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7 - 197화- 저와 내기를 합시다, 마님
"세, 세뇌? 나, 날 세뇌한다고?" "응, 그래도 된다고 그리드의 허락까지 받았지."
자신을 세뇌하겠다는 말에 글랜디는 어안이 벙벙해졌고, 대답한 탈리아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님을 빠르게 무너뜨리려면 이것이 최선이라고 그리드를 설득했거든."
아르웬과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다. 제국의 모든 전력을 집중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준비가 완료되면 강철 군단은 왕국군이 집결되어있는 섬으로 총공격을 감행할 거다.
그 전에 아르웬을 타락시킬 도구로 점찍은 글랜디를 확실하게 매듭짓고 싶다. 자신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암캐로 떨궈서 아르웬의 심장을 꽂아버릴 비수로 삼고 있다. 그 비수를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강림은 아르웬을 생포하기 전에 글랜디부터 떨구기를 원했다. 주문을 접수한 탈리아는 세뇌 말곤 빨리 끝낼 답이 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강림은 허락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나라도 고집부릴 순 없는 노릇이니까.
세뇌당한 여자보다는 알아서 무너져 내리는 쪽이 더 꼴린다. 그래서 강림은 세뇌당했던 카르디안을 자유롭게 풀어줬고, 스텔라를 포함한 암살단 역시 세뇌라는 감옥에서 풀어줬다.
풀어주는 대신, 강도 높은 인체 개조 및 조교까지 병행해서 영원히 자신에게 속박되는 신세로 전락시켰지만 말이다.
-알았어, 네 말에 따를게.
예정된 기간에 맞추기에는 일정이 너무 빠듯하다. 이를 극복하는 수단은 세뇌밖에 없다. 그 말에 강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하기 어렵다는 게 아쉬우나, 공사는 구분할 정도로 분별력은 있었다.
-단,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대신, 강림은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조건이 붙긴 했지만, 딱히 문제 되는 건 아니야. 오히려 놀랐지.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조, 조건이 대체 뭔데?" "그건…."
탈리아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더니,
"메롱, 안 가르쳐주지." "…."
혀를 내밀며 조롱했다. 글랜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이마에는 십자가 도로가 나타났다.
"이, 이 망할 여자가!" "어이쿠!"
가증스러운 혓바닥을 물어뜯을 기세로 글랜디는 탈리아를 향해 목을 뻗었다. 탈리아가 바로 뒤로 물러섰기에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아직 그럴 힘은 남아 있나 보네. 아트리아가 혼을 다 빼놓았다고 했는데…." "제기랄, 이것만이라도 풀 수 있었다면…."
촉수에 사지가 구속되어 있다는 게 화가 났고, 이 촉수를 풀 수 없다는 사실에도 화가 난다. 철천지원수가 눈앞에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글랜디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 그런 얼굴로 보지 마."
그런 글랜디를 보며 탈리아는 위로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건넸다.
"머리가 깨끗하게 씻겨지고 나면 모든 게 잊어버릴 테니까." "그걸 말이라고!" "그러니, 지금 할게."
탈리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튕김과 동시에 검은색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분만대에서 수많은 촉수가 전개되었다.
"아, 안 돼. 이, 이러지 마!"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촉수 무리를 보고 글랜디는 황급히 소리쳤다.
"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소중한 가족들의 추억을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싶진 않단 말이다! 그런 애원과 달리 촉수 무리는 글랜디의 몸을 감쌌다. 지렁이처럼 글랜디의 다리를 감싸고, 배를 감싸고, 가슴을 감싸고, 목도, 팔도 감싼다. 머리까지 칭칭 감은 촉수는 다음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미, 미안해요, 여보. 미안해 아르웬.'
또다시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니. 이제 곧 닥쳐올 비극에 글랜디를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 뭐야? 왜 이러는 거지?'
이대로 파고들 줄 알았는데. 파고들어서 이상한 약물을 주입할 거라고 여겼는데. 머리를 헤집어 자신을 완전히 죽여버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혹시 자신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글랜디는 생각했으나, 바로 부정했다.
"흐으으…."
죽었다면 자신의 몸을 더듬는 촉수의 기분 나쁜 감각이 전해질 리 없었을 테니까.
"만약 세뇌당하기 싫으면 한 가지 내기할래?" "내기?"
내기하자는 탈리아의 제안에 글랜디는 어리둥절했다.
"왜?"
내기할 이유가 없을 텐데 왜 하는 거지? 혹시 자신을 놀리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아까 탈리아는 본인 입으로 그리 말했다. 자신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세뇌하겠다고. 그리드에게 이미 허락까지 다 받았다고. 장애물이 사실상 없으니 진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근데, 이 여자는 왜 지금 말을 바꾸는 거지? 다음 탈리아가 하는 말에 글랜디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실은 당신이 불쌍해서 이러는 거야. 사이좋게 그리드에게 당한 처지인데 당연히 동정심이 들지 않겠어?" "동정심이 생겨? 네가?" "왜, 내가 그런 거 생기는 게 이상하니?"
당연히 이상하다. 매우 이상하다. 그리드의 말에 복종하는 년이 지금 와서 동정한다는 말을 꺼낸다고?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너무나 황당해서 글랜디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튼, 내기에서 이기면 그냥 육체를 개조하는 선에서 끝내고, 지면 세뇌할 거야, 알았지?" "그렇게 말하면 내기가 무슨 의미가 있어? 결국 결말은 똑같다는 거잖아!"
내기에 이겨도 개조당하고, 져도 개조당한다. 그렇게 해버리면 내기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글랜디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똑같지."
탈리아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뭐라고?" "잘 생각해 봐. 육신이 망가지는 게 나을지, 아니면 머릿속이 망가지는 게 나을지." "…."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당신이라면 뭘 선택해야 할지 말 안 해도 알 수 있지 않을까?" "…." "만약 대답하지 않으면…." "윽?"
순간, 머리에 통증이 온다. 간신히 눈동자를 위로 굴린 글랜디는 커다란 촉수 하나가 정수리에 박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세뇌할 거야." "이, 이 망할 여자가…." "그 망할 여자에게 죽기 싫으면 어서 선택하세요, 마님." "제, 젠장…."
녀석은 진심이다.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을 세뇌할 거다. 그렇다고 내기를 받아들여 이긴다고 해도 개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엇을 하든 지옥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면, 악마가 제안한 도박을 거부하는 게 좋을까? 거부하는 바람에 오히려 소중한 추억을 다 잊어버리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일까? 그나마 나은 쪽을 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 알았어."
한참 고민 끝에 글랜디는 입을 열었다.
"내, 내기 바, 받아들일게." "좋아, 그럼 바로 조건을 말할게." "윽?"
탈리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정수리에 꽂힌 촉수가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도 뇌수가 솟구치는 일은 없었다.
"내기 조건은 서 있는 거야." "서 있는 거?" "그래, 당신은 누워만 있었지, 혼자서 일어서는 일이 별로 없었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글랜디는 개조당한 이후 온종일이 침대에 사지가 X자로 펼친 상태에서 결박당해 있었으니까. 결박당한 상태에서 아트리아, 탈리아, 스텔라, 그리고 딸 카르디안에게 농락당했다.
근데, 일어서는 게 조건이라니.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탈리아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 왕가슴을 달린 상태에서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지 보고 싶어." "윽?"
가슴을 지칭하자 순간적으로 글랜디는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가슴이 무겁긴 하지만….'
개조를 당하는 바람에 가슴은 비대해졌다. 너무 비대해져서 시선을 아래로 내려도 발등이 전혀 보이질 않을 지경이었다. 비대해진 만큼 무게도 많이 나간다는 걸 글랜디도 모를 리 없었다.
어쩌면 탈리아는 이 흉물스러운 물건을 가지고 있으니 일어서지 못할 거라고 여기는 거 아닐까?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내기 조건을 건 게 아닐까?
'두고 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비록 육신이 비참하게 개조당했으나, 엄연히 남편과 같이 수군을 이끌던 제독이었다. 제독인 만큼 단련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힘은 다소 떨어졌을지 몰라도 고작 가슴 때문에 무너질 리 없다.
그러니 보여주마. 자신을 물로 본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하….
"하윽?"
순간, 가슴을 찌르는 통증에 글랜디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너, 너 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한 글랜디는 탈리아를 향해 항의했다.
"어, 어째서 이 짓을 하는 거야? 내기하자고 했잖아!"
가슴에 촉수가 꽂혀 있었다. 하나가 아닌 수십 개의 촉수 가락이. 가슴 윗부분부터 밑동까지. 첨단과 첨단 주위에 번져 있는 분홍색 부위까지 전부 다 촉수가 박혀 있었다.
내기할 거면 몸에 손대지 말아야지, 왜 손을 대는 거지? 글랜디의 항의에 탈리아는 대답했다.
"그야, 조건에 넣지 않았으니까." "무, 뭐?" "내가 말했잖아. 내기하자고."
웃는 표정을 지으며 탈리아는 왼손 검지를 들었다.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탈리아는 대답했다.
"내기하자고 했지, 가슴은 개조는 안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탈리아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속으셨군요, 마님. 축하드립니다." "너, 너, 너, 너어어어어!"
격분한 글랜디는 당장 달려들 기세로 몸부림을 쳤으나,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아아아악!"
촉수가 몸을 세게 조이는 바람에 이내 곧 멈추고 말았다.
"자, 잡담은 그만하고 이제 시작할게."
탈리아는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고,
"아호오오오오옥!"
가슴에 꽂힌 수많은 촉수 가락이 일제히 꿈틀거렸다. 꿈틀거리면서 약물을 주입했고, 약물이 주입될 때마다 살구색 태산이 크게 요동쳤다.
요동칠 때마다 모유가 한 움큼씩 유두에서 쏟아졌다.
"나, 나는 절대 지지 않아. 질 수 없어. 지지, 지지 않을 거야아아아아!"
마님의 애처로운 비명이 광장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