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9 - 79화- 침공에 대비하는 독사
<독사>. 페르포네가 대상인으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얻은 별명이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도를 가리지 않는다. 자신과 경쟁하는 자가 나타나면 안 좋은 쪽으로 소문을 내서 자신을 올려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 해도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서슴없이 이행한다. 자신의 선택으로 누군가가 고통받아도 절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에게 덤빈 것이 죄이니까. 무턱대고 덤빈 멍청이를 위해 굳이 조문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언제나 페르포네는 냉혹한 모습을 보여줬다.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사고관으로 계속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그렇게 오르면서 페르포네에겐 <독사>라는 별명이 붙여줬다. 누구든 그녀의 비위에 거슬리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에 생긴 이명이었다.
페르포네는 이러한 별명이 생긴 것을 크나큰 영광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데 사용할 수 있으니까. 무서우면서도 알아서 받들어 모시니 싫어할 리가 있는가? <독사> 그 이상의 별칭을 얻어도 페르포네는 기분 좋게 받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경쟁자를 찍어 누르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지위에 도달한 페르포네는 마침내 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교역의 중심지이자 왕국 수도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인 섬. 모험가들의 둥지인 길드 본부가 상주해있는 섬.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손에 쥔 자만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섬.
이 섬의 이름은 <아시스>. 페르포네는 이 아시스를 다스리는 영주가 되었다. 언젠가 아시스를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쥐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어린 소녀는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
이룸과 동시에 모든 걸 잃을 처지에 놓였다.
"급료를 더 올려달라고? 미쳤나?"
자신의 집무실에서 청원서를 본 페르포네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에메랄드처럼 빛나던 녹색 장발은 관리를 안 한 탓에 푸석푸석해졌으며, 갈색 눈동자 밑은 검은 반달이 찍혀 있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매일 집무실에서 생활하다 보니 방 한구석에는 쓰레기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전에 올려줬는데, 또 해달라고?"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데, 그런 것 치고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용병대장이 그리 말하더군요. 안 해주면 제국에 붙겠다고 합니다."
그런 페르포네의 뒤치다꺼리를 보좌관 테미네르가 그리 말했다. 정복을 입었음에도 굴곡진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갈색 단발머리의 여성도 제대로 잠을 자질 못해 눈가에 검은색 반달 낙인이 찍혀 있었다. 어제도 밤을 새우며 일했기에 녹색 동공은 생기가 다 빠져 있었다.
"제국에게? 하! 멍청한 생각을. 그 정신병자가 받아줄 것 같나?"
용병대장의 터무니없는 협박에 페르포네는 기가 차서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남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면서도 그딴 소리가 나오나?"
아이스와 이웃을 이루는 남서쪽 군도. 그 군도의 지배자는 수인 연합이다. 작지만 수많은 섬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수인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연합을 결성했다. 페르포네는 왕국과 수인 연합 간의 중개인이 되어 짭짤한 수익을 벌었다.
그 수인 연합이 멸망했다. 그것도 해적 나부랭이들에게.
아니, 해적 나부랭이가 부를 수 없다. 왕국에서도 쉽게 구하지 못하는 철선으로 대함대를 결성한 해적들은 수인 연합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세웠다.
디자이어 제국. 해적단 수장인 그리드가 세운 나라이며, 페르포네가 맞서 싸워야 하는 적국이다.
그 적국에서 남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페르포네는 잘 알고 있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 그 그리드가 ‘아이고 반가워요, 여기서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할 줄 아나?"
남자는 인형으로 취급된다.
기억도 감정도 모조리 배제된 상태로 개조된다. 개조된 남자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병정으로 전락한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자손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그리드를 위해 혹사당한다.
제국에서 사는 남자들은 다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 그리드의 피가 섞이지 않으면 자손을 남기는 특권조차 누리지 못한다. 가축처럼 취급받는 여자들 이하로 다뤄지는,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걸 제국에 심어둔 정보원을 통해 들었기에 페르포네는 용병대장의 협박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많이 주면 되지, 참 욕심도 끝이 없어요.'
그리드가 이 세상을 지배하면 비참한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 그걸 막아야 출세의 길이 보장되거늘, 그걸 생각할 머리도 없나? 미래를 멀리 내다봐야지, 눈앞에 있는 떡고물에 눈독을 들이면 어찌하자는 거냐? 자신은 항상 멀리 내다볼 줄 알았기에 영주의 자리까지 얻었는데, 놈은 그런 생각도 없나? 왜 이렇게 덜떨어진 놈들이 많은지 페르포네는 짜증 났다.
"해서, 어찌하실 겁니까?" "죽여."
페르포네는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남자, 아녀자를 강간하려다 미수로 그친 적이 있거든? 언제 제국이 쳐들어올지 몰라서 눈감아 줬는데, 안 되겠어. 얼른 죽여버려야지. 놔둬봤자 도움 일도 안 될 거야." "그래도 될까요?"
테미네르는 우려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침공이 임박했다며 다들 크게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형을 집행해도 되겠습니까?" "군기를 어지럽힌 놈은 봐줄 수 없어."
지금은 전시 상태다.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페르포네는 대규모 징집령을 내렸다. 모아놓은 재산을 이용해 수많은 모험가는 물론이요, 용병들도 다수 고용했다. 해전을 벌일 것을 고려하여 수십 척의 범선을 준비했고, 철선 세 척도 준비했다. 덕분에 금고 열 개가 텅텅 비게 되었지만, 페르포네는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싸운다고 결심을 했다면 그 정도 대가를 지불하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아직 꽉 채운 금고가 많이 남아있으니 손해라고 볼 수 없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빈 곳간을 다시 채워 넣을 거다.
이렇게 준비했지만, 이길 거란 보장은 없었다.
상대는 철선으로 무장했으니까. 수인 연합이 맥없이 무너진 이유도 중 하나이며, 남서쪽에 있는 수십 개 이상의 섬이 함락된 이유도 이 철선들로 이루어진 함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함대에 걸맞은 병력도 상상 이상으로 클 거다. 어쩌면 페르포네가 예상한 규모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욱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 그나마 단결은 할 줄 알아야 강대한 적과 맞서 싸워 볼 수 있으니까.
그 중요한 것을 해치는 자가 있다면 없애야 한다. 아무리 중요한 지위에 있는 자라 해도 말이다.
"경비병들한테 죽이라고 전해. 증거는 그쪽에서 보관하고 있으니 바로 처리해줄 거야." "알겠습니다."
테미네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집무실에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페르포네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더는 거지꼴로 살지 않아도 된다. 이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놈이 갑자기 튀어나온 걸까? 자신의 노후 인생을 박살 낸 그리드가 페르포네는 진짜로 싫었다.
"망할 해적 새끼가…."
그리드에 대한 소문은 페르포네도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 고향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한 미치광이 살인마. 수틀리면 자신의 측근이라도 목을 꺾어버리는 쓰레기. 인격이 개판인데 철선이라는 무지막지한 힘까지 손에 넣는 바람에 누구도 감히 녀석을 저지하지 못했다. 놈이 지나간 들판에는 재와 먼지로 가득 차 있고, 놈이 지나간 마을에는 시체들로 산이 쌓여 있으며, 놈이 지나간 강에는 핏물이 넘쳐흘렀다.
세계 정복을 원하는지, 아니면 이 세상의 파멸을 바라는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새끼. 그 개새끼는 그 사건 이후로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될 공공의 적으로 단단히 찍혔다.
'설마,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지.'
장교 후보생 납치 사건. 왕국의 미래를 책임질 장교 후보생들을 실은 배를 그리드가 납치했다. 왕국에서는 즉각 후보생들을 풀기 위해 협상단을 파견했다.
녀석이 바라는 걸 최대한 들어줘야 한다. 장교 후보생 대부분이 명망 높은 가문의 자제들이니 어떻게든 되돌려받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영토 일부를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로 왕국은 필사적으로 그리드를 설득했다.
이에 그리드는,
[내가 원하는 건 이놈들이다. 협상 따위 필요 없으니 죽어라.]
…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으로 협상을 뒤엎어버렸다. 후보생들을 전부 세뇌해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은 그리드는 그들을 이용해 협상하러 온 협상단을 모조리 다 죽였다. 푸줏간에 전시된 고기처럼 정성스럽게 토막 내서 수도에 보낸 건 덤이고.
이에 왕국 전체가 크게 분노했다. 당장 저 그리드를 토벌해야 한다고.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져 천벌을 내려야 한다고 여론이 들끓어 올랐다. 국왕도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그리드를 토벌하기 위한 함대가 마련되었다. 납치당한 장교 후보생들의 가족들도 자신들이 가진 함선을 가지고 토벌에 참여했다.
그렇게 복수를 울부짖으며 그리드 토벌에 나선 함대는,
한 척도 돌아오지 못하고 바다에 수장당했다.
[나한테 대들면 이 꼴이 될 테니 건들지 말도록.]
토벌에 나선 장병들의 머리로 쌓은 탑을 그리드는 선물이라고 보내줬고, 그걸 본 국왕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후 잠잠했던 녀석은 난데없이 수인 연합을 공격했고, 연합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웠다.
'그 썩을 놈이 갑자기 나라를 세울 줄이야.'
그것도 자신의 앞마당에서. 수인 연합이 멸망한 시점에서 대충 예상 하고 있었지만, 이리도 빨리 될 줄은 페르포네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관식을 치른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침공을 강행할 거란 사실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르웬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게 좋겠어.'
아르웬은 페르포네의 주요 고객이었다. 흑광을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재료를 발주했고, 수량을 맞추기 위해 페르포네는 생고생을 했다. 허구한 날 날아다니는 파리처럼 나타나는 그런 재료들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아르웬이 고생한 만큼의 대금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페르포네는 하지도 않았을 거다.
이번에도 아르웬은 대량의 재료를 주문했다. 이에 맞춰 대금을 보낼 예정인데, 페르포네는 돈이 아닌 병력을 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응해줄 거야. 자기 가족의 원수와 싸우는 일인데 안 보내줄 리 있겠어?'
그리드에게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하느라 바쁘다고는 하나, 그리드가 날뛰는 꼴은 보지 못할 거다. 분명 거래를 받아 들여줄 거라고 페르포네는 그리 생각했다.
"절대 안 넘겨줄 거야."
주먹을 쥔 채로 천장을 향해 팔을 뻗으며 페르포네는 그리 대답했다.
"내가 고생해서 얻은 이 섬을 넘겨줄까 보나."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거지꼴로 살아오면서 페르포네는 맹세했다.
반드시 위에 서겠다고. 악착같이 돈을 벌고, 벌고 또 벌어서 누구도 건들지 못할 지위까지 오르겠다고.
그걸 이루었는데, 고작 황제 놀이나 하는 해적에게 빼앗길 수 없다.
"오나 봐라, 죽여버릴 테니까."
[그게 네 대답인가 보군.]
"그래, 이게 내 대답…."
순간, 페르포네는 얼어붙었다.
"누가 나한테 말을 걸고 있지?"
테미네르는 나가서 아무도 없을 텐데? 침을 꿀꺽 삼킨 페르포네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둘러보다가 두 눈이 창가에 간 그 순간,
"히익?"
괴물이 서 있었다. 전신이 검은색 갑주로 이루어진 이형의 괴물이 페르포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괴물의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항복하라고 편지를 보낼 수고를 덜었네.]
"너, 너는 누구야?"
[내 이름은 그리드.]
“뭐?”
[디자이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지.]
그리드, 아니 강림은 그리 대답했다.
[그리고 네 꿈을 박살 낼 침략자고.]
그 말과 동시에 강림은 페르포네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집무실이 건물 윗부분과 함께 통째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