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 - 108화- 썩을 영주가 남긴 기록
아이스 섬 지하에 있는 금고 문을 열었을 때 강림이 먼저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보물섬. 위대한 대해적이 남긴 보물로 세워진 섬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금고 안은 금빛과 은빛으로 번쩍거렸다. 대체 얼마나 많은 금화와 은화를 모았다면 지하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번쩍거릴 수 있는 걸까? 천장까지 쌓여있는 금은보화에 강림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런 금고가 두 개 더 있다. 엘프 대산림과 여기 그리드 섬에. 그 금고들 안에도 천장까지 꽉꽉 채워 넣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보물이 쌓여있을 거다.
이 보물들을 제국을 키우는 데 사용하자. 게임에서 돈을 투자하며 캐릭터들을 육성했던 방식처럼 여자들을 조교 하는 데 아낌없이 쓰자. 돈이 있다면 무엇이든 다 살 수 있는 게 세상의 법칙. 그 법칙이 여기서도 당연히 통할 거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림은 그리드 섬 지하에 있는 금고에 도착하기 전부터 막연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스 섬처럼 막대한 보물이 자신의 손에 들어올 거다.
아니, 어쩌면 보석이나 골동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페르포네도 금전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돈이 아닌 물건도 보관하는 여자니까.
과연, 어떤 보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강림은 싱글벙글한 마음으로 금고 문을 열었고,
"보물은 어디에 있냐?"
보물섬이 아닌, 난데없는 실험실이 나타나는 바람에 순간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왜 금고 안에 실험실이 있는 거야?"
강림은 옆에 서 있는 페르포네를 향해 따지듯이 물었지만,
"나, 나도 몰라."
페르포네 역시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실험 자료들도 같이 보관하고 싶다는 말만 들었지….'
금고 자체를 실험실로 개조할 줄은 페르포네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 돈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전 영주가 실험을 위해 주문한 재료들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들통났다간 국왕이 반역죄로 몰아 가문을 숙청할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으며, 거래를 통해 이 일에 연루된 자신 역시 참수당할 거라는 것도 페르포네는 알고 있었다.
이를 다 알고 있었기에 금고에 실험 자료들도 보관해달라는 전 영주의 부탁을 페르포네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금고를 여는 권한을 달라는 요구 역시 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끝장나면 너도 끝장날 거라고 영주가 협박했으니까. 이미 증거까지 다 가지고 있는 영주였기에 페르포네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영주는 이리 말했다.
돈은 손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은 실험이 중요하지, 돈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니 안심하고 아이스 섬으로 돌아가라고 지껄였다.
그랬는데, 제대로 뒤통수를 당하고 말았다.
'그냥 용병들을 고용해서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확인하러 가려 할 때마다 오지 말라고 겁박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페르포네는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뭐가 있는지 보자.”
강림은 아트리아와 페르포네를 데리고 함께 실험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돌아다니던 중, 세 사람은 커다란 마법진을 발견했다.
"이건…."
강림은 마법진을 유심히 살펴봤다.
주인이 사라졌기에 기동은 정지되었으나, 희미하게 외부와 통하는 마력의 흐름이 보였다. 이게 무슨 용도로 썼는지 강림은 바로 눈치챘다.
'통로인가.'
아무래도 그리드의 아버지는 이 마법진을 통해 몰래 금고를 이용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포네 역시 모르는 것 같다. 마법진을 보고 '왜 전이 마법진을 설치해놓다니'라며 중얼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여기서 뭘 했던 걸까?'
금은보화 대신 수많은 종이 더미가 곳곳에 쌓여있다. 현대의 과학실에서나 볼법한 도구들은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으며, 유통기한이 다 되었는지 약물들 담은 용기에선 악취가 진동했다.
실험실에는 수백 개 이상의 원통형 형태의 유리통이 가지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통 내부에는 실험으로 쓰인 호스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누가 보면 전 영주가 기계를 이용해 여자들을 능욕하며 놀았다는 것처럼 보일 거다.
썩어 문드러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이 통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거, 나도 모르는 설정인가?'
그리드의 아버지는 그리드의 손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게임에서는 딱 그 한 줄로만 끝났다. 그것 말곤 언급이 없었기에 강림은 그리드의 아버지가 막장인 아들에게 살해당한 불쌍한 놈이라는 줄 알았지, 실상은 아비 역시 최악의 막장 부모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핵폐기물인 아들처럼 무자비한 인체 실험을 이곳에서 강행했다는 사실에도 강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가 태어날 때부터 악마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진짜 악마는 따로 있었던 게 아닐까?
"주인님, 이것 좀 보세요."
이때, 아트리아가 서류 더미에서 어떤 수첩을 발견했다.
"전 영주 님이 사용하던 일기장 같습니다." "일기장? 왜 이런 곳에…."
웬 뜬금없이 일기장? 왜 이런 곳에 일기장을 놔둔 거지? 강림은 의문이 들었으나,
'맞다. 여긴 게임 속 세상이었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물건이 이런 곳에도 있을 수도 있겠다.'
간혹 게임을 하다 보면 정말 터무니도 없는 곳에 중요한 물건이 발견될 때가 있다. 절벽 위에 있거나, 아니면 카페 식탁에 놓여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돌무더기에 파묻혀 있을 때도 있다. 이를 생각하면 이 일기장 역시 그런 사례에 속한다고 봐야 할 거다.
"어디 한 번 읽어보자."
왜 금고 안이 실험실이 되었는지, 바라던 금은보화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강림은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읽으면 읽을수록 저절로 표정이 험악해졌다.
[XXX 년, X 월 X일.]
[실험체로 쓴 여자가 죽었다. 괴수화 성공이 눈앞을 두고 있었는데, 역시 쓰레기는 쓰레기인가 보다.]
[시신은 소각하고, 다음 실험체를 구하러 암시장에 가봐야겠다.]
[남부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괴수화 실험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괴수화 실험. 그리드의 아버지는 고대 문명 사람들이 괴수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 인체 실험을 강행했다. 비밀 엄수를 위해 페르포네를 속여 금고를 실험실로 개조했고, 일이 틀어지면 페르포네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내용이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천하의 <독사>를 적으로 돌리려고 하다니. 정신이 나간 건지, 아니면 미친 건지 강림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XXX 년 X 월 X일.]
[흑광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다.]
[역시 제대로 된 제조법이 없어서 그런가? 실패작들이 늘어날수록 태워야 할 쓰레기만 잔뜩 늘어난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 가문에게서 제조법을 구매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마침 경매에 내놨다고 하니 한 번 사보자.]
괴수화에 필수적인 요소는 흑광. 흑광이 있어야 사람은 괴수로 변신할 수 있다. 그 흑광을 만드는 데 자꾸만 실패하니 그리드의 아버지도 피가 말릴 수밖에 없을 거다. 따라서 다른 가문에서 내놓은 제조법을 구매하려고 시도했다.
[썩을 새끼들, 판다고 소리친 주제에 안 팔아? 어디서 하급 귀족 따위가 장난질을 쳐?]
[내 오늘 참지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 두 딸년이랑 어미년을 반드시 실험체로 삼을 거다.]
[날 분노케 한 대가가 뭔지 뼈저리게 알려줄 거다.]
하지만 제조법 구매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리드의 아버지는 크게 분노했다. 정중한 태도로 일관하던 내용이 이때를 기점으로 역변(逆變)했다. 상대방을 향한 일방적인 증오심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또 쓰레기가 늘어난다. 왜 쓰레기들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 걸까? 짜증 난다.]
[눈에 거슬린 시녀 하나를 실험체로 삼았으나, 결국 죽었다. 역시 쓰레기는 아무리 키워도 쓰레기에 불과하다.]
[금고를 노리는 쓰레기들을 붙잡았다. 여자는 실험체로, 남자는 괴수로 변하지 못한 쓰레기들의 먹이로 줘버렸다.]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무조건 쓰레기라고 부른다. 자기 말곤 나머지는 아래라고 여기는 영주의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금고 내부에 침입자가 들어올 것을 대비해 쓰레기들로 만든 괴물들을 배치했다. 내 지시가 떨어지면 바로 움직일 거다.]
[물론 놈들은 반항하지 못할 거다. 반항하는 순간, 기폭 스위치를 눌러 심장을 터트리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일회용품이다. 일주일 뒤면 자동으로 폭탄이 터지도록 조작했다. 그것도 모르고 드디어 인정을 받았다고 깔깔 웃어대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 글을 본 강림은 수많은 유리통에 담겨 있던 시신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저렇게 방치되어 있나 궁금했었는데….'
일기장 내용이 사실이라면 저 시신들은 분명 전 영주가 마련한 경비병들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영주의 협박에 구속되어 있었다면 전투가 벌어졌을 거다. 통에 남은 시신들 숫자가 수백 구 이상이고, 이들이 괴수화 실험을 통해 강해진 상태라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대가 되었을 거다.
그러기도 전에 죽었다. 돌발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것에 강림은 크게 안도하는 한편, 이토록 허술하게 경비를 세운 그리드의 아버지를 속으로 비웃었다.
적어도 다른 것을 준비했어야지, 그리고 쓸만한 놈들이라면 어떻게든 오래 살리고 봐야지. 일회용품이라고 버리는 게 말이 되나? 쓸모없는 캐릭터들도 갈기 싫어서 창고에 썩히는 강림에게 있어서 전 영주의 방식은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강림은 얼른 다음 페이지를 읽었다.
'페르포네 표정이 왜 저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얼굴로 일기장을 보는 페르포네. 강림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별문제 아니라 여기고 다시 일기장에 집중했다.
[그리드 녀석에게 약을 먹였다.]
다음은 그리드에 관한 내용이었다.
[녀석은 괴수화에 적합한 육신을 가졌다. 후계자 문제가 아니었다면 당장에 어미랑 같이 실험체로 써먹을 거다.]
[치사량에 가까운 약을 먹여도 멀쩡한 걸 보니 녀석을 괴수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진짜로 괴수의 힘을 쓸 수 있는지 계속 몰아붙이자. 살수들을 고용해 계속 싸움을 붙이자.]
막장 아버지답게 그리드를 친아들이 아닌, 실험체 중 하나로 여겼다. 사생아라고는 하나,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나? 아들을 괴수로 만들기 위해 살수들을 고용하다니. 아들을 남처럼 취급하는 내용에 일기장을 쥔 강림의 손이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흑광을 완성했다. 진짜로 완성했는지 모르겠지만, 약물에서 넘쳐흐르는 기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공했다.]
[이제 이 약을 그리드에게 먹이자. 먹여서 괴수가 된다면 포획하고, 가공하자.]
[괴수를 손에 넣었으니 이 남부를 지배하는 건 바로 내가 될 거다.]
[아예 왕국도 엎어버리자.]
[엎고 나만의 왕국을 세우자.]
[세우고 나면 내 아내와 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들이 될 거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거기까지가 일기장에 적힌 내용이었다.
"…."
강림은 아무 말 없이 일기장을 내려놓은 다음,
"후우…."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썩을 새끼가…."
이따위 짓을 하는 놈이 영주라고? 그리드를 학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구린내가 나더니만, 정말 구제 불능이었네. 이런 구제 불능이었기에 아들 역시 구제 불능이었던 건가? 진짜 만악의 근원은 그리드가 아니라 이 새끼라고 봐야 한다. 도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되었으면 끔찍한 짓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건가? 사이코패스인가?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 나는 괜찮아."
아트리아가 걱정된다는 듯이 묻자 강림은 괜찮다는 듯이 답했다.
"그보다 병사들을 불러야겠어. 이 안에 있는 자료 전부 탈리아에게 보내자."
짜증 나는 놈이지만, 녀석의 유산을 버릴 수는 없다. 괴수화를 위해 필요한 지식이 다 있을 테니 다 쓸어 담자. 다 쓸어 담아서 탈리아에게 보내자. 그러면 탈리아도 흑광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거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강림은 그리 지시를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보다…."
지시를 받은 아트리아는 페르포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페르포네를 심문하시길 바랍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왜 페르포네를 심문해야 하는데? 그 의문에 아트리아는 대답했다.
"페르포네가 주인님을 암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뭐?" "직접 본인에게 들어보세요. 본인 입으로 스위치를 누르면 된다고 중얼거렸으니까요."
강림은 바로 페르포네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
페르포네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