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 - 27화- 승리의 열쇠는 기억 속에 있다
“으으….”
귀가 울린다. 너무 울려서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명 호랑이 새끼를 향해 망치를 휘두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강림은 힘겹게 눈을 떴다.
“이제야 일어나셨나?”
눈앞에 주황색 사자 갈기를 가진 여자가 보였다.
“죽은 건가 싶었는데, 역시 네놈도 운이 좋네.”
타이. 호랑이족 수장이자 강림이 파멸하는 결말에서 벗어나냐 아니냐의 분기점이 될 여자. 타이는 의기양양한 자세로 강림을 내려다봤다. 곳곳에 생채기가 많이 나 있지만, 강림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좋아. 이대로 놈들과 협상하면 되겠어.” “협…상?”
강림의 물음에 타이는 대답했다.
“네놈을 이용해 포로가 된 전사들을 되찾을 생각이거든.”
타이는 승리했다. 수인들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폭군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묵사발로 만들었지만, 탈환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각 부족에서 차출한 정예병들이지.”
본래라면 이겼어야 할 전투였다.
“해적 놈들에게 한 방 먹일 기회이니 전사들 좀 보내달라고 사정했지. 이 타이 님이 있으니 문제없다고 설득했고.”
타이의 말처럼 문제가 없어야 할 전투였다.
“이렇게 쓸려나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그래야만 했던 전투였는데, 패배하고 말았다. 전사들은 전멸하고, 함대는 수장당하고 말았다. 토끼섬을 탈환하고, 배신자 레비를 처단하겠다는 타이의 계획은 대실패로 끝나버렸다.
“최소한 전사들이라도 데리고 나가야만 해. 그래야 체면 좀 살릴 수 있지.” “….” “그러니까, 네 놈이 나 좀 도와줘라.”
끝나버렸으나, 아직 기회는 있었다.
“네놈 부하들에게 소리쳐. 살려달라고. 살고 싶으니 포로들을 당장 풀라고.” “….” “아, 탈출할 배도 마련해 달라고 소리쳐. 이 섬에 갇힐 순 없으니까.”
이 그리드라는 쓰레기를 이용한다면 모두와 함께 도망칠 수 있을 거다. 도망칠 수 있다면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 거다.
그래서 타이는 차선책을 택했다. 그리드를 습격해 녀석을 포로로 잡으려 했다. 중간에 하마터면 패배할 뻔했지만, 결국 타이는 승리를 거뒀다.
“이왕 얻는 거 네놈의 배 좀 가지자. 그 요새, 한번 갖고 싶었거든.”
전투에서 패배한 호랑이 주제에 요구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
“대체 그 요새는 어디에서 얻은 거지? 이 타이 님이 인간들의 전함을 많이 봤지만, 온통 철로 된 함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 “어떤 경위로 얻은 거야? 응, 응, 응, 응?” “…야.”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던 강림이 입을 열었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뭐?” “쫑알쫑알 왜 그렇게 말이 많냐? 패배한 주제에.”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다. 전투에서 진 주제에 왜 승자처럼 구는 거지? 패배자라면 굽신거려야지, 뭔 말이 많아? 포로로 잡혔으니 얌전히 있어야 하나, 하도 시끄러우니 강림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항복하지 그러냐? 어차피 돌아가봤자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소리나 들을걸?” “웃기는 소리. 이 타이 님이 없다면 누가 네놈들과….” “멍청한 자식. 아직도 너희들이 잘 버티고 있다고 여기는구나.”
타이도 모르는 비밀을 강림은 조금 밝혔다.
“나한테 편지가 하루에 수십 통 이상 오는데.” “편지?” “그래, 어떤 사람들이 나한테 편지를 보낼까?”
강림을 보던 타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떤 편지인지 한 번 맞춰…으윽?”
타이는 강림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쓰레기가 어디서 말을 함부로 놀려.”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타이는 강림을 노려봤다. 장난기 넘치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포로로 사용하려고 살려뒀는데, 어지간히도 심심 하나 보구나.” “아아악!” “갈비뼈 몇 개 좀 부러뜨리자. 그러면 얌전해지겠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타이는 강림을 걷어찼다.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강림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으으윽….” “호오, 잘 버티는구나.”
타이는 쓰러진 강림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퍽, 퍽, 퍽, 퍽!
들어 올린 상태로 주먹질을 한다. 이빨 몇 개가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타이는 주먹을 내렸다.
“말 조심해라, 쓰레기.”
타이는 경고했다.
“네놈을 살리는 건 어디까지나 전사들을 위한 거다. 전사들이 포로로 잡히지 않았다면 이런 짓은 하지도 않았어.”
경고를 무시하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보여주기 위해 주먹을 들었다.
“또 내 신경을 건들면….”
타이가 주먹을 내질렀다.
“진짜 죽여버릴 줄 알아라.”
단순한 정권 찌르기나,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강림의 머리를 스친 찌르기가 뒤에 있는 나무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렸으니까.
“그러니 얌전히 있어.” “윽!”
타이가 손을 놓자 강림은 그대로 엎어졌다.
“제, 제기랄….”
역전할 줄 알았다. 타이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자 어쩌면 이길 수 있다는 망상에 빠졌다. 망상에 빠진 나머지, 타이가 숨겨둔 수가 있다는 걸 눈치채질 못했고, 패배로 직결했다. 만약 강림이 좀 더 눈치가 빨랐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싸워야만 한다. 이대로 타이를 놓칠 수 없다. 여기서 놓쳐 버리면 언제 또 타이를 사로잡을지 알 수 없다. 반 그리드 동맹이 합류하기 전에 노예로 삼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눈으로 타이의 움직임을 쫓아갈 수 있으나, 아까처럼 당할 수 있다.
압도해야 한다. 녀석을 압도할 격투술이 필요하다. 망치를 잃어버렸으니 남은 것은 맨주먹뿐. 맨주먹으로 타이를 제압해야 한다.
하지만 강림은 현실에서도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초보자다. 아무리 최종 보스의 육신을 가졌다고는 해도 주인이 초보자인 이상 튼튼한 샌드백에 불과하다. 신명 나게 얻어맞다가 절명하게 될 거다.
‘역전시킬 방도를. 녀석을 쓰러뜨릴 방도를 찾아야 해.’
그래도 찾아야만 한다. 망치가 부러졌어도, 얼굴이 뭉개졌어도, 몸에서 비명이 지른다 해도 찾아야 한다. 타이를 쓰러뜨릴 수단을 찾아내야 한다.
그때 배운 기술만 제대로 떠올릴 수 있다면….
“음?”
순간, 강림은 눈이 확 떠졌다.
‘그때 배운 기술이라고?’
무슨 기술을 배운 걸까? 그리드가 무언가를 배운 건가? 강림은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굴리고, 굴린 끝에 마침내 떠올렸다.
-하압!
훈련받고 있는 그리드의 모습이 보인다. 여장부로 추정되는 스승과 격투를 벌이고 있다. 처음에는 매일 지던 그리드는 어느 순간 스승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하아, 오라고, 이 새끼들아!
어느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인 그리드의 모습이 보인다. 누가 보면 그리드가 위기에 빠졌다고 볼 수 있지만, 아니었다 이미 그리드의 등 뒤로 처참하게 박살 난 인간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광경을 본 강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승을 통해 갈고 닦았던 그리드의 격투술을. 가문의 후계자는 강해져야만 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배워야만 했던 격투술이 강림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입력이 끝날 때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
강림은 말없이 일어섰다. 그걸 본 타이는 깜짝 놀랐다.
“음? 뭐야, 아직도 설 수 있어….”
그 순간이었다.
-퍽!
갑자기 눈앞이 번쩍거린다.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지 못한 타이는 땅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자신이 강림의 주먹에 얻어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자식….”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알게 된 타이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좋게 말해줬더니만, 오냐 널….”
-퍽!
“아악!”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스트레이트 주먹에 타이는 또다시 얻어맞았다. 타이가 고개를 들려는 순간, 강림이 날린 돌려차기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어, 어떻게….”
다 죽어가던 새끼가 어찌 저런 힘을? 당혹스러워하는 타이 앞에서 강림은 비웃었다.
“아주 고맙다, 호랑아.”
강림은 주먹을 쥔 채로 자세를 잡았다. 몸에선 여전히 비명이 들리지만, 애써 무시했다.
“네놈 덕분에 잃어버린 걸 되찾았으니까.” “이, 잃어버린 것?” “알아먹을 필요는 없어.” “윽?”
잽을 날리는 강림. 타이는 잽싸게 고개를 틀어 피하고 똑같이 잽을 날렸다. 강림 없이 똑같이 고개를 틀어 피했다.
“넌 내 노예가 될 테니까.” “웃기지 마!”
이렇게 2차전이 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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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뭐야 이 새끼?’
다 죽어가던 놈이 어찌 이런 힘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타이가 재빨리 고개를 숙여서 피했다. 바로 주먹을 날려 역습했으나, 강림은 우습다는 듯이 피했다. 피하고, 양손으로 왼팔을 붙잡고,
집어던졌다.
“윽?”
간신히 중심을 잡은 덕에 타이는 넘어지지 않았다.
‘이 녀석, 위험해.’
왜 갑자기 강해진 건지 알 수 없다. 갑자기 경지에 오른 건지, 아니면 타이 자신도 모르는 수단을 쓴 건지 알 수 없다. 아는 것은 하나.
녀석은 타이가 지금까지 상대한 적보다 무시무시한 놈이 되었다는 거다.
‘간악한 술수라도 쓴 건가?’
소문으로 들었다. 이 해적들은 올곧은 전사도 광대로 만드는 힘이 있다고. 어쩌면 그 힘을 역이용해서 강해진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사냥감으로 전락한 게 아닐까?
대체 무엇이 일어난 건지 타이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공포보단 강적과 싸울 수 있다는 고양감으로 가득 찼다.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어.’
싸울 맛이 난다. 수인들 사이에서 이토록 흥분시킨 존재는 없었다. 그런 존재를 만났다는 사실에 타이는 너무나 기뻤다.
맞붙고 싶다.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전력으로 맞붙고 싶다. 선대 수장도 그러지 않았나? 강자들과의 혈전을 통해서야만 강해질 수 있다고. 그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타이는 깨달았다.
하지만, 타이가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우윽?”
압도적인 차이 앞에선 고양감이든 뭐든 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사실을. 안으로 파고든 강림이 무릎 찍기를 날렸다. 쉴새 없이 가슴을 향해 무릎 찍기를 날리자 타이는 버티질 못하고 토사물이 내뱉었다.
“우에에에…쿠학?”
그대로 강림이 팔꿈치로 타이의 등을 세게 찔렀다. 타이가 그대로 엎어지려는 순간,
“크헉?”
강림이 날린 발차기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으으…젠장.”
한순간 방심이 이리도 뼈아플 줄이야. 간신히 일어선 타이는 쇄도하는 강림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똑같이 대응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이,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흙먼지에 타이는 눈을 감았다. 강림이 미리 준비하고 손에 쥔 흙을 뿌린 거다. 타이는 주춤거렸으며, 강림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아악!”
어퍼컷으로 턱을 날린다.
“커헉!”
주먹으로 얼굴을 쳐 강냉이를 날린다.
“이, 이 대로 당할…아아아악?”
양팔을 잡고 뒤로 꺾어 버린다.
“아, 아직 타이 님에겐 다리…아아아악!”
두 다리도 짓밟아 다신 걷지 못하게 만든다.
“아으으으, 으으으….”
싸움은, 아니 일방적인 구타는 끝났다. 무력화된 타이의 머리채를 붙잡은 강림은 그대로 들어 올렸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는지 자신감 넘치던 타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고맙다, 호랑아.”
강림은 속삭였다.
“네 덕분에 새로운 걸 깨우쳤으니까.” “으으…이, 이….” “그러니까 선물을 줄게.”
무슨 선물을 준다는 걸까? 역으로 강림에게 끌려가게 된 처지가 되었음에도 타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싫어, 싫어, 싫단 말이다! 나는, 나느으으으은!”
그 선물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