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3 - 173화- 수도 침공
나라가 건립된 이후 약 200년 만에 네치아 왕국은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이했다.
그리드가 세운 해적 국가, 디자이어 제국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왕녀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틈을 타 디자이어 제국은 왕국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막강한 철선으로 이루어진 함대와 괴물이라는, 상식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될 병기까지 내세운 제국을 왕국은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아무리 목숨을 바쳐 싸워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남쪽과 서쪽을 아우르는 수많은 군도가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엘프섬과 아이스 섬이 함락되면서 왕국의 수도 또한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왕국의 멸망이 기정사실이 되어가자 영주들은 제국으로 갈아탈 움직임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간신히 왕녀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여 다툼을 멈추고 제국과의 싸움에 힘을 합치기로 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엎기에는 무리였다.
그런 찰나에, 희소식이 들려왔다.
[대악마 그리드가 쓰려졌다!]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했던 대악마 그리드가 쓰러졌다.
[세이렌 섬 영주 아르웬이 그리드를 패퇴시켰다!]
세이렌 섬을 다스리는 영주, 아르웬이 그리드를 쓰러뜨렸다. 똑같은 괴수의 힘을 써서 그리드에게 패배라는 굴욕을 안겨줬다. 아르웬에게 치명상을 입은 그리드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로 인해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
왕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지금까지 당한 수모를 모조리 다 갚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자신들에게 온갖 굴욕을 선사한 해적 무리를 모조리 다 소탕하자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왕국의 모든 병력이 아르웬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왕국이 모을 수 있는 전력을 다 모아서 일격에 제국을 부순다.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꿈을 드디어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왕국의 모든 이들은 크게 감격했다.
그리고, 그건 찰나의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비상, 비상! 제국군이 쳐들어왔다. 전원 전투태세!]
제국의 역습이 시작되었으니까.
●●●
“포수는 어서 포탄을 장전하라!”
성벽 위에 있는 수비 대장은 목청껏 외쳤다. 그 외침에 따라 병사들은 분주히 대포를 발사할 준비에 들어갔다.
“대장님, 전 포대 사격 준비 완료했습니다!” “좋아, 전원 목표물을 향해 조준해라!”
대장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목표물을 향해 대포의 머리를 돌렸다. 그들이 쓰러뜨려야 할 목표물이란 바로,
“저 괴물 녀석에게 우리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자!”
괴물이었다. 아니, 거인이었다. 은색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거대한 기사였다. 등에는 거대한 흰색 망토가 펄럭이고, 오른팔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방패가, 왼손에는 양날검을 쥐고 있었다.
그 기사 뒤로 제국의 정예 병력, 강철 군단이 진군 중이었다.
‘괴물은 그리드만이 아니었나?’
들은 정보에 따르면 그리드는 검은색 괴물로 변한다고 들었다.
근데, 저 은색 괴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보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새로운 괴수의 등장에 수비 대장은 당혹스러웠으나,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녀석에게 대항하기 위한 무기는 있다. 그거라면 저놈도 뚫을 수 있을 거야!’
성벽 위에 있는 모든 대포에는 미사일 형태의 기다란 포탄이 꽂혀 있었다.
대 그리드 전을 상정해서 만든 결전 병기. 실전에 쓰이는 건 처음이나, 그래도 마탑에서 만든 최신형 무기이니 괜찮을 거다.
“전원 준비….”
포탄이 닿은 사거리에 괴물이 거의 다다르자 수비 대장은 손을 올리고,
“쏴라!”
힘차게 휘둘렀다.
-쾅, 쾅, 쾅, 쾅!
폭발음과 함께 미사일이 날아간다. 고속으로 날아가는 수많은 미사일은 괴물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미사일 탄두 하나가 최초로 괴물의 몸에 닿는 그 순간,
-콰가가가가강!
돌풍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검은 연기에 일대가 순간 자욱해졌다.
“….”
수비 대장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죽었…나?”
그래, 죽었을 거다. 저 정도 폭발이라면 가루가 되고도 남았을 거다. 저기, 강철 군단 좀 봐라. 비장의 수단이 쓰러졌기에 다들 진군을 멈추지 않았는가? 쓰러졌으니까 놈들도 겁에 질려….
검은 연기가 걷힌 건 그때였다.
“무, 뭐라!”
수비 대장은 크게 경악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떻게 그걸 맞고도….”
괴수는 살아 있었다. 갑옷이 약간 그을린 자국이 있을 뿐, 타격을 받은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수백 발의 미사일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멀쩡했다.
“전원 재장전, 재장전하라!”
수비 대장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멀뚱멀뚱 있지 말고 어서 재장전하라! 재장….”
하지만, 대장은 그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고, 귀가 먹먹해졌으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뭔가 공중으로 부양한 건지 발바닥에 뭔가 닿는 느낌조차 없었다. 부하들의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나, 대장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다.
괴수가 날린 검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단 한 번 휘두른 거대한 검기에 성벽은 물론이요, 그 위를 지키던 포병대와 수비 대장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네치아 왕국 수도 외성 일부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강철 군단, 진군하라.]
거대한 은색 기사, 이리스는 지시를 내렸다.
[놈들을 섬멸하라.]
●●●
‘이게 괴수의 힘인가.’
자신이 이룬 업적을 보고도 이리스는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괴수가 될 순간이 올 줄이야.’
오직 주인님과 괴수로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인님 외에 그 누구도 괴수가 되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다. 혹광이란 촉매제가 있다 해도 주인님처럼 선택받지 못하는 이상 괴수의 힘을 갖는 건 어렵다고 여겼다.
그렇게 여겼는데, 이렇게 힘을 얻게 될 줄이야. 그것도 자신의 이상향인 기사로 변할 줄은 이리스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사라….’
기사도는 이미 버렸을 텐데. 주인님에게 패배한 그 순간부터 자신은 기사가 아닐 텐데. 가족들과 함께 주인님의 봉사만 받는 돼지에 불과한데. 돼지처럼 우리에 갇힌 채로 주인님의 지시만 받는 처지에 불과한데.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오직 주인님만을 위해 살기로 맹세했는데.
아직도 꿈을 버리지 못한 걸까? 꿈을 버리지 못했기에 거대한 기사라는 이름의 괴수가 된 것이 아닐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리스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했다.
‘아직도 내게 기사의 자격이 있다면….’
기사란 충성을 맹세한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의무. 그리고 이리스는 충성을 바쳐야 하는 주인이 있다.
‘주인님을 위해서 싸우자.’
그러니 주인님을 위한 기사가 되리라. 주인님의 야망을 위한 검이 되리라. 주인님의 꿈을 방해한 자들을 모조리 다 쳐내는 방패가 되리라.
그럴 수 있다면,
-이, 이런 미친, 이딴 놈이 다 있다니!
-그런 소리 그만하고 얼른 도망치자! 여기 있다간 위험해!
-안 돼, 밟힌….
개미들을 짓밟는 것쯤은 할 수 있다.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병사 무리를 이리스는 발로 밟아버렸다. 콰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물감처럼 퍼져나갔다. 다리를 들어 올리니 끈적끈적한 내장이 발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리스는 무시하고 계속 전진했다. 감히 겁도 없이 주인님의 뒤통수를 치려 한 제1 왕녀가 기거하는 왕성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발밑에 무엇이 있든, 무슨 비명이 들리든, 무엇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든 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나저나, 수아와 페르포네는 뭐 하고 있지?’
네치아 왕국 수도 공격은 총 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서쪽은 이리스가 책임지고, 남쪽은 수아가 책임지며, 동쪽은 페르포네가 책임진다.
세 사람 모두 책임을 지고 외벽을 무너뜨려 강철 군단이 진군할 기회를 만든다.
그렇게 합의했는데, 아직도 뚫지 못한 건가? 의외로 왕국군이 저항이 거센 건가?
그리 생각한 순간,
-콰가가가강!
남쪽 외벽이 큰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아니, 녹아내렸다. 그곳에 있던 병사들도 흔적도 남지 않고 새까만 재가 되어 사라졌다.
[늦어서, 미안.]
녹아내린 외벽을 거대한 구미호가 내부에 들어왔다. 전신이 갈색으로 이루어진 구미호, 수아는 이리스에게 사죄했다.
[마법사들을 상대하느라 늦었어.]
[늦은 만큼 일해.]
이리스는 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왕녀가 도망치기 전에 빨리 움직….]
동쪽 외벽이 녹아내린 건 그때였다.
[미안, 미안. 늪에 빠져서 빠져나오느라 시간 걸렸어.]
녹색 비늘로 이루어진 거대한 독사가 기어 왔다. 뱀이 지나간 자리에는 보라색 독기가 피어올랐고, 그 독기를 들이마신 사람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목숨을 잃었다.
독사, 페르포네는 두 사람에게 사죄했다.
[설마 왕녀가 그렇게까지 준비했을 줄은 몰랐어.]
외벽까지 도달하는 것까진 순조로웠다.
순조로웠으나, 별안간 늪이 생기는 바람에 페르포네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마법사들의 집중 포격에 진격이 지체된 수아처럼 페르포네도 병사들의 집중 포격에 시달려야만 했다.
뭐, 그렇게 집중 포격을 가한 마법사들과 병사들은 사이좋게 황천길로 가버렸지만 말이다.
‘나만 운이 좋았던 건가?’
두 사람의 얘기를 듣던 이리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나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갑옷이 단단했기에 망정이었지, 갑옷이 없었다면 이리스는 두 사람보다 더 늦게 돌파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자신이 아니라 주인님이었다면 더 큰 곤욕을 치렀을 거다.
[자자, 잡담은 그만하고 왕성으로 가자.]
어찌 되었든 성 내부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지상의 일은 강철 군단에 맡기고, 우리 세 명은 해야 할 일을 하자. 이번 보복이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선 그게 걸맞은 전리품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니까. 이리스, 수아, 그리고 페르포네는 왕성을 향해 진군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이었던 핏덩이들만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