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 - 41화- 바뀐 운명을 받아들이는 게 도리
"호오, 의외로 잘 버티는 구나."
거북이 등껍질을 연상케 하는 집이 언덕 위에 있었다. 언덕 밑에도 거북이 등껍질을 연상케 하는 집 여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곳은 거북이족이 사는 마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고도가 높은 지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대 유물을 통해 안개로 마을 외곽을 가리고 있기에 그 어떤 외부인도 쉽사리 마을로 침입하지 못한다.
안개를 형성하는 고대 유물은 거북이족 수장이 관리하고 있으며,
"좋아, 그럼 이렇게 가볼까?"
현 수장인 아켈론이 강림을 괴롭힐 목적으로 그 유물을 마음대로 써먹는 중이다.
"파도는 좀 지겨우니까…그래, 비를 내리는 게 좋겠구나."
그리 결정을 내린 아켈론의 앞에는 나무판으로 만든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은 고운 모래로 가득 차 있으며, 놀랍게도 강림이 도전하고 있는 시련의 숲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래로 만든 시련의 숲 위에다 아켈론이 모래를 팍팍 뿌리니,
[파도 다음에는 폭우냐! 이런 썩을!]
늪 가장 자리까지 도달한 강림 머리 위로 어마어마한 양의 폭우가 쏟아졌다. 아켈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여러 번 잘 써먹은, 모래로 만든 파도 모형 수십 개를 상자에 비치했다. 비치한 장소는 지금 강림이 서 있는 곳.
잠시 뒤,
[정말 가지가지 한…우아아아악!]
사방팔방으로 닥쳐오는 흙색 파도의 연쇄 공격에 강림은 주인 잃은 축구공처럼 이리 떠밀려 다녔다. 그렇게 떠밀려 다니다가 또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써, 썩을 거북이 새끼. 오늘 반드시 먹어주마.]
강림은 씩씩 거리며 다시 늪 속으로 걸어갔고, 그 광경을 아켈론은 수정구를 통해 보고 있었다. 자신을 먹겠다는 소리에 아켈론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후후, 날 어떻게 먹으려고 그럴까? 뭔가 기대되는데?"
검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단발머리의 할망구는 그렇게 상대방을 비웃었다. 할망구치고는 주름이라곤 하나 없고 허리는 구부러져 있지 않은, 젊은 20대 초반 언니처럼 보인다.
이는 거북이족의 특징이다.
장수하는 종족인 만큼 노화도 그만큼 느리다. 느리기 때문에 아켈론의 현재 나이가 100살임에도 파릇파릇한 청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거북이족 평균 수명이 300살임을 감안하면 적어도 200살까지는 젊은 언니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거다.
나이 대에 걸맞게 점잖게 행동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어떠냐, 수아야. 너도 이놈 당하는 걸 보니까 기분 좋지?"
옆에 앉아서 이를 구경하던 수아를 향해 아켈론은 물었다.
"…."
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켈론의 배려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이들과 달리 솥단지에 갇히지 않게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수아는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강림이 개고생 하는 걸 봐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질 않았다.
'왜 이리 불쾌하지?'
뭔가 불쾌하다. 기쁘기보다는 이상하리만큼 화가 난다. 마치 자신의 남자가 모욕당하는 것에 화가 나는 기분이랄까? 놈에 의해 강제로 노예가 되었으니 놈이 구르는 모습에 기뻐해야 함에도 수아는 전혀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 할망구, 조질까?'
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래 하자. 어차피 등껍질도 안 입은 상태잖아.'
현재 아켈론은 맨몸이다. 몸을 보호해줄 등껍질을 벗은 상태다. 지금이라면 당장 죽일….
'잠깐, 잠깐 내가 무슨 생각을….'
수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했다.
'나 왜 이러지? 저 녀석은 진짜로 싫은데….'
틈만 날 때마다 자신을 희롱하는 녀석이다. 틈만 날 때마다 자신의 가슴을 장난감처럼 주무르고, 모유를 강제로 빨아먹고, 참기 힘들면 억지로 범하는 녀석이다.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해도 아이도 기뻐할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질내사정을 거침없이 한다. 입으로도 매일 고약한 정액을 먹이는 것도 잊질 않는다.
그런 쓰레기를 싫어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자신과 동족을 가축으로 삼은 녀석이니 증오하는 게 마땅하다.
그래야 하거늘,
'왜 불쾌하지?'
증오가 아닌 감정에 휩싸인다. 분노도, 원한도 아닌 감정에 수아의 마음은 점령된 지 오래였다. 그 어떤 것도 그 감정이 만들어내는 독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중독된다. 수아 역시 그 독기에 점점 취해가고 있으며, 해독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가버렸다.
색욕이라는 이름의 독기에 중독되었기에 수아는 아무리 강림이 험하게 구르는 모습을 봐도 기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쁨을 나눠주는 존재가 고문당하는 거니까.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불쾌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아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깨닫게 될 거다.
"역시, 수아 너는 빠졌구나."
그 점을 아켈론은 처음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지적에 수아는 깜짝 놀랐다.
"빠, 빠지다뇨. 무슨 소리를…." "저 그리드에게 푹 빠지지 않았냐?" "바, 바보 같은 소리를, 제가 왜 빠져요!"
수아는 부정했다.
"제가 뭐가 좋다고 저 녀석을, 저 녀석을…." "부정하지 말거라. 네 몸과 마음은 이미 녀석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걸 다 알고 있단다."
아켈론은 괜찮다는 듯이 수아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네가 그리 될 거란 사실을 별들을 통해 알았으니까." "벼, 별을 통해서요?"
원래 거북이족은 바다를 향해할 때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별들을 자주 관찰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 습관 덕에 웬만한 거북이족도 오늘내일 하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아켈론은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다. 별들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 점을 칠 수 있다. 어떤 미래가 닥치는지도 예언할 수 있다. 가끔 가다 틀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 그녀가 본 점은 전부 다 들어맞았다.
수아는 내심 그 점이 틀리기를 원했다.
"잘못된 거 아니에요? 제가 왜 녀석에게…." "너 뿐만이 아니란다."
자신이 본 미래가 뭔지 아켈론은 넌지시 알려줬다.
"나도, 너도, 그리고 다른 수장들은 물론이요, 다른 수인들도 녀석의 노예가 될 운명이란다." "무, 뭐라고요?" "그 운명이 나는 그나마 나은 거라고 보고 있지."
다음 아켈론이 하는 말에 수아는 경악했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다고 나왔단다."
불길함의 상징인 흑색별이 떠올랐다. 그 흑색별을 중심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자들을 상징하는 별들이 떠올랐으며, 그 별들이 전부 검게 물들어져 갔다.
검은색의 의미는 죽음. 즉, 자신들은 그리드라는 흑색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게 원래 미래였다.
그 미래가 바뀌었다.
"그랬는데, 바뀌었어. 흑색별이 보라색별로 바뀌었지." "…." "그리고 보라색 주위에 있던 모든 별은 검은색에서 붉은색이 되었고." "…." "그게 뭘 의미한지 말 안 해도 알겠지?"
보라색의 상징은 지배. 그리고 붉은색의 상징은 정복. 보라색별을 그리드로, 붉은색별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임을 대입해보면,
그리드가 이들을 전원 노예로 삼는다는 미래가 나온다. 그리고 그 미래는 차근차근 실현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구미호족, 토끼족, 들소족 등 수많은 수인이 그리드의 노예가 되거나, 되어가고 있는 중이니까.
"그, 그러면 당신은 이게 조, 좋다고 보는 겁니까?"
수아는 물었다.
"우리가 녀석의 가축으로 사는 게 좋다고 보는 건가요?" "그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아켈론은 긍정했다.
"지금 저 남자의 별을 중심으로 모든 별이 붉게 변하는 걸 봐버렸으니까."
그 긍정을 부정할 말은 한 마디도 아켈론의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운명에서 도망칠 길은 어디에도 없단다, 수아야." "다, 당신도 저처럼 될 건데, 그래도 상관없나요? 당신 손녀도, 동족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야 한다면 마땅히 그래야지."
아켈론은 반박하지 않았다.
"남자의 씨가 마른 우리에게 있어 저 그리드란 남자에게 매달리는 게 유일한 답이거든." "나, 남자의 씨가 마, 말려요?" "너도 여기까지 오면서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니?" "아…."
이제야 수아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남자들이 보이질 않았어.'
자신들을 나포한 거북이족 병사들은 전부 여성이었다. 섬에 도착한 이후로도 거북이족 남성은 그림자 하나 발견되질 않았다. 수인 연합에도 참가하질 않았던 거북이족인데, 남자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연합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탈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켈론은 참담하다는 심정으로 알려줬다.
"전염병에 남자들이 다 죽었단다." "저, 전염병?" "이상하게도 남자만 걸리는 이상한 병이었지."
어느 날, 갑자기 전염병이 창궐했다. 병에 걸린 남자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전부 목숨을 잃었으나, 여자들은 멀쩡했다. 너무나 이상한 병이라 하늘에서 저주를 내린 게 아니냐는 헛소문까지 퍼질 정도였다.
"병은 사라졌지만, 우리 종족을 보존할 방도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어."
어린 아이들까지 목숨을 잃었다. 미래를 책임질 새싹마저 전부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괜찮지만, 수백 년 뒤에는 거북이라는 종족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다.
그래서 아켈론은 강림을 시험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저 그리드라는 사내를 우리의 씨앗 배출기로 쓸 작정이란다."
어차피 그리드라는 정복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이용하자. 녀석의 씨앗을 품어 동족을 보존하는 게 써먹자.
그럴 작정으로 지금 아켈론은 강림을 시련의 숲에 던져 놨다. 먹히지도 않을 인질극까지 벌이면서.
“배출기로 쓸 만한 지 알아보기 위해서 저렇게 굴리고 있지.”
또다시 파도에 휩쓸려나가는 강림을 가리키며 아켈론은 그리 설명했다.
"왜 굳이 번거로운 짓을…." "평범한 남자의 씨앗은 받기 싫으니까."
아주 정상적인 답이었다.
"강인한 남자의 씨앗만이 우릴 구원할 수 있으니까."
수인다운, 아주 정상적인 답이었다.
“그 대가가 가축이라면 우린 받아들일 거란다.” “그게 운명이니까요?” “그래.” “….”
아무리 운명을 수용해도 저항할 때는 저항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긍정하는 거 아냐? 수아는 그리 생각했지만, 이미 답을 정한 아켈론의 마음을 바꿀 방도가 그녀에겐 없었다.
"그게 당신이 바라는 거라면 저도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수아는 반박하지 않았다.
"당신 말대로 저도 녀석에게 빠져드는 것 같으니까. 운명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대신, 물었다.
"저래도 괜찮을까요?"
강인한 남자를 원한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분명 도착하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미쳐 날뛰고도 남을 텐데, 괜찮을까요?"
적당히 굴려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시험한다 해도 저렇게까지 악랄하게 굴리면 아무리 심성이 착한 사람도 폭발할 수밖에 없을 텐데? 특히, 자신들보다 강한 녀석이라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기 힘들다.
"괜찮단다, 수아야."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는 투로 아켈론은 단언했다.
"저곳을 통과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설사 온다 해도 기진맥진해서 날 먹을 수도 없을…."
그때였다.
-쾅!
갑자기 대문이 부서졌다.
"…." "…."
아켈론과 수아는 말없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경악했다.
"찾았다, 망할 거북이 자식."
그리드, 아니 강림이었다. 물에 흠뻑 젖은 그는 성큼성큼 아켈론에게 다가갔다. 시련의 숲에 도전하기 전에 받았던 막대기는 부러졌는지 손아귀에 없었다. 대신, 양손으로 안아서 들고 온 것이 하나 있었다.
"하, 할머니. 죄, 죄송해요…."
아켈론과 똑같은, 검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단발머리. 눈동자는 금색인 아켈론과 달리 은색이었다. 강림과 마찬가지로 물에 흠뻑 젖은 알몸의 여성은 아켈론에게 사죄했다.
그녀의 입과 가랑이 사이에선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이, 이게 무슨…."
이렇게라도 빨리, 그것도 자신의 손녀를 데리고 온 것에 아켈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