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 - 54화- 괴물에게 압살당한 호랑이
"너, 미쳤어?"
주문을 알려달라는 강림의 요청에 수아는 어디서 망발을 들은 거냐는 식으로 강림을 쳐다봤다.
"그걸 쓰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도 수아랑 같은 의견입니다."
이리스도 수아의 말에 동조했다.
"주인님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할 순 없습니다."
호랑이족 수장 타이가 사용했던 것처럼 강림도 <본능 회귀>를 사용한다.
<본능 회귀>를 사용하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다,
1. 촉매제가 몸에 있어야 할 것. 2. 봉인을 풀기 위한 주문을 읊을 것.
타이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했기에 거대한 호랑이 괴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강림 역시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했다.
수아로부터 구미호족의 귀물인 요력석을 몸에 품었다. 이제 주문만 읊으면 된다. 성공하면 타이에게 대항할 수단이 생길 수 있으나,
실패할 경우,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다. 성공한다 해도 일이 잘 풀릴 거란 보장도 없다.
그래서 이리스와 수아는 격렬하게 반대하는 거다.
이를 강림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럼, 다른 방도라도 있어?"
아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 셋이 덤벼도 꿈쩍도 하지 않은 놈이야. 그런 놈을 지금 우리 힘만으로 이길 수 있어?"
다른 수단이 있었다면 바로 썼을 거다. 강림도 웬만해선 자기 목숨을 담보로 쓰고 싶진 않으니까. 살고 싶은데 목숨을 걸라는 모순적인 행동을 강림은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만약 타이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단이 존재한다면 강림은 바로 그 수단을 선택했을 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해 봐. 이것 말고 녀석을 확실하게 쓰러뜨릴 수단이 있는지…." "…." "…."
그 말에 수아도, 이리스도 반박하질 못했다.
"없으면 얼른 알려 줘. 녀석이 우리가 있는 곳을 눈치채기 전에 빨리해야지."
강림은 수아를 향해 다시 요구했다.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사이좋게 호랑이 배속에 들어가기 싫으면 빨리 말해." "…정말로 괜찮은 거야?"
수아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물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데 진짜로 할 거야? 타이처럼 못 돌아오면 어쩌려고?" "못 돌아오면 못 돌아온 대로 살면 그만이지." "…하아?"
황당무계한 발언에 수아는 순간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리스도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로 강림을 쳐다봤다.
그런 두 사람이 경악해도 강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어조로 즐겁게 이야기를 늘어놨다.
"괴물이 되면 괴물의 삶을 사는 것도 좋지. 세상을 공포로 유린(蹂躪)하는 마왕. 그런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난 이미 마왕 그 자체니까." "…." "아예 마왕성 같은 걸 짓고 살고 싶은데, 몸집이 커지니 역시 크게 짓는 게 낫겠지?" "대체 그걸 말이라고…."
수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강림은 진심이었다.
"말이 되니까 하는 소리지. 내가 괜히 말하는 줄 알아?" "…." "그러니까, 얼른 알려 줘."
강림은 다시금 요구했다.
"내 문제는 내가 다 짊어질 테니까 어서 말해 줘." "하아, 어쩌다가 이런 거지 같은 남자에게 빠져서는…."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간 남자다. 이 남자에게 유린당하는 걸 견디지 못한 수아는 결국은 굴복을 택했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요, 자신의 동족까지 다 갖다 바쳐버렸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수아는 강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만약 강림이 잘못되어 평생 괴물로 살아간다 해도 그녀는 평생 그를 위해 봉사할 거다.
그리고 반대로 수아를 비롯해 지금까지 먹은 여자들을 위해서라면 이 남자는 거리낌 없이 자신을 희생할 거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마저 희생시키는 극악무도한 쓰레기로 알려진 녀석이 어쩌다가 희생정신이 강한 남자로 변한 건지 수아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뭐, 말해달라 해도 안 알려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 가르쳐 줄게. 대신…."
수아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죽지 마."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 우리를 평생 눈물로 세월 보내게 하지 말라고."
오직 그것만 지켜라. 자신들을 전부 다 취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끝까지 살아서 책임져라.
“그래, 살아서 돌아올게.”
그런 수아의 요구를 강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돌아올 테니까, 얼른 가르쳐 줘. 타이 녀석, 벌써 냄새 맡았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알았어, 말해 줄게. 주문은…,"
잠시 뒤,
-우오오오옥!
괴수의 포효가 섬 전체에 메아리쳤다.
●●●
'어디에 있냐, 쓰레기들아. 어디로 숨었냐….'
타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나무들을 짓밟으며 전진하는 호랑이 괴물의 검은색 동공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나타나기만 해봐라. 다 씹어먹어 주마.'
그리드, 자신을 공격한 은색 갑옷 여자, 그리고 수아. 반드시 그 세 놈을 죽인다. 그놈들을 죽이고, 다른 놈들도 죽인다. 해적에게 협력하는 다른 녀석들도 남김없이 죽인다.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해적들에게 유린당한 동포들의 원혼을 전부 갚아줄 거다. 다 갚아주고 추락한 명예를 되찾을 거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평생 괴물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 따위 타이에게 있어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부 다 부숴버리세요.'
설화가 그리 말했다.
‘이미 당신은 명예를 잃었습니다. 돌아가도 당신을 호랑이족의 수치라며 내쫓을 거예요.’
맞는 말이다. 무슨 염치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정예 전사들을 차출했으면 그만큼의 성과를 내야 하거늘, 내기는커녕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전사들은 해적 놈들의 노예로 전락했고, 타이 역시 다신 싸울 수 없는 몸으로 개조당하고 말았다. 단 한 번의 실패로 수인 연합의 전력은 반 토막이 나버렸고, 이는 곧 연합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런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돌아가면 누가 환영해줄까?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라는 원성만 들을 거다. 같은 동족에게조차 수치라며 추방당하게 될 거다.
그런 걸 타이는 원치 않았다. 어떻게든 명예를 회복해서 실패를 만회하고 싶었다.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설화의 꼬드김에 쉽사리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흑광>이 주입된 이후 이성을 상실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 탓도 있지만 말이다.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해적 놈들을 전부 죽이는 것밖에 없어요. 그들과 협력했던 자들도 마찬가지고요.’
해적들의 소굴이 된 섬들을 모조리 없애라. 변절자가 된 수인들을 모조리 다 없애라. 수아도, 아켈론도, 카우도, 레비도 전부 없애라.
‘그리고 그리드만큼은 반드시 죽이세요.’
그리고 모든 일의 원흉인 그리드를 없애라. 오직 그것만이 타이가 실패를 만회하고, 명예를 회복할 유일한 방도라고 설화는 속삭였다.
‘그러면 돌아가도 당신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 명령에 타이는 움직였다. 명령에 따라 가장 첫 번째로 여우섬을 초토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타이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명예를 회복하는 일인데 학살한다고 뭐가 대수냐? 어차피 악의 소굴이 되어버린 이상, 정화하는 게 답인데 이게 잘못될 리 없다.
그러니 다 죽인다. 모조리 죽인다. 전부, 전부, 전부 죽인다.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놈들은 모조리 다 죽일 거다.
-우오오오오오!
갑자기 괴수의 포효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뭐지?]
불길한 검은색 기운이 하늘 높이 솟구친다. 타이가 <흑광>을 주입했을 때 느꼈던 기운과 똑같다. 똑같지만, 농도가 너무나 다르다. 너무 짙어서 타이는 숨을 제대로 내쉴 수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그런 의구심이 들 때, 타이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무, 뭐야. 저건?’
순간, 겁에 질린 타이는 뒷걸음질 쳤다. 전사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나, 머릿속에서 이리 외치고 있다.
싸우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이 녀석은 혼자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모조리 다 섬멸하라는 설화의 암시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타이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호, 혹시 수아?’
타이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능 회귀>를 통해 괴수가 될 수 있는 자는 자신과 수아뿐이니까.
근데, 눈앞에 나타난 저 괴수가 과연 수아인가? 흉측한 얼굴을 한 저 괴수가? 전신이 검은색 갑피로 뒤덮여 있는 저 괴수가? 스산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는 저 괴수가? 꼬리도 없는 저 괴수가, 구미호처럼 보이지 않는 저 괴수가 정녕 수아가 변신한 존재란 말인가?
‘누가 괴물이 되었든 상관없어.’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타이는 바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어차피 목만 물어뜯으면 끝나니까!’
그렇게 결의를 다진 타이는 달려들었다. 아가리를 크게 벌린 타이가 괴수의 목을 물어뜯는 순간,
타이는 시야가 반전되었다.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땅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고 나서야 타이는 자신이 괴물이 날린 주먹을 맞고 날아갔음을 깨달았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이빨이 전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입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타이는 크게 경악했다.
더욱 경악한 것은….
‘재, 재생이 되질 않아?’
부러진 이빨들이 원상 복구되지 않는다. 아트리아의 맹공에도 멀쩡했던 것도, 수아의 사역마들과 싸우느라 입안이 숯이 되었음에도 멀쩡했던 것도, 이리스가 경추(頸椎)에 검을 꽂아 넣어도 멀쩡했던 것도 초월적인 재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타이에겐 이런 능력이 없었지만, <흑광>을 주입받은 이후로 얻게 되었다.
그러니 부러진 이빨들이 재생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하는데,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새로운 이빨이 자라나질 않았다. 금이 간 턱도 마찬가지고.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이 의문에 타이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쿠어어어억?
검은 괴물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으니까. 검은 괴물이 내지르는 연속 펀치에 타이는 넝마가 되어갔다. 제대로 대응하고 싶어도 반격조차 허용하지 않는 연타에 맥을 못 추었다.
‘누, 누가 당할 것 같아?’
간신히 앞발을 휘둘러 연타를 막아낸 타이는 뒤로 크게 도약했다. 타이는 정면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쿠워어어어엉!
천지를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타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호랑이 입에서 나온 충격파가 지나간 자리는 오직 황무지 말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검은 괴물은 두 팔을 X자로 교차했다. 충격파와 충돌한 검은 괴물은 뒤로 크게 밀려 나갔다.
그 순간을 타이는 놓치지 않았다.
-쿠워어어어엉!
있는 힘껏 공중으로 도약한다. 도약해서 녀석의 등 뒤로 착지한다. 무방비 상태인 뒷머리를 향해 타이는 앞발을 휘둘렀다.
이대로 휘두르면 녀석의 머리는 부서질 거다. 제아무리 튼튼한 갑주라 해도 호랑이 발톱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타이는 그대로 정지되었다.
[…뭐, 야?]
움직일 수가 없다. 놈을 향해 휘두른 앞발은 물론이요, 몸도 움직이질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당혹스러워하던 타이는 그 이유가 뭔지 바로 깨달았다.
[이, 이건….]
넝쿨 식물처럼 괴물의 등 뒤에 연결되어있는 검은색 굵은 촉수들이, 그 촉수들 끝에 달린 아홉 개의 창날이 타이의 전신을 꿰뚫었다. 검은 괴물은 그 상태로 있는 힘껏 타이를 내던졌다. . 내던져진 타이는 바다에 풍덩 빠져버렸다.
-쿠워어어어억?
얼른 수면 위로 올라온 타이였으나, 그 직후 커다란 그림자가 낙하했다.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타난 검은 괴물은 타이의 목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쿠어억, 쿠어어억, 쿠어어어억!
그대로 바다에 대가리를 박아버리고, 빼고, 박아버리고 빼기를 반복한다. 타이가 축 늘어질 때까지 강림은 계속 물고문을 이어갔다.
-끄어어어어….
더는 박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검은 괴물은 타이를 오른손으로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여우섬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호랑이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생쥐가 된 호랑이를 향해 주먹을 움켜쥔 괴물은,
-쿠어억?
타이의 몸속으로 주먹을 찔러넣었다. 털가죽을 뚫고, 근육을 뜯어내고, 뼈를 부러뜨리며 타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괴물은 흡수하기 시작했다.
'히, 힘이….'
힘이 빠져나간다. 설화에게 하사받은 힘이, 선조 대대로 이어받은 힘이 녀석에게 빨려 들어간다. 막아야 하나, 앞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턱은 움직여지지 않는다. 타이의 시야는 점점 어두워져 간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근데, 왜 이렇게 해방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그리고,
[깽판을 친 대가는 확실하게 받을 테니 각오하고 있으라고.]
어째서 저 괴물의 입에서 가증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그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타이는 의식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