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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123화 (124/344)

Chapter 123 - 123화- 강림에게 있어 가장 화가 날 상황은?

[으아아아악!]

계속 난타당한다. 끊임없이 난타당한다. 온갖 방향에서 날아오는 마력포에 검은색 괴물은 조금씩 너덜너덜해졌다.

갑주가 떨어져 나가고, 신체 곳곳에서 탄 냄새가 피어오른다. 등 뒤에 달린 아홉 개의 촉수는 두 개를 빼고 전부 타버렸으며, 오른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고깃덩어리만 부어올라 있었다.

정복 전쟁에서 무적을 자랑했던 검은 괴물은 점점 보기 흉한 걸레짝이 되어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걸 알고 있음에도 강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단 말이야! 강림이 그렇게 다그쳐도 괴물의 육신은 움직일 생각조차 없었다. 향유고래, 트루퍼 무리가 쏘는 마력포에 무력하게 당할 뿐, 그 이상의 행동은 전혀 하질 않았다.

동력원을 가동하지 않는 한, 동력원에 쓰일 여자들을 삼키지 않는 한 검은색 괴물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머지않아 고래 무리에게 뜯어먹히게 될 거다.

'이럴 때 기적이라도 일어나면 안 되나!'

가끔 애니메이션을 보면 이런 내용이 종종 있다. 기동이 정지되어 움직일 리 없던 로봇이 기적처럼 움직여서 주인공을 구해주는 전개. 대체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지 궁금하던 그런 전개가 현실에서도 일어나기를 강림은 원했으나,

-콰아아아앙!

현실은 시궁창이다. 기적 따윈 없다. 냉혹한 사실만 있을 뿐. 창작에서 허용되는 기적이 여기서 발휘되는 일은 없었다. 끊임없이 쏘아대는 마력포에 가루가 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으으으….]

어느 순간, 공격이 중단되었다. 간신히 숨을 고를 기회를 얻은 강림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왼팔이 허전해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

없다. 왼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깻죽지까지 깔끔하게 사라졌다. 어깨 단면에는 탄 냄새가 피어올랐다.

'제기랄….'

인간으로 돌아가면 어찌 될까? 괴물로 변신했을 때 입은 부상 대로 돌아올까? 아니면 멀쩡한 상태로 돌아올까? 되도록 후자면 좋겠는데. 만약 살아남아도 영원히 불구로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강림은 걱정했지만, 그런 걱정에 휩싸일 때가 아니었다.

[크윽?]

상황을 지켜보던 크루퍼 무리 중 한 마디로 돌진했다. 박치기로 강림의 몸을 강타했다. 강림은 힘없이 날아갔으며,

[으윽?]

반대편에 있던 또 다른 크루퍼가 박치기로 강림의 등을 강타했다.

이어서 다른 놈이 박치기를,

또 이어서 다른 놈이 박치기를.

다음으로 또 다른 놈이 박치기를.

다음으로, 다음으로, 다음으로, 다음으로, 다음으로.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듯이 크루퍼들은 차례대로 돌아가며 박치기를 가했다. 그 박치기에 강림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검은색 피를 울컥 토해내도 강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어떻게든 움직여야 해!'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고작 이런 곳에서 어처구니없이 배드 엔딩을 맞이할 수 없으며, 페이크 보스로 전락할 순 없다.

지금까지 잘 난관을 헤쳐왔는데. 해쳐온 끝에 제국을 설립하고, 그리드 배드 엔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자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노예로 삼았는데. 그렇게 해서 해피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는데.

고작 이런 고래 새끼들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고? 이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놈들 때문에 지금까지 이룬 탑을 허망하게 무너뜨릴 순 없다.

그러니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라.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움직여다오. 몇 분이라도 좋으니 제발 이 새끼들을 박살 낼 기회 좀 다오. 그렇게 강림이 애원해도 검은 괴물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분노해라.

'…어?'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그 괴물은 강렬한 감정으로 움직인다.

-분노, 원한, 복수심. 상대방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찬 감정만이 괴물을 움직일 수 있다. 성욕은 그 감정을 대체할 수 있는 원동력이지.

-여자를 먹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그 감정을 떠올려라. 그 감정을 태워라. 그러면 이길 수 있을 거다.

'누, 누구야, 이 목소리는….'

난데없이 들린 남성의 목소리에 강림은 깜짝 놀랐다. 분명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오긴 하나, 대체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걸까? 사방팔방이 회색 향유고래들 말곤 없는데. 그리고,

어째 이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소름이 돋는 걸까? 계속 들으면 이 목소리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무엇보다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

당장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강림은 바로 부정했다.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어.'

아트리아가 직접 말했다. 그 새끼는 수아에게 독살당할 뻔했던 그때 죽었다고. 죽었기 때문에 정강림이 육신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사실상 녀석은 사라진 거나 다름없다고.

그놈이 살아있을 리가 없다. 아니, 살아 있어서도 안 된다. 살아 있다면 녀석에게 모든 걸 빼앗….

[크윽?]

또다시 눈앞이 환해진다. 눈살을 찌푸린 강림은 뒤이어 날아온 수많은 빛기둥에 난타당했다. 박치기가 질렸는지 크루퍼들이 또다시 마력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마력포 난타에 강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 젠장….'

역시 따를 수밖에 없는 건가? 녀석이 왜 그런 말을 남긴 건지 의문이나, 할 수밖에 없다. 놈이 말하는 대로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확 끌어올릴 수 있을까? 강림은 빨리 머리를 굴렸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부정적인 감정. 분노와 원망을 한꺼번에 토해낼 수 있는 감정이 뭔지 찾아 헤맸다.

헤맨 끝에 후보자들이 떠올랐다.

'썩을 부모 새끼에 대한 거?'

당장 떠오르는 원망의 대상은 그놈들이다. 그놈들은 자신의 꿈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짓밟았고, 자신을 단순히 현금 인출기로만 여겼다. 그런 놈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현실에 강림은 항상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이 썩을 새끼들에게 원망 어린 목소리를 토해내도 괴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망할 상사에 대한 거?'

부모 다음으로 원망스러운 녀석이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항상 나를 보면 짜증 내는 쓰레기 년.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하다. 그 쓰레기 년을 토막을 내는 모습을 상상해도 괴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면 착한 척하면서 은근슬쩍 내 돈 다 써먹었던 여자는?’

아니, 그건 더더욱 부족하다. 그 여자는 짜증 나기는 해도 화딱지가 날 정도로 원망스러운 대상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뭘 떠올려야 하나. 뭘 떠올려야 이 망할 괴물 몸뚱이를 다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 한정된 대상으로도 안 되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차라리 원망할 대상을 찾는 것보다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떠오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강림에게 있어 가장 분노할 수 있는 상황은….

[아….]

그렇게 머리를 굴리다가 강림은 깨달았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장면이 무엇인지.

‘그래, 그거라면….’

강림은 원한다. 이 일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자신의 여자들과 매일 떡을 치면서 사는 일상이 계속되기를. 영원히 계속되기를 원한다. 계속되기를 원하기에,

자신의 여자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 만약 아트리아를 비롯해 자신이 안은 여자들이 죽어버리면, 단 한 명의 여자라도 죽어버리면,

완전히 뚜껑이 열릴 거다.

그리고,

이미 건물이 붕괴하면서 자신이 안은 여자들 일부도 사망했다. 중태에 빠진 여자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화딱지가 날 조건은 이미 충족한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꺼졌던 괴물의 검은색 안광에서 빛이 났다.

‘그래,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여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 그리드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여자들도 그런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두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일어나고 말았다. 지키지 못했다. 단역이라고는 해도, 이름 모를 여자들이라고 해도 죽게 내버려 두기 싫었다.

그 여자들을 죽인 고래 새끼들이 눈앞에 있다.

그렇다면, 해야 하는 일은 하나뿐이다.

-우오오오옥!

석상처럼 굳어 있던 검은색 괴물은 포효했다. 황제의 포효에 강림을 갖고 놀던 크루퍼들은 일제히 얼어붙었다. 오직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 말곤 어떤 감정도 늘어놓지 않던 고래들의 얼굴에서 난생처음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포. 개조된 이후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공포라는 감정이 크루퍼 무리 사이로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좋아, 됐어!]

얼마나 움직일지 모르겠지만, 이걸로 역전할 수 있을 거다! 반격할 기회를 얻은 강림은 덜덜 떨고 있는 크루퍼 무리를 주시했다.

‘아까 날 많이 괴롭혔지?’

그렇게 괴롭힌 주제에 왜 그렇게 떨고 있냐? 너희들 전투 병기잖아? 병기라면 병기답게 무표정을 지어야지. 왜 그리 떨고 있어? 자식들보다 더 못한 놈들이네. 실컷 괴롭힌 주제에 막상 두들겨 맞을 것 같으니까 겁나니? 이제부터, 앞으로도 더는 겁나지 않게 해줄게. 죽인 여자들 몫까지 잘근잘근 밟아줄게.

‘사이좋게 다 묻어주마.’

겁을 먹은 크루퍼 무리를 향해 강림은 쇄도했다.

푸른 바다가 검붉은 바다로 변하기까지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

“상황은?”

간신히 건물에서 빠져나온 카르디안은 물었다. 현재 그녀는 해안가에 나와 있다. 머리는 피로 물든 붕대가 감겨 있으며, 발이 불편한 지 주변에 있던 창 하나를 목발로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괴물들이 있는 바닷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장교 한 명이 그리 대답했다. 그녀도 건물 붕괴에 휘말리는 바람에 한쪽 팔이 부러지고 말았으며, 응급조치로 부목을 한 상태였다.

“그 뒤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배는?” “한 척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카르디안은 분한 듯 주먹을 손바닥에 쳤다.

“가서 도와줘야 하는데….” “어떻게 도와주게?”

카르디안의 말에 아트리아가 반박했다. 그녀 역시 건물 붕괴에 휘말렸기에 엉망진창이었다. 전신이 붕대에 감겨 있으며, 피가 물들지 않은 부위를 찾기가 힘들었다.

“가봤자 짐만 될 뿐이야. 우리가 할 일은 병력을 재수습하는 것뿐이고.” “으….”

그 말에 카르디안은 반박하지 못했다. 여비서의 말대로 싸움에 끼어드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똑같이 괴수가 되지 않는 한 주인님의 싸움에 끼어들 자격은 없었다.

카르디안도, 아트리아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다. 발만 동동 구르며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서 생존자들을 모으자. 그런 다음…음?”

이때, 아트리아는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강림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바다. 아트리아의 시선에 따라 카르디안도 시선을 돌렸고,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이건….”

빨간색이다. 푸른 바다가 빨갛게 물들어지고 있다. 빨갛게 물들어진 수면 위로 회색 향유고래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어떤 녀석은 머리가 박살 난 채로. 어떤 녀석은 몸이 두 동강이 난 채로. 어떤 녀석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채로 떠올랐다. 한두 마리가 아닌, 수백 마리의 고래시체가 바다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둥둥 떠오른 시신들 가운데서 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오오오오옥!

승리를 자축하듯이 검은 괴물은 크게 포효했다. 포효하는 소리에 겁을 먹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트리아와 카르디안처럼 크게 안도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이, 이겼다. 이겼다고!’

검은 괴물, 강림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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