸 카르디안은 목격했다. 그걸 봐버렸는데, 주인님의 명을 어기고 움직일 수 있을까? 탈리아는 그저 따위로 만들어버리는 초거대 괴수를 상대할 수나 있을까?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카르디안은 분하다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전투는 어찌 되었지?"
순간, 말이 들려왔다. 카르디안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머리의 여성이 한쪽 팔로 배를 받친 채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미 끝났어?" “너, 움직여도 되는 거야?”
여비서 아트리아였다. 아르웬과 싸우다 패배한 아트리아는 테리스에게 안긴 채로 이곳으로 옮겨졌다. 인간으로 돌아온 아트리아는 함선 내에 있는 병실로 옮겨졌다. 외상은 없었으나, 호되게 당한 탓인지 눕혀지는 순간까지 눈을 뜨질 못했다.
그런 아트리아가 나타났으니 카르디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비서인 내가 이대로 잘 수는 없…으윽?”
버티질 못하고 쓰러진다. 다급히 카르디안이 아트리아를 부축했다.
“그냥 들어가서 쉬어. 무리하면 오히려 주인님에게 매만 맞을 거라고.” “아니, 쉬어야 할 건 너야.”
아트리아는 지적했다.
“친동생이 당하는 걸 어찌 제정신으로 볼 수 있겠니?” “….”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어도 마음 편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다 끝난 일이야.”
자신을 걱정하는 아트리아의 말에 카르디안은 일축했다.
“난 이미 주인님에게 약속했어.”
이미 카르디안은 굴종을 택했다.
“어머니와 동생을 바치겠다고. 그 선택을 바꿀 마음은 없어.”
굴종의 증거로 어머니인 글랜디와 동생 아르웬은 바치겠다고 카르디안은 약속했다. 영원히 세 모녀와 함께 주인님에게 봉사하겠다고 카르디안은 약속했다. 두 사람이 거부하면 자신이 직접 조교 해서 따르게 만들겠다고 카르디안은 약속했다.
"뭘 해도 주인님을 이길 방도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것 말곤 달리 선택할 길이 있겠어?"
답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주인님은 너무나 강했으니까. 단순 해적 나부랭이였던 주인님은 수인 연합을 정복하고, 이제는 네치아 왕국까지 정복할 기세이다. 어쩌면 진짜로 세계 정복에 달성할지도 모른다.
그런 주인님에게 어찌 대들 수 있단 말인가? 대들었다가 역으로 화나게 만들어서 다 죽이겠다고 발광하면 어찌 감당할 텐가?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냥 빈대처럼 붙어사는 게 낫다.
그래서 가족을 살리기 위해 카르디안은 가족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그것 말곤 답이 없으니까.
그러니 카르디안은 동생과 싸우는 걸 주저할 마음이 없으며, 지켜본다고 마음이 흔들리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 “제독님!”
갑자기 간부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손에는 두 개의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4번 섬에 있는 헤라 님에게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 그 여자가?”
왜 지금 편지를? 지금 결전에 참여하고 있는 인원을 제외하면 다들 이곳으로 와야 하거늘, 왜 편지를 보낸 거지? 다들 여기에 있는데? 카르디안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간부가 건넨 편지를 읽었다.
잠시 뒤,
“지금 수뇌부를 집합시켜, 당장!”
카르디안은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