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5 - 205화- 만반의 준비를 한 아르웬
"현재 강철 군단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르웬의 부관인 여성이 그리 보고했다. 뒷머리를 닭 볏처럼 핀으로 고정한 보라색 머리의 부관은 상관이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큰소리로 설명했다.
“기습도 없고, 도발도 없었습니다. 다만….”
부관은 대답하기 곤란한 듯 우물쭈물했다.
“대답해.”
보다 못한 아르웬이 재촉했다.
“어차피 그리드가 여자 강간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거겠지?” “네. 그런데….”
부관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르웬 님의 언니분을 먹고 있었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르웬은 표정이 굳어졌다. 얼굴에 그늘이 지고, 분노에 찬 듯 몸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아르웬 님의 언니분이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가….” “그만.”
아르웬은 제지했다.
“그 이상은 하지 마. 알겠으니까.” “…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부관은 겁에 질린 듯 식은땀을 흘렸다.
“망할 쓰레기 새끼.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언니를!”
상관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마기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으니까.
“하아, 하아, 참자. 참아. 지금은 그런 것에 매달릴 여유는 없으니까.”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이른 뒤, 아르웬은 부관에게 물었다.
“방어전 구축은 잘 되어가고 있지?” “네,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아르웬이 있는 곳은 성국이 아니다.
성국과 네치아 왕국 국경이 맞닿는 선. 그 선에 있는 다섯 개의 섬 중 가장 가운데에 있는 섬에 주둔하고 있다. 아르웬뿐만 아니라 왕국군 총병력이 이곳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곳에 방어선을 친 이유는 간단하다. 이 다섯 개 섬이야말로 성국과 이어지는 관문이었으니까.
주변 일대가 전부 암초 지대라 배가 제대로 지나가기 어려우며, 오직 왕국군이 주둔 중인 다섯 개의 섬 사이로 통과하는 것만이 성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성국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라도 디자이어 제국은 왕국군을 몰아내고 다섯 개의 섬을 점령해야만 하며,
이를 위해 디자이어 제국군, 강철 군단이 섬 코앞까지 진군한 상태였다. 현재 양군 사이에 교전은 없으나, 언제든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아, 원래는 이게 아니었는데….”
아르웬의 말대로였다.
“그 쓰레기 새끼 때문에 일이 완전히 꼬여버렸어.”
황제인 그리드가 패배하고, 그로 인해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급습한다. 그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리드가 빨리 회복되었고, 제국 내부 혼란도 빠르게 수습되면서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수뇌부는 급습을 잠시 보류하자고 건의했고, 아르웬도 아무래도 좀 더 준비한 다음에 공격하는 게 낫다고 보고 건의를 받아들였다.
돌이켜보면, 그냥 무작정 공격하는 게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괜히 제국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는 바람에 급습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버렸으니까.
‘하필 괴수 군단을 만들어낼 줄이야.’
괴수.
지금 시대보다 아득히 높은 문명을 일구어냈던 고대인들이 만든 결전 병기. 흑광이라는 약물을 먹는 것으로 인간은 괴수가 될 수 있다. 고대인들은 괴수의 힘을 이용해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드는 자신을 따르는 일곱 명의 여자들을 괴수로 만들었다. 괴수 군단을 창설한 그리드는 네치아 왕국의 수도, 세이렌 섬, 그리고 라미드 섬을 침공했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괴수의 힘 앞에 세 섬은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그리드의 목을 꺾어버리자고 울부짖던 왕국군은 전략을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턱대고 쳐들어갔다간 역으로 몰살당할 게 뻔하니까.
“12군단은 아직도 자기 집에 있냐?” “네.” “쳇.”
제국의 성장을 두고 볼 수 없던 성국은 제12 군단을 원군으로 보냈다. 원래라면 함께 제국의 수도를 향해 쳐들어가는 게 계획이었으나, 계획을 공세에서 수세에서 바뀌면서 협력적이었던 성국이 비협조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방어선에 같이 있어야 할 12군단은 방어선에서 약간 떨어진 섬, 성국 영토에 있는 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르웬은 알 수 있었다.
‘안 되니까 도망치려 하다니.’
상황이 급변하자 교황은 아르웬에게 제안했다.
제국을 성국 영토 내로 끌어들이면 여러모로 피해가 클 거다. 차라리 지형이 익숙한 왕국 영토 내에서 싸우는 게 좋지 않겠나? 아직 제국이 왕국 영토 전체를 집어삼킨 것도 아니니 매우 가능하지 않겠나?
…라는 식으로 발을 뺄 명분을 내세웠다.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치는 행위에 아르웬은 격분했다.
자신들이 실패하면 그다음은 성국이다. 세계 정복을 노리는 그리드가 성국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잘 알고 있기에 협력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끝까지 도와줘야 하거늘, 왜 하질 않는 건가?
당장이라도 녀석들을….
“아르웬 님.”
부관이 아르웬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진정하세요, 여기서 이성을 잃으면 다 물거품이 됩니다.” “아….”
정신을 차린 아르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또….”
또다시 격분하는 바람에 날뛸 뻔했다는 사실에 아르웬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마지막 결전이 눈앞에 두고 있는데 왜 이러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자책하지 마세요, 아르웬 님. 흑광을 너무 먹는 바람에 생긴 일인데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흑광을 다량으로 복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부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아르웬이 앉아 있는 의자 밑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약병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아르웬 님. 당신이 지금까지 감수한 희생을 다 갚아줄 기회가 머지않았습니다.” “그때가 올 때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량의 흑광을 복용한 결과, 아르웬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기가 몸에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냥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검은색 마기가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너무 많이 나와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지만 말이다. 자칫 주변에 피해를 줄 수도 있기에 아르웬은 깊은 동굴 속에 자기 자신을 유폐한 상태였다.
결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자폭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한테도 괴수 군단이 있었다면 이럴 필요도 없었을 텐데.”
흑광은 교황이 보내줬다. 이걸로 제국에게 맞설 카드를 만들어내라면서.
그래서 아르웬은 괴수를 더 만들어내기로 마음먹었다. 괴수 군단을 만들어서 제국에게 맞서 싸우기로 했다. 따라서 괴수가 되고 싶어 하는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강행했고,
한 명도 예외 없이 다들 핏덩이가 되어 사망했다. 그 누구도 괴수가 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실험이 계속되었음에도 진전은 없었다. 결국, 실험하느라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다.
결국, 이대로 희생자들이 늘어나는 걸 원치 않았던 아르웬은 남은 흑광을 전부 자신이 마시기로 결정을 내렸다. 실패 사례만 늘어날 바에야 차라리 성공 사례인 자신이 먹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는 바람에 시한 폭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나, 아르웬은 꿋꿋이 참을 작정이었다.
여기서 참질 못하면 지금까지 준비한 복수가 다 물 건너갈 테니까.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간 그리드에게 복수하려고 몸도 영혼도 다 바쳤는데, 여기서 포기할 것 같나? 끝까지 달릴 거다. 끝까지 달린 끝에 녀석의 목을 베고 복수의 종지부를 찍을 거다!
이러한 아르웬의 각오를 아무리 신이라도 해도 꺾지 못할 거다.
"그보다 설화한테 소식은 없냐?" "네."
부관은 대답했다.
"로세움으로 끌려간 이후로는 편지 한 통도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냐…."
세이렌 섬이 제국의 침공을 받았을 당시, 설화는 간신히 탈출해서 아르웬이 있는 섬에 당도했다. 설화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 설명했고, 설화의 설명 덕에 아르웬은 제국의 보복 공격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세움에서 온 사자들이 설화를 데리고 갔다.
[이건 거래의 대가야.]
설화는 그리 말했다.
[지원병을 받기로 한 대가로 내가 거기에 가야 하거든.]
로세움 용병왕에게 원병을 받은 대가로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설화는 끌려갔다.
[원병을 더 보내달라고 간청할 테니까, 지지 마. 알았지? 지면 평생 원망할 거다.]
그게 설화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혹시 로세움에서 원병이 왔니?" "네, 왔습니다. 약 500여 명 정도." "그 정도라도 와도 감지덕지(感之德之)지."
원래대로라면 1만 대군이 원병으로 왔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1만 대군은 전멸했다. 라미드 섬에 주둔할 당시 하필 그리드가 쳐들어왔고, 그리드에 의해 용병들은 라미드 섬 혈족들과 함께 몰살당했다.
만약 전원 생존했더라면, 다 생존하지 못하더라도 상당수가 살아서 합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르웬은 안타까웠으나, 이미 지난 일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카드로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 아니,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성공하지 않으면 모든 게 다 끝날 테니까.
“아, 맞아.”
문득, 중요한 것을 떠오른 아르웬은 부관에게 물었다.
“트루퍼 무리는 다 포진되어 있지?” “네. 다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리드섬 영주가 만들어낸 생체 병기 트루퍼. 온순했던 고래 무리는 병기로 개조당했고, 성인 개체는 전부 그리드에 의해 몰살당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새끼들은 전부 아르웬이 회수했다. 제국과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해 회수한 트루퍼 새끼들은 현재 방어선과 제국 함대 사이에 배치한 상태였다.
성인 개체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국의 진격을 막아내기에는 충분할 거다. 어쩌면 괴수 군단을 막아내는 것도….
갑자기 물이 크게 솟구치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
무슨 소리지? 설마 제국이 공격을 개시한 건가? 불길한 예감이 든 아르웬은 부관과 함께 즉시 동굴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그녀가 본 것은,
“이, 이건….”
피와 살점으로 물든 바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