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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77화 (78/344)

Chapter 77 - 77화(막간)- 복수를 갈망하는 함장의 동생

"교황이 그 쓰레기를 황제로 인정했대."

어느 한 영주의 저택에 있는 집무실. 남색 단발머리의 여성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손에 쥔 편지를 구겨버린 뒤, 바닥에 내던졌다.

"인질들을 무사히 인도받는 조건으로 인정했나 봐."

가슴 밑으로 팔짱을 낀 여성의 얼굴은 노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유는 이해하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여성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망할 교황 새끼. 전에는 '해적들의 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 주제에 이게 무슨 추태야?"

여성에게 편지를 보낸 이는 <독사>. <독사>라는 별명을 대상인, 페르포네가 보냈다. 여성은 복수를 위해, 페르포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리드를 반드시 쓰러뜨려야 한다. 이러한 공통된 목적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현재 동맹을 맺은 상태다.

그렇기에, 타도해야 할 적이 한 나라의 군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억지를 부리지. 바로 꼬리를 내리면 어쩌자는 거야?"

그리드가 나라를 세웠다. 수인 연합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터전 위에 디자이어 제국을 세웠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모든 섬에다 전서구를 파견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일개 해적 나부랭이 따위가 나라를 세웠다니 지금까지 이러한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설령 세웠다고는 해도 본인들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멸해버린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리드가 세운 디자이어 제국 역시 그리될 거라고 사람들은 그리 생각했다.

당장 그리드가 전서구를 통해 보낸 포고문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린다.]

[나, 그리드는 이 세상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킬 거다.]

[목숨을 건지고 싶은 자는 지금 당장 내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해라.]

[항복하지 않은 자는 무자비한 탄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 왕국이 너희를 지켜줄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언제까지 성국이 너희들의 방파제가 되어줄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이 그리드에게 복종하지 않은 걸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 거다.]

[너희들에겐 희망 따윈 없으니 알아서 기어라.]

…라는 식으로 적혀있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누가 이 나라를 인정할까? 약탈과 살육이란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 이 나라를 누가 좋다고 고개를 숙이겠는가? 다들 목숨을 걸고서라도 멸망시키려 할 거다.

"이래선 놈에게 날개를 달아준 거나 다름없잖아…."

그래야 하건만, 지금 영주들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수도에 있는 제1 왕녀의 편에 설지, 아니면 갑작스레 등장한 그리드라는 폭군에게 붙을지.

이런 망설임이 생길 정도로 지금 디자이어 제국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해적이라 얕보고 용병들을 이용해 제국을 침공했던 영주들이 목숨을 잃었다. 영지민들은 노예로 전락했고, 그들이 살던 땅은 잿더미가 되었다. 잿더미가 된 자리에는 제국의 요새가 세워졌다.

단순한 사냥이라 생각하며 페르포네의 지원을 받고 제국에 침입한 모험가 다수도 목숨을 잃었다. 이 중 목숨을 건진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폭군의 자식을 낳는 씨받이로 전락했다.

해적들은 단결심보단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걸 최우선으로 여긴다. 욕망을 이룰 수 있다면 친한 친구마저 죽이는 간악한 놈들이기에 쉽사리 이길 수 있다. 굳이 토벌대를 구성하지 않아도 충분히 해적들을 쓰러뜨릴 수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은 오답이었음을 다들 뒤늦게 깨달았다. 해적들은 단결되어 있었고,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는데 필사적이었다. 자신들이 세운 나라를 침공하면 바로 보복해 적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짓밟으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역대 나타난 해적 국가 중에서 이토록 자기 나라에 애착을 가진 자들은 없었으며, 없었기에 디자이어 제국이 이토록 강할 줄은 다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현재까지 디자이어 제국은 정복한 섬은 60개. 남서부 일대의 모든 섬을 장악하기 위해 계속 진군 중이다. 이 진군을 막아낸 영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영지민들과 함께 병사들을 생산하는 씨받이로 길러지는 영주들만 수두룩할 뿐.

이 사실을 알면서도 왕국에서는 대응할 수가 없다. 여전히 내전이 한창인 상황에서 해적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까. '이쪽에선 병력이든 물자든 보내기 어려우니 현지에서 알아서 해결하도록'이라는 식으로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영주들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막을 방도는 없고, 자신들을 도와줘야 할 왕국은 손가락만 빨고 있다. 아무리 제1 왕녀님이 있다 해도, 이렇게 방치하면 갈아타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왕녀를 버리고 폭군에게 붙는 게 이득일지도 모른다. 그런 불온한 생각이 영주들 사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성국에게 나라로 인정받았다. 이단 국가가 아니라고 인정받았으니 관계를 맺어도 사이좋게 이단자로 몰리는 일은 없을 거다. 눈치 보지 않고 그리드에게 붙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거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당장 그리드에게 붙은 날벌레들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남색 단발머리 여성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말이다.

"아직 이쪽은 제대로 모이질 않았는데 항복하는 영주들이 나와버리면…." "나올 수밖에 없죠."

그런 여성의 말에 수인이 대답했다. 여성이 앉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었다.

"이단으로 찍힐 위험성이 사라졌으니 분명 그리드에게 붙으려는 영주들이 나올 거예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모시던 주군도 갈아치우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요."

머리는 흰색이었으며, 눈동자는 하늘색이었다. 수아와 똑같은 차림의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색은 머리카락처럼 하얀색이었다.

설녀를 연상케 하는 구미호, 설화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열 좀 그만 내세요. 열 낸다고 없었던 일로 변하겠나요?" "화 안 나게 생겼냐!"

설화의 말에 여성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새끼 뜻대로 돌아가는 걸 어찌 가만히 있어?" "그럼 싸울 건가요?"

설화가 물었다.

"당신의 언니인 카르디안을 되찾기 위해서, 죽은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군사를 일으킬 건가요? 쥐꼬리만 한 병력만으로?"

여성은 복수하고 싶었다. 자신의 우상인 언니를 세뇌해 노예로 만들고, 아버지의 시신을 모욕하고, 어머니마저 죽인 그 쓰레기를, 그리드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카르디안의 동생, 아르웬은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싶지만, 그녀는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분한 듯 이빨을 갈 뿐이었다.

"…제기랄."

아르웬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원수의 전력과 자신의 전력 차이는 너무 벌어져서 도저히 메꾸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현재 아르웬이 보유한 병력은 영지민들을 강제로 징발해도 겨우 2천을 채울 정도며, 보유한 함선은 5척밖에 되질 않는다.

반면 원수인 그리드가 보유한 병력은 최소 8천에서 최대 1만. 함선은 기함 4척에 호위함 40척을 합해 총 44척. 확인된 숫자가 이 정도이며, 설상가상으로 병력이 실시간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복수를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절망적인 차이였다.

"그러니 우린 다른 방식을 사용해야 해요."

설화는 아르웬을 껴안았다. 마치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되는 것처럼 꼭 껴안았다.

"제가 보여드렸잖아요. 그리드를 쓰러뜨릴 수단을." "흑광 말이구나."

흑광. 아르웬이 아버지의 보물 창고에서 찾은 제조법을 통해 만든 약물이다. 나약한 인간을 난폭한 괴수로 만들어준다는, 말도 안 되는 효과를 가졌다.

그리드를 쓰러뜨리기 위해 흑광을 만든 아르웬이었으나, 쓰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괴수로 변하는 게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입증하기 위해 실험을 해야 하는데, 누굴 희생양으로 삼을 거지? 만약 자신이 하다가 실패하면, 허망하게 죽어버리면 복수가 끝나 버릴 거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은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고심 끝에 결국 아르웬은 자신이 실험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복수니까. 자신의 복수를 남에게 맡길 수 없으니까.

그렇게 결심했을 때, 설화가 나타났다.

"확실히 대단하긴 했지. 너의 보고를 들었을 때는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었어."

자신에게 흑광을 달라. 자신이 흑광의 효과가 입증되는 걸 보여주겠다. 당신이 그리드를 죽이고 싶어 하듯이, 자신도 그리드가 싫다. 서로 목적이 동일하니 한 번 해보는 게 좋지 않겠나? 마침 수인 중에 쓸만한 실험체가 존재한다. 그 여자도 그리드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니 분명 받아들일 거다. 동맹의 중심인 당신이 변고가 생기면 큰일인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나?

고심 끝에 아르웬은 설화의 제안을 수용했고, 원하는 결과물을 볼 수 있었다.

'지긴 했지만….'

놈에게는 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답이 없는 철선 따위를 고철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흑광을 만드는 데 드는 재료가 너무나 많고, 구하기도 쉽질 않지만, 적절한 수량만 확보할 수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페르포네도 어떻게든 재료를 구해주겠다고 했으니 만들 수 있을 거다.

이런 기적을 알려준 것에 아르웬은 설화가 너무나 고마웠으며,

'근데, 내가 흑광을 가지고 있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흑광을 만든다는 건 나랑 페르포네만 알던 사실인데….'

혹시 페르포네가 알려준 걸까? 아니, 그보다 이 구미호가 페르포네를 알고 지낸 사이일까? 수인들의 사냥을 묵인했던 <독사>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을 수 있나?

그리고….

"답답하니까, 좀 놔줄래? 숨 막혀." "아, 죄송해요. 한번 해보고 싶어서…."

분명 자신과 나이대가 비슷한데, 왜 자신을 딸처럼 여기는 걸까?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걸까? 파면 팔수록 아르웬의 머릿속은 의구심만 넘쳐났다.

넘쳐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그 악마를 척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니까.

"그럼, 저는 북해로 가볼게요."

설화는 그리 말하며 문으로 향했다.

"가서, 그 여왕을 설득해볼게요." "가능하겠어? 그 여왕이 동맹으로 들어올 거란 보장은 없는데…."

아르웬은 현재 동맹을 모으고 있다.

그리드에게 원한을 가진 자. 그리드로부터 자신의 땅을 지키고 싶어 하는 자. 자신과 똑같이 그리드에 의해 상처를 입거나 위협을 받는 자들을 아르웬은 모으고 있었다.

설화가 북해로 가는 이유도 동맹을 모으기 위해서다.

지금 동맹 전력으론 어림도 없다. 그나마 그리드에게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다. 그 여자를 끌어들인다면 놈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다. 그러한 이유로 아르웬은 북해로 갈 생각이었다.

근데, 그리드와 원한 관계가 없는 여자가 과연 순순히 우리 말을 따라줄까? 아무리 그리드의 포고문을 봤다고 해도 말이다.

"가능해요."

설화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저한테 다 방법이 있거든요." "진짜?" "예, 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수단을 저는 갖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라는 말을 하며 설화는 문을 열었다.

"바보같이 공격하지 마세요. 흑광이나 철선. 둘 중 하나가 완성된 뒤에 하세요. 그래야 좀 비빌 만하지."

그 말을 끝으로 설화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후우."

아르웬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버지, 어머니…."

지켜봐 주세요. 제가 원수를 갚고 언니를 되찾겠습니다. 녀석에게 우리 가문을 건든 대가가 뭔지 알려주겠습니다. 놈의 목을 베어서 두 분의 무덤 앞에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힘을 주세요. 그 악마를 쓰러뜨릴 힘을 주세요. 아르웬인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와 동시에,

창가에 놔둔 화분에서 꽃봉오리 하나가 떨어졌다. 본래 세 개였으나, 다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꽃봉오리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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