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7 - 127화- 여비서는 걸단을 내렸습니다
'그리드를 감시해라. 그것이 너의 임무다.'
해적 함대 <더 퀸즈>가 결성되기 한참 전. 아직 아트리아가 일개 시녀에 불과했던 시절. 영주는 아트리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나한테 보고해라.'
언뜻 보면 아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머지, 행여 누군가가 해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린 거라고 볼지도 모른다. 지나친 사랑이 감시라는 이름의 독으로 변질했다, 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자기 자식들의 숨통을 죄는 부모들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영주는 그런 마음으로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린 게 아니다.
'놈이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철저하게 감시해라. 어미년한테 가지 못하게 막고.'
영주가 그리드를 감시하는 이유는 하나.
쓸모가 있으니까.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그런 도구가 외부로 도망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명색이 후계자인 거지꼴로 사는 어미 곁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더욱 용납할 수 없다.
그리드가 괴물이 될 때까지, 그 그리드가 자신의 꼭두각시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녀석을 고립해라.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게, 어떤 희망도 품지 못하게, 오직 절망만 존재한다는 현실을 깨닫게 해라. 절망하고 굴복하는 것만이 녀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는 걸 깨닫게 해줘라. 필요하다면 피를 봐도 상관없다.
영주는 진짜로 그런 명령을 내렸으며,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쭉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아트리아는 영주를 배신하고 그리드에게 모든 걸 고백했다.
'망가져 가는 당신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라는 게 배신의 이유였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저는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아트리아의 어머니도 전 영주를 따르던 충신이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 은혜를 갚는 건 당연하다. 당연한 일이기에 영주의 더러운 일도 할 수 있다, 어머니는 그리 말했다.
그렇게 말했던 어머니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벌이라는 명분으로 괴수화 실험체에 이용당했다. 그곳에서 아트리아의 어머니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주는 그걸 어린 아트리아에게 보여줬고, 자신의 명을 수행하지 못하면 이 꼴이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아트리아의 마음속에 영주에 대한 충성심은 사라졌다. 어머니를 처참하게 죽인 복수심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고작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해서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처참하게 죽인 영주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억울하게 돌아간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 복수를 그리드와 손을 잡으면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아트리아는 확신했다.
그리드 역시 친아비를 죽이고 싶다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충성의 증거로 당신에게 몸을 바치겠나이다. 그러니 제 믿음을 의심치 말아 주소서.'
그런 그리드와 손을 잡기 위해 아트리아는 알몸으로 도게자를 했고,
'호옥, 호오옥, 호오오오옥!'
배불뚝이가 될 때까지 아트리아는 그리드에게 겁탈당했다.
●●●
그로부터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시신은 양지바른 곳에 묻어." "네."
복도에서 아트리아는 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사는 바퀴 달린 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수레 안에는 피비린내가 잔뜩 풍겨왔으며,
생기를 잃어버린 어느 여인의 시신이 담겨 있었다. 목이 뒤로 확 꺾인 여성의 표정에는 경악도, 분노도, 놀람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말을 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
아마도 그리드에게 쓴소리를 날리다가 살해당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선 그런 표정을 지은 채 죽을 리 없을 테니까.
"하아…."
이걸로 도대체 몇 번째일까? 언제 이 광기 어린 살육이 끝날까? 아트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
이제 멈춰주면 안 될까요? 당신이 가장 증오하던 영주는 죽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역으로 당신 탓이라고 추하게 굴다가 목이 산채로 뽑혀 나갔어요.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에 걸맞게 앙상한 뼈가 남을 때까지 시신을 광장에 내걸었어요. 그때만큼 기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어요. 어머니의 억울함을 드디어 풀어서 너무나 좋았어요.
당신을 조롱하고 멸시하던 마을 사람들도 다 죽였어요. 살아남은 자들은 실험체로 전락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희생된 사람들처럼 그들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전락할 겁니다.
당신을 무시하던 친족, 아니 친족이란 이름의 쓰레기들도 다 죽였어요.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매달린 자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죽였죠. 당신의 새어머니와 두 누나를 살린 건 의외였지만, 그대로 놔두진 않겠죠. 그 세 사람에게도 청산할 수 없는 앙금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당신의 복수는 마무리되었습니다. 당신을 핍박하던 자들은 전부 파멸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도 당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 겁니다. 그러니 이제 피의 복수를 할 필요가 없어요.
필요가 없는데, 왜 자꾸 살육을 저지르는 겁니까? 왜 자꾸 손에 피를 묻히는 겁니까? 어째서 기분이 수틀린다는 이유로 죄다 죽여버리려고 하는 겁니까? 왜 전 영주처럼 닮아가는 거죠?
점점 광기가 극에 달하는 그리드의 모습에 아트리아는 너무나 걱정되었다. 이제 복수는 끝났는데, 더는 죽일 사람도 없는데, 왜 이 세상을 불태우고 싶어 하는 걸까?
"세상을 불태운다니, 그게 말이 돼?"
복수를 끝낸 그리드는 선언했다.
이 세상을 불태우겠다고.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이 세상을 완전히 끝장을 내겠다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여자는 살리지만, 반항하면 예외는 없다고 그리 선언했다.
그 목적을 위해 그리드는 남부에 있는 모든 섬을 침공했다. 전부 불태우고, 전부 몰살했다.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는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살아남은 자들 중 남자는 무조건 죽이고, 여자는 무조건 씨받이로 삼았다.
그리드의 폭주를 막기 위해 남부에 사는 모든 귀족이 힘을 합쳤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대항한 대가로 그들이 그동안 가꿔놓은 영지가 황무지로 전락하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그리드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병사를 생산하는 씨받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리스와 그녀의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서 싸웠으나, 그 대가로 영지는 병사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전락했고, 평생 그리드를 위한 병사를 생산하는 씨받이가 되라는 종신형이 내려졌다.
멀쩡했던 남부를 그리드는 생지옥으로 바꿔버렸다.
그 뒤로도 그리드는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살육을 저질렀다. 끊임없이 사람들의 터전을 짓밟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희망을 부숴버렸으며, 끊임없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닥치는 대로 다 죽였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거슬리는 자들은, 자신에게 항변하는 자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음 선사했다.
조금 전에 수레에 실려 나갔던 죽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섬을 다스리던 영주였으며, 자신의 영지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드에게 항복했다. 항복의 조건으로 자신의 몸을 내주기로 했다.
그랬던 그녀가 죽은 걸 보면 또 수틀리는 일이 벌어졌다고 봐야 할 거다. 아마 분노한 주인님이 영지를 초토화하라고 지시를 내리겠지.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저질러야 한다는 사실에 아트리아는 앞날이 캄캄했다.
'이제 복수는 끝났는데….'
원수였던 자들은 다 죽었는데, 왜 멈추지 않는 걸까? 제국을 세운다고 하나, 실상은 세상을 불바다로 만드는 걸 즐기는 것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렇게 계속 가다간 파멸뿐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알면서도 이러는 걸까?
"…."
수심에 잠긴 아트리아는 왼손에 쥔 책에 시선을 옮겼다.
<영혼 소환식>. 다른 세계의 영혼을 불러들여 이 세계의 육신에 정착시킨다. 그런 주문이 이 책에 적혀 있었다.
그 주문을 아트리아는 그리드에게 쓸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둘 순 없어.'
지금 주인님은, 그리드는 정상이 아니다. 복수심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인간임을 포기한 도살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의 피눈물을 흘리게 했고, 수많은 사람의 증오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주인님을 따르는 자들 역시 수많은 사람의 증오심을 받게 되었다. 만약 주인님이 모종의 이유로 죽어버린다면 남은 사람들은 어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일을 행해야 한다. 주인님의 영혼을 파괴하고, 새로운 영혼을 주입해야 한다. 소환된 영혼이 어떤 놈인지 몰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처럼 만들지 않도록 유도하자. 살육에 매몰되지 않은 존재로, 우리를 위한 폭군으로 성장시키자. 끝까지 그자를 남이 아닌 주인으로 받들어 모시자. 영혼이 바뀌어도 주인은 주인이니까.
그런 생각이 든 아트리아였으나,
'진짜로 이래도 될까?'
정말로 자신은 주인님을 공격할 수 있을까? 영원히 충성을 맹세한 몸이 이런 짓을 하는 게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주인님의 폭주를 막겠다는 명분만 내세워 주인님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게 타당한가? 차라리 목숨을 걸고 말로 주인님을 간곡하게 설득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있었으나,
"…."
순간, 아트리아는 떠올렸다.
-한 번 더 그딴 소리 지껄여 봐.
이제 그만하자고, 이제 정신 좀 차리라고 하소연하던 자신을 향해 죽일 기세로 노려보던 주인님의 시선을.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자신이 하는 일에 또 태클을 걸면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한 모습을 아트리아는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주인님이 걱정되어서 충언을 올린 것에 불과한데, 그게 왜 거슬린다는 건가? 고작 그런 이유로 살해당해야 한단 말인가? 충성을 바친 대가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처럼?
아트리아는 그런 죽음을 원해서 그리드를 따르는 게 아니었다.
그리드라면 다를 줄 알았으니까. 그리드라면 전 영주와 다를 줄 알았으니까. 무심하게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이지 않을 줄 알았으니까. 똑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자신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리드는 망할 영주와 닮아가고 있다. 이대로 두면 모두가 파멸하는 건 시간문제다. 이 세상의 적이 되어버린 시국에서 구심점이 되어줘야 할 자가 여전히 피에 미쳐있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그래 하자."
기회가 오면 하자. 이젠 망설일 이유는 없다. 망설였다면 모두 다 죽는다. 그리드도 죽을 거고 아트리아 역시 죽을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면….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행해야 한다.
그리드의 폭주를 막기 위해 아트리아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드는 여우섬을 정복했다. 구미호족 수장인 수아를 그리드는 먹을 생각이었으며, 그런 그리드에게 수아는 맹독을 먹였다.
바로 그날, 아트리아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