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124화 (125/344)

Chapter 124 - 124화- 머릿속에 들린 목소리의 정체는?

트루퍼들은 겁에 질렸다.

원래대로라면 겁에 질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전 영주가 그렇게 하도록 개조했으니까.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동요하지 않도록 감정을 최대한 절제시켰으니까. 감정이 절제되었기에 회색 향유고래 무리는 어떤 일이든 다 처리할 수 있었다. 눈앞에 동료들이 죽어 나간다 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만나도 그들은 단 한 번도 표정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로봇이자 인형. 전 영주가 그토록 원하던 전투 병기임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만약 전 영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크게 기뻐했을 거다.

그렇게 증명된 트루퍼들이 동요하고 있다. 당장 도망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 있었다.

-우오오오옥!

그들 눈앞에는 괴물이 있었다. 곤충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 갑주와 검은색 피부를 가진 괴물. 이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트루퍼들은 몰랐다.

단지, 난데없이 섬에서 뛰쳐나왔다는 것. 무지막지한 힘으로 자신들을 농락하다가 난데없이 멈춰버렸다는 것. 그걸 기회로 삼아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부었다는 것.

그리고,

난데없이 부활해서 무리에게 공포를 심어줬다는 것. 그것이 트루퍼들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우오오오옥!

부활한 검은 괴물은 트루퍼들을 하나, 둘씩 살해하고 있다. 마력포를 난사해도 괴물은 빠르게 회피하고, 접근하여 트루퍼들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으깨버렸다. 머리가 으깨진 트루퍼들은 목숨 줄이 끊긴 물고기처럼 몸이 휘어진 상태로 바닷속을 유영했다.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밀릴 줄은 트루퍼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선전했다. 비록 검은색 괴물의 습격으로 다수의 동료가 희생되었으나, 괴물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자 트루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제히 마력포를 쏟아부어 괴물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걸레짝으로 만들었음에도 검은 괴물은 멀쩡했다. 한쪽 팔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여기서 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정말로 큰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마력포는 마구 쏘느라 더는 쓰기가 힘드니 물리적 타격으로 끝장내자고. 그래서 트루퍼들은 박치기로 검은색 괴물을 공격했다. 한꺼번에 우르르 몰고 갔다간 자칫 같은 동료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기에 한 마리씩 차례대로 나서서 박치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박치기를 하면서 마력을 충전할 시간을 번다. 다 벌고 나면 마력포 일제 사격으로 괴물을 끝장낸다. 그것이 트루퍼 무리의 계획이었다.

검은 괴물이 난데없이 부활하지만 않았다면 그 계획은 성공으로 끝났을 거다.

-우오오오옥!

시체나 다름없었던 검은 괴물이 왜 부활했는지 트루퍼들은 몰랐다. 단지 한 거라곤 치사량에 가까울 정도로 무자비하게 난타했다는 것 정도다. 오히려 그렇게 난타당했으니 반쯤 죽어 있어야 정상이다.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 괴물이 어째서 움직이는 걸까? 어째서 포효를 지르며 자신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걸까? 대체 무슨 힘이 생겼길래 남은 한쪽 팔만으로도 자신들을 두부 썰 듯이 쪼갤 수 있는 걸까? 트루퍼들은 너무나 당혹스러웠으며,

악귀가 되어 자신들을 죽이고 다니는 검은 괴물의 모습에 잔뜩 겁에 질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다르다. 아까 상대했던 그 모습과 너무 다르다. 뭔가 달라졌다. 처음 상대할 때는 조급하다는 사실을 트루퍼들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조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거라곤,

자신들을 향한 끊임없는 적의. 자신들을 없애고 싶어 하는 적의. 그런 적의가 검은 괴물의 눈동자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광기라는 이름의 불이 눈동자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다는 걸 트루퍼들은 알 수 있었다.

그걸 알게 되었기에 트루퍼들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전투 병기로 개조되었기에 두려움 따윈 느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그들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감히 고개를 뻣뻣하게 드는 것도 죄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절대로 대적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하찮은 미물 따위가 미물을 창조한 자와 싸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본능적으로 트루퍼 무리는 검은 괴물은 자신들보다 그 위에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깨달았기에, 그들은 도주하려고 했으나,

-우오오오옥!

괴물은 놓치지 않았다. 자신을 실컷 괴롭힌 주제에 꽁무니를 빼는 향유고래들을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얻어맞은 것처럼 갚아줄 거다. 얻어맞은 것 이상으로 몇억 배 갚아줄 거다. 당하면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는 게 세상의 도리니까.

그게 도리이거늘, 먼저 친 주제에 겁이 난다는 이유로 도주하는 걸 가만히 둘 것 같나? 절대로 놔두지 않을 거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남김없이 다 죽일 거다.

다시 일어선 검은색 괴물, 강림은 그리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했기 때문이었을까?

-우오오오옥!

어마어마한 속도와 힘으로 트루퍼 무리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옥!

눈동자째로 머리를 꿰뚫어 버리고,

뱃가죽을 뜯어내 내장을 쏟게 하고,

머리와 몸통을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뜯어버리고,

죽은 녀석들의 시체를 몽둥이처럼 있는 힘껏 휘두르며 강림은 트루퍼 무리를 죽였다.

자신이 있는 바닷속에 핏물로 넘쳐흐를 때까지. 녀석들의 살점으로 넘쳐흐를 때까지 강림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주먹을 휘두르며, 계속 찢어대고, 계속 짓밟았다. 멀리 도망가는 녀석들이 있다면 하울링을 써서 원자 단위로 분해해버렸다.

도저히 일시적으로 힘을 회복한 몸으로 저질렀다기에는 전적이 너무나 화려했다.

‘자자, 어서 오라고, 이 망할 것들아.’

강림은 입에서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아까 보여준 패기는 어디로 갔냐, 어서 와서 덤비라고!’

얼른 덤벼라. 도망가지 말고 어서 덤벼라. 이쪽은 싸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너희들은 왜 도망가냐? 먼저 싸움을 건 주제에 도망을 치다니. 전형적인 깡패들이구나.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하며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면서, 막상 자신보다 강한 녀석을 만나면 꼬리를 내리는 깡패. 항상 잘못되면 언제나 남 탓을 하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깡패.

그런 깡패들에게 놔둘 것 같나? 다시는 횡포를 부리지 못 하게 해주마. 사이좋게 저승길로 보내주마. 사이좋게 네놈들이 좋아하는 주인 곁으로 보내주마.

놈들의 머리를 손으로 으깰수록. 으깨면서 나오는 핏방울이 실시간으로 수면 위로 올라갈수록. 놈들의 아가리를 손으로 뜯어낼수록. 놈들의 뱃가죽을 갈가리 찢어버릴수록.

강림은 점점 흥분했다. 폭력이란 이름의 쾌락에 점점 길들어지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옥!

그렇게 트루퍼란 트루퍼는 모조리 다 학살한 강림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수면 위로 올라온 강림은 곳곳에 둥둥 떠다니는 트루퍼들의 유해를 보고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기기 힘들 거라 여겼던 싸움이 상상 이상으로 쉽게 풀렸고, 덕분에 강림은 모두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림은 이대로 끝내기가 아쉬웠다.

'더 없나? 더 때려죽일 녀석은 없나?'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 아쉽다. 더 하고 싶다. 더 죽이고 싶다. 살아남은 고래 새끼는 없나? 아니면 새끼라도 찾아서 죽이고 싶은데. 감히 자신과 자신의 여자들을 건드렸으니 자식들도 연좌제를 적용할 거다. 아무리 애원해도 받아주지 않을 거고, 형이 결정되면 다 사형을 집행할 거다.

그러니 찾자. 찾아서….

[…아.]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순간, 강림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보였다.

보라색 머리의 여비서, 아트리아가 보였다. 남색 머리의 여제독, 카르디안이 보였다. 살아남은 자신의 자식들과 간부들이 보였다. 다들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치 악마를 보는 것처럼 그들의 눈동자에는 공포심이 담겨 있었다.

‘미친, 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해버린 거지?’

그들을 보자 강림은 제정신을 차렸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강림아.'

강림은 숨을 고르며 태세를 정비했다.

‘내가 싸운 건 내 여자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여자들까지 죽일 마음 따윈 없었어.’

저들로부터 이 망할 고래 새끼들을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이루었으니 돌아가는 게 정상이다. 그 정상에서 벗어나는 짓을 하려 했다니. 만약 이성을 되찾지 못한 채 살육만 일삼았다면 강림은 그리드처럼 되었을지도 모른다.

살육에 미쳐버린 그 쓰레기와 똑같아졌을 거다.

-고작 저런 것들을 보고 멈추다니, 대단하군.

이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강림의 머릿속에 들리는 남자의 말투에는 한심스럽다는 감정이 남아 있었다.

-역시 네놈은 나처럼 될 자격은 없나 보군. 하아, 대체 어쩌다가 이딴 놈에게 육신을 빼앗긴 건지….

'너, 넌 누구야?'

강림은 물었다.

'누구인데 내 머릿속에 속닥거리는 거지?'

도움을 준 것에는 감사히 여긴다. 목소리가 알려준 대로 하지 않았다면 강림은 정말로 저세상으로 갔을 거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강림은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했으나,

신뢰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이 남자의 목소리를 동료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인정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강림은 본능적으로 그리 판단했다.

왜냐하면 지금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강림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아까는 향유고래들에게 난타당하느라 생각할 틈이 없었으나, 지금 자세히 들어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기에 강림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 멋대로 몸을 차지한 새끼가 감히 그딴 말을 하냐?

남자는 강림을 크게 꾸짖었다. 당장이라고 목에 칼을 겨누는 것 같은 느낌에 강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같아선 당장 찢어 죽이고 싶지만….

'….'

-유감스럽게도 할 수 없지.

목소리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나는 찌꺼기에 불과하니까. 내 몸을 다시 차지해도 얼마 못 가 죽을 테니까.

‘….’

-그러니 짜증이 나도 참아야지. 여기서 성을 내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그렇게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던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나중에 보자꾸나, 애송아.

사라지면서 남자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부디 나랑 다른 길을 걷겠다는 맹세를 지키길 바란다.

‘….’

-안 지키면 같이 지옥으로 끌고 갈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사라졌다.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강림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너무 긴장한 나머지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어, 어째서 녀석이…주, 죽은 거 아니었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아트리아가 분명 죽었다고 했을 텐데. 자신이 이 몸으로 빙의된 순간, 그 녀석의 목숨은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혹시 사념인가? 아까 녀석이 말한 찌꺼기란 발언을 생각하면 그쪽이 아닐까? 하지만 녀석은 권모술수의 달인이다. 찌꺼기라는 표현을 이용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녀석의 영혼이 사라진 게 아니라 아직도 남아 있는 거라면? 남아서 몸에 봉인되어 있을 뿐이라면? 그 봉인이 깨져서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것이라면 어찌 될까?

강림은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트리아와 얘기를 나눠봐야겠어.'

아트리아라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다짐한 강림은 지친 몸을 이끌고 섬을 향해 헤엄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