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 - 35화- 망망대해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하늘이 참 맑구나.”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푸른 하늘을 보며 강림은 크게 감탄했다. 흔들리는 파도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고, 찌는 듯한 더위에 목이 타들어 가는 신세지만.
“너무 맑아서 구조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표류한 지 벌써 3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주인의 기함이 침몰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전해지지 않았는지 다른 철선이 보이는 일은 없었다. 적측의 범선이 나타나는 일도 없었으며, 섬 하나 보이는 일도 없었다.
군도라면서 왜 주위에 섬이 보이질 않는 걸까? 혹시 멀리 떠내려가 버린 걸까? 아니, 오히려 근처에 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한 걸까? 있다면 어떤 섬일까? 우리 섬일까? 아니면 적의 섬일까? 가능하면 전자였으면 좋겠는데, 후자라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기란 무기는 죄다 수장되었는데.
이럴 때가 구조대가 나타났으면 정말 좋겠는데. 보통 이럴 때 만화 같은 전개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닐까? 아니, 분명 나올 거다. 게임 속 세상인데 당연히 가능해야지, 안 그러나?
그래, 오늘은 분명 구조될 거다. 분명 하늘도 도와주실 거다.
그렇게 강림은 미쳐가고 있었다.
“…너, 더위 먹었냐?”
그런 강림의 헛소리에 수아는 어이가 없었다. 할 일이 없으면 힘 빼지 말고 낮잠이나 자지, 왜 저렇게 피곤한 짓만 하는지. 가뜩이나 더워서 짜증이 나 죽겠는데, 저렇게 발광하는 꼴을 보니 더 짜증이 난다.
하다못해 그냥 자라. 네놈이 뭐라고 하든 아사할 길을 피할 방도는 없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수아는 입을 열었다.
"그냥 잠이나 자. 헛소리 좀 그만하고오오오오옥?"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아는 자지러졌다. 또 강림이 옆구리를 간지럽혔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수아의 전신은 금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미안하지만, 계속 헛소리 좀 하게 해줘." "하으으, 흐으으…."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강림의 말대로 미쳐버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아니, 3일이나 지났는데 왜 아무도 안 와? 적이든 아군이든 우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견딜 수 없기에 강림은 발광하기 시작했다. 쾅쾅 배를 두들기니 구명정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야, 그만해, 그만! 다 죽일 작정이야!”
결국 수아가 직접 자신의 가슴골에 강림의 머리를 껴안고 나서야 발광은 멈췄다. 이 광경을 본 병사들과 간부들은 크게 안도했다.
“음, 편하군.”
배를 뒤집힐 뻔한 주제에 강림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이대로 계속 있어 줘. 그래야 잠이 들 것 같으니까.” “으으, 이 썩을 놈….”
당장이라도 바다에 처박아버리고 싶었지만, 수아는 참았다. 처박아버리면 곤란한 건 수아 자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 타이 새끼를 잘 가둬놨어야 했는데.”
강림은 크게 후회했다.
“잘 가둬놨으면 이 꼴은 나지도 않았을 텐데….”
강림은 자신의 기함을 잃어버렸다. 그 어떤 배도 철선 앞에서는 인간에게 짓밟히는 개미나 다름없었거늘, 하필 그런 식으로 수장당하는 최후를 맞이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타이가 그 힘을 진짜로 쓸 줄이야.'
기함이 수장시킨 범인은 타이. 타이가 <본능 회귀>라는 기술을 써서 거대한 호랑이가 되었다.
‘그 기술, 1부 마지막에 나오는 걸로 알았는데….’
<본능 회귀>는 기술명 그대로 수인들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의미한다. 즉, 강림이 마주 본 거대한 호랑이는 타이의 본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창조주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거대한 호랑이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전부 내 불찰이야. 끝까지 감시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자기 변신했기에 누구도 이를 막을 틈이 없었다.
결국 타이는 탈출해버렸고, 배에 큰 구멍을 나버렸다. 너무 커서 땜빵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이 사실을 전달받은 함장은 즉각 배에서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하달되자 살아남은 자들은 익사 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구명정으로 향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였으나, 함장의 재빠른 판단 덕에 상당수의 병사는 생존할 수 있었다. 간부들과 함장, 그리고 수아와 강림도 마찬가지. 비록 폭발에 휘말려 사망하거나, 미처 빠져나오질 못해 익사한 자들이 있었지만, 전체 인원 200여 명 중 3분의 2가 살아남았다는 건 기적이었다.
이점에 대해선 강림도 다행스럽게 여겼다.
'다행이긴 하다만….'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배가 너무 작아.’
생존자들을 전부 태우기에는 구명정이 너무 작았다.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가서 언제 가라앉을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수아가 강림이 날뛰지 못하게 붙잡은 것도, 병사들이나 간부들이 꼼짝도 못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구명정이 한두 척 정도 있었다면 인원을 배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기함에 있던 구명정은 한 척밖에 없었다. 한 척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배가 침몰당할 위기를 겪질 않았기에 딱히 구명정을 추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느끼지 못했기에 걱정과 불안으로 망망대해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만약에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구명정을 더 실으라고 지시를 내리자. 언제 배가 침몰할지 알 수 없으니까. 보험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강림은 속으로 그리 다짐했다.
'문제는 타이인데….'
살아서 돌아간다 해도 타이를 어찌 상대할 거냐가 문제다. 가능하면 생포해서 평생 가축으로 써먹고 싶지만, 이번에는 뜻대로 안 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사살도 고려해야 한다. 수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타이에게 안식을 줘야만 한다.
근데, 정말로 죽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걸까? 강림은 다시 한번 수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 수아. 한 번 변신한다고 다시 수인으로 돌아올 수 없는 거야?" "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수아는 대답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번 변신한다고 짐승으로 전락하진 않아. 자신이 원하면 변신을 풀 수 있어."
하지만, 라고 운을 뗀 수아는 다음 사실도 알려줬다.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전에 얘기했던 대로 타이는 짐승으로 전락할 거야.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질 못한 채 본능만 남은 호랑이로 살아가겠지.” “그럼 기회는 있다는 거군.”
변신이 풀릴 때까지 진을 다 빼버리면 타이 확보는 가능할지 모른다. 이것에 대해선 나중에 이리스를 만나면 상의해보자.
이제 가장 궁금한 걸 물어볼 차례다.
"저기, 수아 너는 왜 타이가 변신할 수 있었는지 알아?"
강림은 그게 가장 궁금했다.
게임에선 해당 기술을 얻은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는데, 타이는 그런 시련들을 겪지 않고 단숨에 그 기술을 사용했다. 자신이 모르는 수단이 존재하는 건지, 있다면 그 수단이 뭔지 강림은 알고 싶었다. 변수는 최대한 배제하는 게 좋으니까.
"나도 잘 모르지만…."
수아는 타이에게 옛날에 들었던 말을 알려줬다.
“호랑이족 수장은 그 힘을 쓸 귀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들었어. 나처럼 말이야.” “잠깐, 혹시 너도….” “맞아.”
수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나도 변신할 수 있어.” “지금은?” “못하지. 네가 가져갔는데.”
이제야 강림은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귀물이 열쇠였구나.’
까다로운 조건을 전부 생략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했다니. 그 수단을 수아도 가지고 있었다니. 너무 놀라서 강림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정작 이야기를 꺼낸 수아는 씁쓸했지만 말이다.
‘나도 타이처럼 할걸. 왜 안 했을까?’
타이는 기회를 봐서 최후의 수단으로 <본능 회귀>를 사용했다. 그 결과, 이 쓰레기에게 한 방 먹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한가? 암살에만 매달려 정작 그 힘을 쓸 생각도 안 했다. 자신이 짐승으로 전락하는 게 무서워 한 번도 그걸 쓴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만약 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만하자. 이미 다 지난 일이야.’
이미 다 끝난 일이다. 자신도 주민들도 전부 가축이 되어버린 마당에 뭘 노릴 수 있단 말인가. 녀석에게 모든 걸 다 바친 주제에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포기하고 녀석의 노예로 사는 게 최선이다.
비록 녀석의 수발을 항상 들어야 하는 것에 짜증이 난다 해도 말이다.
"귀물이라…그게 조건이었나."
설마, 그것이 변수로 작용할 줄이야. 단순히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물건인 줄 알았는데, 그 이상의 것을 하는 게 가능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변신할 생각조차 못 하게 고문 강도를 높이는 거였는데. 조만간 함락될 테니 느슨하게 가자는 자신의 나태함이 강림은 너무나 부끄러웠다.
동시에 의구심이 들었다.
"수아, 타이가 가진 그 귀물이 내가 먹은 요력석과 똑같아?" "직접 보진 못했지만, 같을 거야." "그럼…."
강림은 물었다.
"나는 가능하냐?" “무슨 의미?” “그러니까, 나도 변신 할 수 있냐고.” “….”
변신하는 게 수인들에게만 한정되냐? 힘을 흡수한 인간도 사용할 수 있지 않겠냐? 그런 의미로 강림은 물었지만, 수아는 묵묵부답이었다.
"야, 대답." "…." “어쭈, 그리 나오시겠다?”
강림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 손에 리모컨이 있다는 걸 확인한 수아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그, 그건…." "혹시나 해서 챙겨왔지. 왜, 잃어버리길 원했냐?" "으…." "자, 말을 듣지 않은 대가로 벌칙을…." "자, 잠깐! 말할게, 말한다고!"
이 새끼 하는 말에 네네, 하고 싶지 않아서 묵비권을 행사했는데. 또 강제로 절정 당하는 건 사절이다. 결국 수아는 백기를 들었다.
"사실, 나도 몰라."
솔직하게 대답했다.
"인간이 그 힘을 썼다는 전례는 한 번도 없었다고." "그래?" "그리고, 쓸 수 있다 해도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넌 할 거야?" "음…."
확실히 될지 안 될지 불분명한데 이를 감수하고 쓸 가치가 있을까? 괜히 도박해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고 사태를 유심히 지켜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현재 타이 상태는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분명 그 녀석은….'
모든 걸 끝낼 수 있었을 거다. 그 자리에서 강림을 죽일 수 있었을 거다. 원수를 갚을 수 있었을 거다.
그럴 기회가 왔음에도 타이는 하질 않았다. 자신을 보고 분한 듯 으르렁거렸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냥 도망갔다.
왜 그랬을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터진 게 아닐까? 만약 정말로 문제가 있다면 공략에 도움이 될….
"주인님, 즐거운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이때 말총머리를 한 남색 머리의 여성이 다가왔다. 여성을 향해 강림은 고개를 돌렸다.
"함장, 무슨 일이야?"
함장이었다. 본래는 군복을 입어야 하나, 풍만한 가슴과 골반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속옷만 입고 있었다. 구명정에 타기 직전에 그만 물에 빠지는 바람에 옷이 젖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속옷 차림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함장은 심각한 얼굴로 보고했다.
"긴급 상황입니다.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