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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175화 (176/344)

Chapter 175 - 175화- 세이렌 섬, 무너지다

디자이어 제국의 새로운 괴수들의 등장으로 네치아 왕국 수도가 함락될 무렵.

“왜,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카르디안과 아르웬의 친모인 글랜디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째서 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거냐고.”

지금 그녀는 저택 밖에 나와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몸을 숨긴 채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본래라면 밖이 아닌 침대 위에 누워있어야 정상이다. 가까스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철선 제작소에서 장기간 동력원으로 이용된 글랜디였다. 쉬질 않고 마력을 착취당한 탓에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글랜디가 예전처럼 활동하기 위해선 장기간 휴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글랜디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산책하러 나가고 싶어도 다리가 불편해서 나가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런 걸 다 참아내며 나갈 수 있으나, 글랜디는 참았다.

전쟁 준비를 하느라 어수선한 마당에 멋대로 돌아다니는 건 딸아이에겐 민폐니까.

‘어머니, 저는 지금 왕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둘째 딸 아르웬이 그리 말했다.

‘모든 병력을 다 동원해서 그리드를 칠 겁니다.’

현재 자신은 이 나라의 여왕인 제1 왕녀, 에일로이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에일로이 왕녀가 뒤에서 밀어주고 있기에 왕국군 전체를 통솔하는 사령관이 되었다고. 제1 왕녀와 대립하던 왕녀들도 그리드 타도를 위해 병력을 이쪽으로 속속 보내주고 있다고. 지금 자신에게 그리드에게 대적할 수 있는 철선 함대가 있고, 괴수의 힘을 가지고 있어 그리드와 정면으로 싸우는 게 가능하다고.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길이 드디어 열렸다고.

왕국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드와의 악연을 끝내겠다고 아르웬은 어머니 앞에서 선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지지 않아요.’

아르웬은 안심해도 된다는 듯이 말했지만, 글랜디는 무서웠다.

자신도, 남편도 그리드를 쓰러뜨리기는커녕 참패하고 말았다. 남편은 시신마저 능욕당했고, 자신은 평생 마력을 착취당하는 건전지로 취급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그리드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자들은 하나같이 패배했고, 하나같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예외 없이 다들 그렇게 끝나버렸는데, 둘째 딸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리 괴수의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그리드라는 대악마를 묻어버리는 게 가능할까?

불안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도 글랜디는 인정했다.

그리드라는 대악마를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버리지 않으면 결코 평화란 없다. 그리드를 없애지 않으면 자신들은 물론이요, 왕국에 사는 모든 이들이 불행해질 거다.

이는 왕국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막아내지 못하면 다른 나라들 역시 그리드의 야망에 먹히고 말 거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드를 없애야만 한다. 그리드가 세운 제국도, 제국을 세우는 데 앞장선 악마의 추종자들도 다 없애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위한 일이다.

‘반드시 녀석의 목을 아버지 묘에다 바칠 겁니다.’

‘그러니까, 지켜봐 주세요. 제가 녀석을 쓰러뜨릴 테니까.’

‘어머니의 악몽을 제가 끝내겠습니다.’

부디 아르웬이 승리하기를. 승리해서 남편의 원수를 갚기를 글랜디는 간절히 원했다. 못난 부모가 이루지 못한 숙원을 딸이 이루어주기를 원했다.

그랬는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놈들을 막아라! 피난민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여야 한다!

-안 돼, 퇴로가 막혔어. 이대로는…아아아악!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개죽음당할 거면 더 죽이고 죽자!

현재 세이렌 섬은 디자이어 제국의 침공을 받고 있다.

‘제국은 당장 이쪽을 노리지 못할 겁니다. 황제가 쓰러져서 대혼란 상태거든요.’

아르웬의 말에 따르면 지금 디자이어 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한다.

그리드가 아르웬에게 패배했으니까. 패배한 그리드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기회로 삼아 제국 내에 있는 반 그리드 세력이 들고 일어섰다고 한다. 내부를 정리하느라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아니라고 한다.

아르웬은 이때를 노리고 제국을 침공할 거라고 했다. 따라서 현재 아르웬은 세이렌 섬을 떠나 왕국군이 주둔 중인 어느 섬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최종 점검을 한 뒤에 제국을 향해 진격할 거라고 했다. 아마 자신이 나서는 그때까지도 놈들은 내부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 놈들이 어찌 세이렌 섬을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아르웬의 예측이 틀렸단 말인가? 예상과 다르게 그리드가 빨리 깨어났고, 그 덕에 혼란이 빨리 정리되었단 말인가? 기어이 벌어진 최악의 상황 속에서 글랜디는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 침공이요? 그건 문제없습니다.’

제국이 예상을 깨고 침공에 나서면 어쩔 거냐는 글랜디는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에 아르웬이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도 중요 시설이거든요. 이곳에 정예 병력은 배치할 겁니다.’

세이렌 섬에는 철선 제작 시설이 있다. 이 시설이 있었기에 아르웬은 그리드에게 복수할 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빼앗기면 큰일 날 이 중요한 시설을 소홀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르웬은 섬을 방위할 철선 10척과 정예 병력 8천을 섬에 놔뒀다. 제국군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전력이나, 이 정도면 충분히 제국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아르웬은 자신했다. 녀석들이 제아무리 날뛴다 해도 똑같은 철선을 맞상대하는 건 부담이 될 거고, 그 부담을 이기고 섬에 접근해도 최신식 대포로 무장한 정예 병력을 전면으로 상대하기 힘들 거라고 여겼다.

그런 아르웬의 예상은 새롭게 등장한 세 마리의 괴수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우오오오옥!

전신이 보라색 갑주로 뒤덮은 괴물이 나타났다. 그리드가 변신하는 괴수와 유사하나, 꼬리가 있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선봉장에 나선 이 괴물은 아르웬의 함대를 궤멸시켰다. 함대가 어떻게든 괴물을 향해 포를 쏴댔으나, 괴물은 요리조리 잘 피해버렸다. 오히려 너무 재빠른 바람에 엉뚱하게도 아군이 맞아 침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제국의 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놔둔 아르웬의 함대는 보라색 괴수에게 마지막까지 농락당한 끝에 심해 속으로 수장당했다.

-끄르르르, 끄르르르….

보라색 괴물 말고도 다른 괴물이 더 있었다.

이질적인 괴물이었다. 동물처럼 네 다리도 기어 다니는 존재가 아니었고, 두 다리로 걸어가는 존재도 아니었으며, 날개로 날아다니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저, 덩어리였다. 미역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촉수 덩어리에 불과했다. 검은색 촉수 덩어리는 유유히 섬에 상륙했다. 상륙하자마자 바로 촉수를 전개했고,

해안을 방어하던 병사들을 몰살시켰다. 고작 1초도 안 된 사이에 그 자리에 있던 병사들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병사들이었던 살점과 뼛조각들만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촉수 덩어리는 계속 전진했으며, 덩어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피비린내만 진동했다.

-끼에에에엑!

상공에도 새로운 괴수가 출몰했다.

전신이 분홍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박쥐 괴물이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파에 그 자리에 있던 병사들은 전부 터져나갔다. 병사들은 이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활을 쏘아대고, 대포를 쏘아대고, 심지어 돌까지 던지며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사이좋게 터져나갈 뿐이었다.

보라색 괴물, 촉수 괴물, 박쥐 괴물. 세 마리의 괴물은 아르웬이 준비한 모든 방어 수단을 무력화시켰다.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기에 강철 군단은 손쉽게 세이렌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어떻게든 강철 군단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으나, 사실상 전멸해 버린 상태에서 강철 군단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섬 전체가 강철 군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나는 이제 어찌해야….”

강철 군단이 저택까지 쳐들어오자 글랜디는 간신히 창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만약 일 초라도 늦었더라면,

-이, 이거 놔, 이거 놓으세요!

-우, 우릴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 설마 팔리는 거야?

-영주님, 제발 빨리 돌아와 주세요. 제발요.

시녀들처럼 끌려갔을 거다.

‘어떻게 같은 사람을 저렇게….’

저택을 점거한 강철 군단은 모든 시녀와 하인들을 붙잡았다. 이 중 하인들은 필요 없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고, 시녀들은 발가벗겨졌다. 노예를 상징하는 쇠고랑을 목에 착용한 상태로 시녀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시녀들뿐만 아니었다.

-싫어, 엄마, 도와줘요!

-안 돼요, 제발 아들만은 살려주세요! 하나뿐인 아들이란 말이에요!

-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섬 곳곳에서 비극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자들은 보이는 족족 처형당하고,

여자들은 보이는 족족 끌려갔다.

이 참혹한 현장에서 피난민들은 빠져나오려고 노력했으나, 무의미했다.

간신히 항구에 도착해도 배가 없었으니까. 이미 배는 전부 침몰 되었기에 섬에서 나갈 수단이 없었다. 남은 길이라곤 죽거나, 끌려가는 것뿐. 곳곳에서 피난민들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이 생지옥에서 글랜디는 오들오들 떠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야만 해.’

떨면서도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근데, 무슨 수로 하지?’

노력했으나, 답이 없었다.

‘무슨 수로 저놈들을 몰아내지? 날 도와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패배라는 결말에서 벗어날 수단이 글랜디에겐 없었다.

그럼 남은 것은 하나도 없는 걸까?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 빠져나가서….” “여기 있었네요, 어머니.”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글랜디는 고개를 돌렸다.

“카, 카르디안….”

자신을 쏙 빼닮은 남색 머리와 자주색 눈동자. 자신을 닮아 머리도 허리까지 닿아 있다.

장녀, 카르디안의 등장에 글랜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 너였구나. 나는 또 적인 줄 알고….” “저도 찾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주인님에게 데려가려고 찾고 있었는데, 아무 데도 보이질 않아서요.” “그래, 주인…뭐?”

순간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닌가 글랜디는 착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카르디안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그 설화 새끼는 언제 도망쳤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더군요. 행여 어머니를 빼돌린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었는데,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주인님에게 바칠 제물이 다 없어지면 좀 곤란하니까요.” “주, 주인이라니. 누굴 보고 하는 소리니?” “그야….”

카르디안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드 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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