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2 - 92화-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이틀 뒤, 왕국 소속의 범선이 한 척이 아이스 섬에 찾아왔다. 아이스 섬의 총독 테가는 즉시 함선들을 보내 범선을 나포하라 지시했고, 나포된 범선 안에 왕국에서 파견한 사신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테가는 즉시 강림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한창 페르포네와 테미네르와 함께 병사 낳기에 열중하던 강림은 즉시 군복으로 갈아입고 지상으로 나왔다.
그렇게 지상으로 나온 강림은 알현실에서 왕국 사신단과 마주하게 되었다.
“네, 저희 왕녀님께선 폐하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 싶으십니다.”
옥좌에 앉은 강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여인은 그리 말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청록색 머리와 도도함이 담겨 있는 주황색 눈동자. 흰색 정복을 입은 이 안경잡이 여성은 제1 왕녀의 친필 서신을 양손으로 공손히 강림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뒤로 사신단으로 찾아온 수백 명의 여성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전원 노출도가 높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어째선지 너무 어색해 보였다. 마치 입기 싫은데 억지로 입혀진 느낌이랄까. 왜 저런 식으로 옷을 입었는지 강림은 이해가 되질 않지만,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라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을 강림은 알 수 있었다.
‘뭐, 이건 당연한 일이겠지.’
빙의되기 전의 그리드는 이 세상에 악명을 떨친 대악당이요, 살아있는 대재앙 그 자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도저히 숫자로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리드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만약 현실에 그리드가 실존했다면 사상 최악의 대량 살인마로 불렸을 거다.
그걸 잘 알기에 여성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맨 선두에 선 안경잡이 여자는 표정 변화가 없지만, 살짝 눈이 떨리는 걸 보면 그녀 역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그놈처럼 될 생각은 없지만….’
물론, 그건 빙의 전의 일일 뿐. 지금 강림은 그리드처럼 막장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쉽게 믿어주지 않겠지.’
애초에 그런 미친 짓을 저질렀기에 그 대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걸 잘 아는데 자신이 미친 듯이 살육을 저지를 것 같나? 절대로 안 할 거다.
물론, 안 한다고 생존한다는 보장은 없다. 빙의된 시점에서 그리드의 악행은 퍼질 대로 퍼진 상태이며, 그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강림은 몸소 깨달았다.
착하게 살려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까. 수아에게 암살당할 뻔한 일 이후로 강림은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착하게 사는 게 불가능하다면, 나쁜 놈으로 살아가자고. 그리드처럼 폭군이 되자고. 폭군이 되지만, 그리드와 똑같은 길은 걷지 말자고. 남자들은 죽여도 상관없으나, 여자들은 되도록 살리자고. 살려서 자신의 노예로 삼아버리자고. 자신이 유일무이한 주인이고 나머지는 전부 노예인 세상을 만들자고.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꿈을 여기서 이루자고. 그렇게 강림은 다짐했다.
따라서, 이 사신단을 어찌할지도 이미 머릿속에 그려놓은 지 오래였다. 아니, 어쩌면….
왕녀는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이들을 보낸 게 아닐까?
“어디, 왕녀님이 어떤 내용을 쓰셨는지 한 번 볼까나.”
강림은 서신을 바로 읽어내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대하신 그리드 폐하에게. 직접 대관식에 찾아뵙지 못해 사죄드립니다.]
[소녀, 폐하께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폐하의 제국과 소녀의 왕국이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조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소녀는 깨달았습니다. 폐하의 제국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방도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고 덤빈 걸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입니다.]
진심인가? 자기 자신을 소녀라고 낮춰서 부르다니. 진짜로 굴복하는 건가? 강림은 그리 생각할 뻔했으나, 바로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강림은 계속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니 부디 소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폐하가 바라시는 공물을 바칠 테니 제발 소녀의 간청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만약 폐하께서 소녀의 간청을 무시한다면, 소녀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 몸이 불타 사그라질 때까지 이곳에 땅을 묻을 겁니다.]
[부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여기까지가 서신에 적힌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굴복할게요, 라는 글인 줄 알았는데….’
협박 글이었네? 요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결사 항전을 벌이겠다. 그런 의사가 편지 마지막 부분에 잔뜩 묻어 있었다. 울분이 담긴 감정을 실은 채로 적은 건지 앞부분과 달리 잉크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당연할 수밖에 없을 거다. 왕족으로서 자긍심이 높은 제1 왕녀인데, 이런 식으로 굴종하는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치욕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만약 원작과 똑같은 내용으로 사건이 흘러갔다면 이런 식의 서신을 보낼 리도 없었을 거다.
‘이 왕녀도 반 그리드 동맹의 일원이었지.’
선왕이 후계자를 선정하지 못한 채 급사하는 바람에 시작된 내전. 그 내전에서 제1 왕녀는 혼란에 빠진 왕국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란을 일으킨 왕녀들을 제압하고, 자신이 옥좌의 주인임을 공고히 했다.
만약 그리드가 제국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왕국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왕녀는 여왕이 되었을 거다.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망명길에 올랐던 걸로 아는데….’
왕국이 내전에 빠진 상황을 그리드는 철저하게 이용했다. 왕녀들을 이간질해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유도해 단결하는 걸 사전에 차단했다. 자신이 왕위를 잇게 해주겠다고 거짓말을 하는 방식으로 왕녀들을 이용했다. 그렇게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참수했다. 나라가 더는 기능하지 못한다는 판정이 나올 때까지 그리드는 내전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로 인해 어떻게든 나라의 혼란을 수습해 그리드와 맞서 싸우려 했던 제1 왕녀의 계획은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수도를 빼앗긴 제1 왕녀는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망명한 왕녀는 그리드가 이 세상을 위협하는 최악의 적임을 설파해 여러 나라를 설득했고, 그 말을 수긍한 군주들은 반 그리드 동맹을 형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원작 게임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역시 수도가 위협받으니 태도도 바뀌는 건가?’
오직 수도만 노렸다. 다른 영토들을 야금야금 먹어서 수도를 고립시켰던 그리드의 방식과 달리 강림은 무조건 수도를 노린다는 방식을 추구했다.
나라의 심장부인 수도를 함락하면 왕국의 혼란은 더욱 거세질 테니까. 혼란이 거세질수록 왕국을 점령하는 것도 손쉬워질 거다. 여기에 제1 왕녀를 생포해 노예로 삼으면 반 그리드 동맹 설립은 더욱 늦춰질 거다.
그래서 강림은 아이스 섬을 침공했다. 반 그리드 동맹의 자금줄을 차단할 겸 자신은 언제든 수도로 진격할 수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아이스 섬을 점령했다. 침공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왕녀가 협박성 서신을 보냈으나, 고작 편지글 하나만으로 진군을 멈출 강림이 아니었다.
결국, 아이스 섬은 하루 만에 함락되었고, 중요한 관문을 빼앗긴 수도는 당장 제국의 침공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에 놓였다.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제1 왕녀도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자신의 목에 바로 칼이 들어오는 상황이고, 언제든 급소를 찌를 수 있는 상황인데 굽히지 않을 수 있나? 가뜩이나 왕녀들과의 대립이 여전한 상황에서 근거지를 잃어버리면 지금까지 쌓아 놓은 모든 걸 잃게 될 거다. 그걸 왕녀는 원치 않으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리고, 단순히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청한 건 아니라고 강림은 그리 생각했다.
‘단순히 시간 벌기처럼 보이는데….’
아이스 섬을 탈환하기 위해 제1 왕녀가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정보는 들었다. 대립 중인 왕녀들과도 일시적으로 화해하고, 왕녀들이 소유한 사병들을 흡수하여 아이스 섬 탈환을 위한 원정대를 꾸리고 있다.
그랬던 왕녀가 원정을 포기하고 굴복을 택했다? 원작에서 그리드에게 수십 차례 강간당하고, 영혼이 마모될 때까지 고문받아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악을 쓰던 그 왕녀가?
뭔가, 수상하다. 분명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뭔지 강림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아르웬….’
카르디안의 동생 아르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마저 앗아간 그리드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하는 여자. 그 아르웬이 그리드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 중이라는 사실을 강림은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뜻에 찬동하는 자들이 존재하며, 대부분 그리드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면 제1 왕녀는 아르웨과 손을 잡은 게 아닐까? 아르웬의 영지 소속 범선이 수도를 왔다 갔다 한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는데, 충분히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당장 쳐들어가서 박살을 내버리는 게 답이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서 칼을 갈고 있는데 그걸 그냥 가만히 두나? 찌르기 전에 손목을 부러뜨려야지.
그래야 하지만,
“그래, 너희 왕녀님의 말은 잘 들었다. 마침 나도 쉬고 싶었는데, 잘 되었네.”
강림은 진격 대신 정지를 택했다.
‘얕보이지 않도록 군사를 더 키워야 해.’
정복 전쟁을 통해 디자이어 제국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왕국 영토의 3분의 1, 남서쪽에 존재하는 모든 섬을 점령했다.
그렇게 영토가 넓어졌지만, 이젠 지키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원정을 떠날 때 빈집 털리면 진짜 골치 아프니까.’
지켜야 할 땅의 크기에 비해 군사가 너무 적다. 군함은 65척까지 늘어났다. 군사는 죄인들을 씨받이로 이용해서 낳은 4만 명의 병사들을 합해서 약 6만 명의 대군을 확보했다.
하지만 부족하다. 수많은 섬을 지키기에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잠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
따라서 강림은 이 불가침 조약을 이용할 작정이다.
“근데, 공물은 어디에 있지?”
알면서도 애써 모른다는 투로 강림은 물었다.
“총독의 말에 따르면 너희들 말고 없다고 하던데….” “이들이 바로 공물입니다.”
안경잡이 여자는 그리 대답했다.
“폐하께선 여자를 보물로 여기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살집이 좋은 귀족 영애 100명을 수집했습니다.” “….” “죄송하게도 수도 사정이 좋질 않아 이런 식으로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
설마 했지만, 여자를 공물로 바치다니. 그것도 평민도, 거지도 아닌 귀족 영애들을 바치다니. 어떻게 공수했는지 불 보듯 뻔하다.
여기까지 강림이 예상했던 바였으나,
“그리고 저도 공물입니다.” “…뭐?” “저 역시 폐하에게 바치는 공물입니다.”
안경잡이, 프테라의 발언에 강림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