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3 - 103화- 고향에 도착하다
<잿더미 섬>. 그리드가 자신의 고향을 불태운 이후 붙여진 이름. 설정상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불태웠기에 <잿더미 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남쪽 군도를 중심으로 번창했어야 할 섬이었으나, 그리드가 황금기를 자신의 손으로 끝내버렸다. 재와 먼지 말고는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다.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게임에서 나온 내용만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드는 남쪽 군도 중심에 있는 섬을 다스리던 가문의 후계자였다.]
원래 그리드는 어느 영주 가문의 후계자였다. 유일무이한 외동아들이었기에 누구도 감히 그리드를 업신여기지 못했다. 만약 그리드가 후계자의 운명을 받아들였다면 나름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드는 후계자가 아닌, 악마가 되는 길을 택했다.
[고대 유물의 힘을 손에 넣은 그리드는 광기에 휩싸였고, 그 광기는 고향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난데없이 광인(狂人)이 되어버린 그리드는 잔혹한 학살극을 벌였다. 아비는 물론이요, 친족들을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저택에 근무하던 사용인들도 모조리 다 죽여버리고, 마을 사람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들이 일구어낸 터전까지 불태워버렸다.
고작 하루 만에 전성기를 누리던 섬이 한 명의 악마의 손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리드의 실험체가 되었다.]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있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그리드에게 잡히고 말았다. 잡히고, 잔혹한 실험의 희생양이 되었다.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중에는 그리드의 새어머니와 누나, 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냥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랬을까? 뭐가 불만이고, 무슨 원한을 품고 있었길래 터무니도 없는 학살극을 벌인 걸까? 혹시 자신은 절대적인 존재이고, 좁아터진 섬에선 있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미친 짓을 저지른 걸까? 강림은 처음에는 시답지 않은 이유로 그리드가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고 봤다.
'그게 자업자득일 줄은 진짜 몰랐지.'
하지만 머릿속에서 조금씩 떠오르는 그리드의 과거를 보고 강림은 깨달았다.
이 핵폐기물도 아무 이유 없이 미친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인 어머니가 죽은 걸 계기로 미쳐버렸다는 것을.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섬에 모든 존재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 세상 전체를 불태우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은 불쌍한 녀석이었다는 사례 중 하나일 줄도 몰랐고.‘
원작 게임에서는 멀쩡한 가문의 후계자가 미쳐버렸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쓰레기 같은 아비에게 어미가 겁탈당했고, 그 결과 그리드가 탄생했다. 외도를 통해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미랑 같이 저택에서 쫓겨났으며, 막상 후계자로 내세울 아들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리드는 강제로 어머니와 헤어지고 저택으로 끌려갔다.
아비라는 작자는 후계자로 지명했으면서 제대로 아들을 마주 볼 생각이 없었다. 가문의 흠집을 내지 말라 경고하고, 듣지 않으면 매질을 통해 그리드를 엄하게 대했다.
새어머니나 누나, 동생은 그리드를 동정하기는커녕 꼴 좋다는 식으로 그리드를 놀려댔다.
사용인들도 거지에서 나온 후계자라며 그리드를 멸시했다.
주민들마저 그리드를 도와주기는커녕 거지 왕자라고 모욕만 주었다.
유일한 아군은 어머니뿐이었으나, 그 어머니마저 만나지 못하게 아비라는 작자가 계속 막아섰고, 끝내는 어머니가 싸늘한 시신이 되고 나서야 그리드는 어머니와 재회할 수 있었다.
이 정도까지만 봐도 미칠 이유는 충분한 거 아닐까? 이렇게까지 핍박을 받으면 분노에 미쳐서 날뛰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도 다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강림은 그리드처럼 살 생각이 없었다.
’그리드처럼 안 살 거야.‘
분노라는 불길에 몸을 끊임없이 태우고, 태우고, 계속 태우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끝까지 분출하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강림은 그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되고 싶지 않기에 끊임없이 몸부림을 칠 거다.
지금 <잿더미 섬>에 상륙한 이유도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아니, 이젠 <잿더미 섬>이 아니었다.
“어떠냐, 페르포네. 여기 많이 달라졌지?”
먼저 발을 디딘 곳은 부두. 여러 척의 배가 부두에 정박하고 있는 항구 도시다. 원래라면 폐허로 남아 있어야 하나, 섬을 복구하라는 강림의 지시대로 새로 다시 건설되었다.
섬에 재와 먼지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섬을 가득 채운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이 하늘을 뿌옇게 뒤덮고 있을 뿐이다.
“저 멀리 보이는 공장들은 전부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 내 자식들을 위한 무기가 이곳에서 나오고 있지.”
공장에서 나오는 물품은 병장기다. 창, 칼, 화살, 철퇴, 도끼 등, 질이 좋은 냉병기가 수두룩 나오고 있으며, 각종 화포와 포탄도 제작되고 있다.
무기 제작뿐만 아니라, 신무기 개발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개발 중인 무기는 총이다. 강림은 화포를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크기로 줄일 수 없냐고 요청했고, 그 요청에 따라 총의 초기 형태인 화승총 개발이 진행 중이다. 고대 유물에서 총이 나오거나, 아니면 제작서가 나오면 좋겠지만, 이상하게도 고대 유물에는 총 관련 무기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맨손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빛을 보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완성되면 이 세상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될 거다.
“이제 이 섬은 잿더미가 아니야. <그리드>지.” “그리드?”
자신의 이름을 섬의 이름으로 정했다는 사실에 페르포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일으켜 세웠으니까 내 이름을 쓰는 거지. 왜, 이상해?” “자기 고향을 태운 주제에 말은 잘하네.”
제3 자의 눈으로 보면 진짜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멋대로 고향을 불태운 주제에, 재건했으니까 섬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바꾼다고? 페르포네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내가 말을 잘하는 놈이지.”
강림은 자랑스러운 듯이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앞으로 이 섬이 얼마나 발전할지 기대해달라고. 너의 가슴만큼이나 웅장해질 테니까." "윽?"
페르포네는 바로 한쪽 팔로 가슴을 가렸지만, 어마어마하게 커진 태산을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망할 새끼, 남의 가슴을 이따구로 키우다니.'
성인으로 다 성장한 아이들을 낳으라는 지시를 받았던 그 날. 페르포네는 그 지시를 완수할 수밖에 없었다. 싫어도 강제로 임신할 수밖에 없었고, 배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자식들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낳은 결과, 페르포네의 몸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성인 크기의 딸들을 연속으로 낳는 바람에 뱃살이 늘어나 밑으로 축 처지고 말았다. 나름 관리한다고 신경 쓴 몸매가 아주 볼품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뱃살은 지금 알몸인 페르포네의 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 비대해진 가슴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뭐가 부끄럽다고 몸을 가리니? 어차피 알몸인데." "자, 잠깐, 잡아당기지 말라고!"
강림은 손에 쥔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쇠사슬은 목에 걸린 쇠고랑과 연결되었기에 페르포네는 그대로 강림 앞으로 끌려왔다. 잠시 중심을 잃을 뻔한 페르포네를 강림은 양손으로 그녀의 두 어깨를 잡아줬다.
오돌토돌하게 난, 뱀을 연상케 하는 피부 촉감이 고스란히 손끝으로 전해져왔다.
"후후, 역시 내가 생각해도 잘 만든 것 같아."
지금 페르포네는 인간의 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다.
파충류를 연상케 할 정도로 검은 동공은 세로로 확 찢어졌으며, 팔, 다리 겉면 곳곳에 뱀을 연상케 하는 피부가 돋아났고, 혀는 길어진 것뿐만 아니라, 끄트머리가 뱀처럼 갈라졌다.
수인 종족 중 하나인 뱀족으로 페르포네는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진짜 뱀이 된 소감은 어떤가요, <독사> 씨? 기쁘지 않나요?" "뭐가 기쁘다는 거야! 괴물이 되는 게 뭐가 좋다는 거냐고!"
강림의 말에 페르포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하에서 있었던 일로 강림에 대한 두려움이 대폭 상승했으나, 자기 할 말은 할 정도의 강단은 아직 남아 있었다.
"당장 날 원래대로 돌려놔, 돌려놓으라고!"
마기에 침식당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만 했다. 이 악마는 자신을 인간이 아닌 괴물로 만들 작정이었음을. 자신의 몸이 이 꼴이 되고 나서야 페르포네는 강림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하으윽?”
강림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가리던 페르포네의 팔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젖가슴을 강림은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안으로 파고들고, 갓 짜낸 우유가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 강림은 거칠게 주물럭거렸다.
"내 첫 성공작인데, 어찌 되돌려? 그냥 이대로 살아. 살아도 안 죽어." “흐이이이익? 나, 난 뱀족이 되고 싶지 않아!” “아니, 난 원해.”
강림은 더 세게 가슴을 주물렀다.
“오래 살아야 오래 먹을 수 있으니까.”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개조한다. 마기를 끊임없이 주입해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든다. 수명도 길어지고, 몸매는 더욱 아름다워지며,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미인으로 만든다. 가능할지 불안했으나, 결국 강림은 성공했다.
<독사>라는 별명이 있다는 이유로 페르포네를 뱀족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고, 드디어 완성을 눈앞에 두었다. 조금 더 마기를 주입한다면 진짜 뱀족이 될 거다.
물론 뱀족이 되어도 페르포네는 끝까지 저항할 거다. 자신에게 굴욕을 준 자는 반드시 이자까지 합해서 갚아준다. 그게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페르포네의 방식이다.
그러니 확실하게 부숴야 한다. 굴욕을 갚겠다는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강림은 여기 고향 땅에서도 페르포네를 생지옥에 떨굴 작정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가 죽질 않는다면, 미리 준비해둔 마지막 패를 쓰면 그만이다. 아무리 페르포네라도 그 패를 보는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릴 거다.
"그나저나, 아트리아는 언제 오냐? 먼저 도착했다는 편지는 받았는데…."
<그리드>에 온 사람은 강림과 페르포네 뿐만 아니다. 아트리아 역시 동행할 예정이다.
이유는 하나.
“아트리아가 있어야 금고를 찾는데….”
이 섬에 묻혀 있는 페르포네의 금고로 향하기 위해서. 테미네르를 통해 이곳에도 금고가 있다는 사실을 강림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트리아에게 금고의 행방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마침내 찾았다는 보고를 들었다.
따라서 아트리아랑 함께 갈 생각인데, 왜 안 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척, 척, 척, 척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발소리가 들려온다. 강림과 페르포네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서 복장을 한 보라색 머리의 미녀가 군대를 데리고 부두에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비서는 우아한 자세로 인사했다.
“준비는 다 끝났으니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머리에 둥근 보라색 빵이 나 있는 여비서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비서의 웃음에 강림 역시 똑같이 웃어줬다.
“그래, 어서 가자 아트리아. 여기서는 얼마나 나올지 한번 보자고.”
현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강림의 비서, 아트리아와 함께 강림은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