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2 - 152화(막간)- 복수를 위해 아르웬은 독주를 마십니다
"엘프들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북해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설화는 아르웬이 머무는 섬으로 돌아왔다. 아르웬이 다스리는 영지, 세이렌 섬으로 귀환하는 게 지금 설화가 있는 곳은 세이렌이 아니었다.
이곳은 다른 섬이다. 그리드에게 가족을 잃고 복수의 칼날만을 가는 동지 중 한 명이 제공한 은신처다. 디자이어의 제국의 손이 닿지 않는 섬에 숨은 아르웬은 한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더는 세이렌은 안전하지 않으니까.
제국군이 남몰래 침입해 함선 제작 시설을 파괴했다. 만약 설화의 조언이 없었다면 아르웬이 모든 걸 걸고 만든 함대는 물고기 밥으로 전락했을 거며, 애써 모은 기술자들도 다 잃어버렸을 거다.
현재 함대도 기술자들도 전부 이 섬에 숨겨져 있다. 숨겨진 상태에서 아르웬은 계속 철선 제작을 시도하려고 노력 중이며,
그리드와 동등한 힘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고 있다. 설화가 찾아온 동굴 안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넓은 공동 중앙에 아르웬은 주저앉아 있었다. 거친 운동을 막 마친 듯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하루도 버티질 못했나 보군요. 아까운 무기만 낭비한 거 아닌가요?" "낭비는 아니야."
설화가 가지고 온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아르웬은 일축했다.
"적어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으니까."
엘프족들에게 반란을 종용한다. 그리드의 억압에 굴복하지 말고 일어서라고 꼬드긴다. 반란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물자를 전부 지원해주는 것으로 희망을 품게 해 준다. 희망을 품게 해서 멍청한 엘프들이 결단을 내리도록 만든다.
모든 것을 비수를 갈기 위해서. 그리드의 심장에 꽂을 비수를 완성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엘프들을 미끼로 사용한다. 그럴 목적으로 아르웬은 엘프족의 반란을 뒤에서 지원했으며,
그렇게 지원한 반란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건 맞는 말이죠. 들리는 소리로는 엘프들 갖고 노느라 그리드가 섬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어쩌면 아르웬 당신 말대로 되었다고 봐야겠네요.”
설화는 그리 긍정했으나,
“하지만 실패한 건 맞잖아요?”
바로 까버렸다.
“물자를 낭비했으니 이건 실패라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음…." "제 말이 틀렸어요?"
아르웬은 대답이 궁한지 그저 고개만 숙였다.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게 말이 돼?'
3일. 엘프족들의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일이었다. 최신식 철제 무기들은 물론이요, 화약 무기까지 잔뜩 줬음에도 엘프들은 버티질 못했다. 숲이라는 이점을 살려 제국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음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제국의 물량 공세에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분명 숫자도 충분하고, 무기도 충분하게 줘서 꽤 오래 버틸 줄 알았는데, 왜 무너진 거지? 그렇게나 엘프족 수장의 지휘가 형편없었나? 아니면, 내부 분열?어째서 엘프족 반란이 조기 진압되었는지 아르웬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 원인이 강림이 투입한 데스 나이트 군단에게 있음을 아르웬과 설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보다 북해에서의 일은 어찌 되었지? 네가 말하던 여제는 만났나?" "네, 만났습니다."
아르웬의 질문에 설화는 바로 대답했다.
"정말 대단한 수완가더군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북해를 절반 이상 통일했더라고요. 고작 한 사람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북해에는 여제라는 인간이 있다. 그리드가 제국을 세우고 자기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자, 그 여자도 이에 맞춰 여제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여제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 여자는 혼돈의 도가니인 북해를 혼자서 다 먹어 치우고 있다.
그런 여제가 그리드와 맞서 싸울 호적수라는 걸 잘 알기에 설화는 북해로 향했다.
"만약 그리드만 아니었다면 세상의 시선은 북쪽으로 갔을 겁니다. 그 여자, 욕심이 커 보였거든요." "왜, 그리드처럼 폭군이 될 기질이 보였어?" "네."
설화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수틀리면 다 얼려 죽이고도 남을걸요?" "…." "뭐, 그리드만큼 인격파탄자는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마세요. 자기 사람에겐 따뜻한 분이니까." "필요 없으면 그냥 다 버릴 여자처럼 들리는데…."
여제에 대한 소문은 아르웬도 익히 들은 바가 있다.
야만인답게 잔혹하다고. 항복한 자에게는 자비롭지만, 저항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하다고.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자는 그 씨족을 다 수장시켜버리는 냉혈한 여자라고. 그리드처럼 학살을 재미 삼아 저지르는 광년이라고 아르웬은 그리 들었다.
그런 여자에게도 동맹을 맺자고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해서, 우리랑 손을 잡겠데?" "아뇨. 안 한대요." "…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로 설화를 쳐다보는 아르웬. 아르웬을 보며 설화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드는 내 손으로 쓰러뜨릴 거니, 네놈들은 얌전히 땅을 바칠 생각만 해라. 그런 말만 들었어요." "…." "정말 짜증 나는 년이었어요. 회사였다면 그런 여자 다시는 세상에 못 나오게 밟아버렸을 텐데…." "그럼 다 무의미한 짓인 거 아냐?"
북해에 사는 여제만이 그리드에게 맞설 수 있는 호적수다. 그 호적수를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설화는 북해로 향했다.
그랬는데, 다짜고짜 항복을 요구하다니. 그 여자는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까딱 잘못하면 여제 자신도 가축 신세를 면치 못할 텐데? 무슨 심보로 그런 개소리를 지껄인 건지 아르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될 거란 기대를 한 자신이 바보 아닌가? 그리드 여자 버전인 여제가 순순히 '네, 좋습니다. 동맹 맺어요'라고 할 리 없지 않은가? 단지, 최악의 악마다 도래했으니 일시적이라도 손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했을 뿐이다. 공통의 적 앞에선 손을 잡는 게 예의니까.
그 손을 잡는 걸 거부했으니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드의 선전포고를 듣고 불안에 빠진 나라들이 있으니 그들을 잘 설득할 수 있다면….
"근데, 무의미하진 않았어요."
순간, 설화가 그리 말하며 호리병 하나를 아르웬 앞에 뒀다.
"…이건 뭐야?" "흑광입니다." "흑광?" "네, 당신이 만들어 낸 것보다 더욱 순수한 흑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설화는 호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자, 맡아 보세요. 흑광 맞죠?" "으음…."
영혼마저 잠식해버릴 것 같은 이 지독하고도 달콤한 냄새. 이 세상의 모든 악의를 다 담은 것처럼 검은색 아지랑이가 입구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분명 흑광이 맞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 이상으로 진하고, 순수한 흑광이다. 냄새를 맡고 아르웬은 그리 결론을 내렸으며,
왜 이걸 여제가 줬는지 궁금했다.
“여제가 왜 이걸 줬지? 이건 귀중한 거 아니야?”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면서 선물이라고 저한테 주더라고요." "서, 선물? 이걸?" "자신에겐 잔뜩 있으니 한 병 마시라고 줬어요." "…." "자, 한 번 마셔보세요."
설화는 권유했다.
"먹어서 그리드와 동등한 힘을 얻어야죠. 그러려고 이곳에 숨어있는 거 아닌가요?" “….” “언제까지고 숨어있을 수 없어요. 놈에게 들키는 순간, 당신이 준비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테니까.” “….” “당신은 그런 걸 바라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저는 잘 압니다.”
설화의 말이 옳다.
'누구도 괴수가 되지 못했어.'
흑광을 써먹기 위해 실험을 강행했다. 사악한 악마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다 버릴 수 있는 자들이 실험에 자원했다. 그리드에게 복수할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당당하게 흑광을 들이켰다.
들이키고, 다 죽었다. 흑광을 복용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몸이 터져 죽었다.
다량으로 복용한 아르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지만,
'나도 되지 못했어.'
괴수로 변하지 못했다. 괴수를 연상케 하는 검은 그림자가 동굴 전체를 감싸도 그것이 실체화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흑광을 먹고 도전했으나, 땀만 거하게 뺐을 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문헌대로 재료를 다 구했고, 문헌대로 제조했으며, 문헌대로 강렬한 열망을 가진 자들이 복용했다. 성공할 조건을 다 갖췄다.
그랬는데, 왜 실패하는 걸까? 그리드는 되고 왜 자신은 안 되는 걸까? 무엇인 결정적인 역할을 했길래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을까?
이렇게 계속 실패만 하고 있으니 아르웬이 저절로 호리병에 손이 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할 거다.
"자, 마시세요."
설화는 권유했다.
"이걸 마시면 분명 당신이 바라는 걸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 "진짜예요, 이걸 마신 여제의 친위대가 괴수로 변하는 모습을 봤다고요." "…." "괴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복수하고 싶은 게 당신 소망 아니었나요?"
설화의 말대로 아르웬은 복수를 원한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죽이고, 언니를 납치한 그 남자를 죽이고 싶어 했잖아요."
자신의 일상을 파괴한 그리드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재산 다 털어가며 철선을 끌어모았잖아요. 동지들도 모았잖아요."
복수하기 위해 철선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만들었다. 복수하기 위해 자신과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자들을 끌어모았다. 복수하기 위해 제1 왕녀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그 지지 덕분에 지원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수많은 동지를 납치하고 있다 하나, 아르웬은 복수를 주저할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악마의 심장에 송곳니를 박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걸 아르웬은 알고 있다. 철선이 있어도, 동지들이 많아도, 뒤에서 확실하게 밀어주는 존재가 있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마셔야 하지 않을까요? 복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바치겠다고 했잖아요."
그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이 흑광을 마셔야만 한다.
설화라는 구미호가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모른다 해도 말이다.
'이 녀석의 정체는 뭘까?'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태도를 보이는 여자. 본인 말로는 동족과 언니를 노예로 만든 그리드를 용서할 수 없으니 같이 복수하자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뜻이 같으니 손을 잡긴 했으나,
정말로 믿어도 되는 걸까? 그리드만큼이나 이 여자도 위험하다고 아르웬은 그리 생각했다. 육체적으로 몸을 섞는 관계라 해도 말이다.
이유는 모른다. 단지, 이 구미호는 위험하다는 경고를 마음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을 뿐. 무슨 이유로 울리는지도 아르웬은 몰랐다.
그래도….
'설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눈앞의 재앙부터 처리해야 한다. 그리드를 반드시 쓰러뜨려야 한다. 쓰러뜨리고 가족들의 원한을, 녀석에게 당한 모든 이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이게 악마의 덫이라고 해도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아, 맞아. 그리고…."
설화는 다른 소식도 전해줬다.
"당신한테 좋은 소식이 있어요." "소식?" "네."
설화는 입을 열었고,
"그 말…사실이야?"
아르웬은 의심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노려봤으며,
"네, 사실이에요. 확인하고 싶다면 직접 그 섬에 가보세요."
설화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
더는 망설일 수 없다. 가서 확인하자. 만약 그리드가 막아선다면 이 힘으로 녀석을 없애리라. 결심을 굳힌 아르웬은 바로 호리병을 들이켰다.
'후후후, 잘 마셔.'
옆에서 이를 지켜보며 설화는 웃었다.
'나를 위해서 말이야.'
"아아, 아아아악!"
아르웬의 비명과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가 그녀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그 직후,
-콰가가가강!
동굴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