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 - 24화- 위기의 토끼섬
-쿠우웅!
천장이 흔들린다. 폭발음과 함께 먼지와 잔해가 우수수 떨어진다. 알현실에 있는 모든 신하가 동요하나, 왕좌에 앉아 있는 한 사람만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쾅!
흰색 장발의 여왕이 검을 바닥에 내리치자 웅성거리던 신하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할 뿐. 신하들 사이에 피어오른 불안을 해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여왕, 토끼족의 수장 레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이곳은 토끼섬. 머리에 길쭉한 귀가 달려있고 엉덩이에는 앙증맞은 솜사탕처럼 생긴 꼬리가 있는 수인, 토끼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다른 수인들과 달리 일찍이 인간들의 문명을 받아들였기에 왕국과 비슷한 체제를 형성했다. 비록 영토는 섬 하나에 불과하지만, 자신들의 나라가 세워졌다는 사실에 토끼족들은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다.
현재는 해적 대함대 <더 퀸즈>의 속국으로 전락했지만.
‘왜 이럴 때 안 오는 거야?’
토끼족들은 특이하게도 전부 여성이었다. 남자 토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종족과 정사를 나눠도 언제나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이러한 이유로 통치자는 언제나 여왕이며, 그런 여왕을 보좌하는 신하들 역시 여자들이었다. 전통 복장인 바니걸을 입은 상태로 이들은 항상 국정을 논의했다.
현재 이들이 예외 없이 만삭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들 깜짝 놀라고도 남을 거다.
-쿵!
또다시 천장이 흔들린다. 이번에는 어딘가 직격으로 맞았는지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사람이 깔렸다! 누가 좀 도와줘!
-이거 어쩌면 좋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냐?
-바 보같은 소리를. 침략자를 앞에 두고 그런 소리를 할 거냐!
병사들의 절규도 사방에서 들려온다. 계속되는 포격에 여왕을 지켜야 하는 충심도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알현실에 있는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야 하지 않을까?
-바보야, 조용히 해. 여왕님에게 들리면 어쩌려고?
-그, 그래도 한두 명 나가도 사기가 떨어질 일은….
눈앞에 닥친 공포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 최초로 섬을 정복한 그 악마 앞에서 다들 고개를 들지 못했듯이. 그때는 어떻게든 살아남았지만, 이번에는 아닐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신하 몇 명은 도망칠 기회가 오기만을 원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알현실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여, 여왕 폐하….”
머리에 피투성이가 된 병사였다. 입고 있던 갑옷에는 무언가에 크게 할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병사는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연합의 상륙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신하들은 크게 동요했다.
“놈들은 이곳으로 진군 중입니다.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얼마 버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연합. 수인 연합이 토끼섬을 침공했다. 침공한 이유는 하나.
해적들의 소굴이 되었으니까. 저항하다 함락된 여우섬과 달리 들소섬과 토끼섬은 해적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내통했기에 지금 수인들이 해적들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고 연합에 속한 수인들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배신행위이며, 배신자는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 해적들이 다른 섬들을 공략하는데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 두 섬을 공격해야 한다. 만약 하나라도 점령에 성공한다면 해적 놈들에게 큰 타격을 입게 될 거다.
그러한 이유로 토끼섬은 공격받고 있으며, 함락되기 초읽기에 들어갔다.
“여왕님은 어서 피신하십시오.”
병사들은 간곡하게 요청했다.
“저희가 최대한 놈들의 진격을 저지할 테니, 어서!”
현재 토끼섬은 두 방향으로 공격받고 있다.
하나는 북쪽 해변.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에 수인 연합은 상륙 지점을 이곳으로 삼았다. 레비도 이를 모르진 않기에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북쪽 해변에 주둔시켰다.
다른 하나는 바로 왕성. 나라의 중심지인 왕성을 향해 무차별 포격을 퍼붓고 있다. 하필 왕성이 동쪽 해안가에 지어졌기에 연합 함대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본래라면 전투함을 동원해 함대를 몰아내야 하나, 지금 토끼족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리드가 침략했을 때 전부 수장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칼을 들이대지 못하게 전투함 건조까지 금지했기에 토끼족에겐 함대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해안 포대를 이용해 간신히 견제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신하들을 대피시켜라.”
레비는 지시를 내렸다.
“성안에 있던 병사들도 전부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려라.”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레비는 크게 한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이곳에 남을 테니, 너희들은 도망쳐라. 연합의 목적은 나일 테니.” “하, 하오나, 폐하. 그러시면….”
충심이 아직 남아 있는 신하가 만류했으나,
“감히, 내 명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엄한 목소리로 꾸중하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서 가라. 이 성이 사라지기 전에.”
결국 신하들은 하나둘씩 알현실을 떠났다. 이를 다행으로 여기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막상 떠나려 하니 다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굴욕적이니까. 받들고 모셔야 할 주군을 버리고 도망쳐야 한다는 게 너무나 굴욕적이니까. 만약 여왕이 돌아오라고 어명을 내리면 분명 따르고도 남을 거다. 하지만 레비는 자신과 지옥에 같이 갈 길동무가 되자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진짜로 여기에 남으실 겁니까?”
신하들의 대피 유도를 끝마친 병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잡히시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겁니다. 연합이 여왕님의 목을 가져가겠다고….” “두 번 대답하게 하지 말고, 얼른 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레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알겠습니다.”
이렇게 병사까지 다 나가자 알현실은 오직 레비 한 사람밖에 남질 않았다. 다 나간 걸 확인한 레비는,
“으아아아악!”
자신의 옥좌를 검으로 마구 패기 시작했다. 옥좌라는 껍질이 다 부서질 때까지 계속 팼다. 검이 부러지고 나서야 여왕의 화풀이는 끝을 고했다.
“젠장, 젠장, 젠장!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레비는 주저앉았다.
“그 망할 남자. 우릴 지켜준다고 했으면서….”
레비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제 백성들을 부디 살려주십시오.’
해적 대함대의 공격으로 섬이 함락되던 날. 레비는 토끼족의 안전을 위해 항복을 택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섬을 불모지로 만들겠다는 협박과 그 협박이 빈말이 아님을 깨달아버렸으니까. 이렇게 들소섬에 이어 두 번째 점령지가 된 토끼섬은 그리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싫어, 싫어! 다들 보지 말아다오, 보지 말아줘어어어!’
신하들이 다 모인 알현실에서 레비는 겁탈당했다. 항상 자신이 앉던 왕좌를 차지한 그리드가 레비의 옷을 벗기고, 흉악한 기둥으로 가랑이 사이를 때려 박았다. 왕좌 아래가 정액으로 호수를 이룰 때까지 그리드는 계속 박았으며,
‘쿨럭, 쿨럭…보지 말아줘. 제발, 눈을 돌려줘….’
코까지 역류할 정도로 입에 자지를 인정사정없이 박고, 사정했다.
그때 받은 치욕을 레비는 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의 귀감(龜鑑)이 되어야 할 자신이 해적 나부랭이에게 강간당하는 꼴이라니. 너무 부끄러워서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리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하앙, 하앙, 하앙, 하앙! 그만, 그만!
-죄, 죄송합니다. 여왕님. 저는 이제 이 남…하오오옥!
-바, 반드시 네놈에게도 처, 천벌이 내려질 거다아아아악!
알현실에 있던 신하들마저 강간했다. 자신처럼 임신할 때까지 허리를 계속 놀려댔다.
-흐이이익? 안 돼, 안 돼에에에!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 제발!
-흐아아아앙! 아파, 아파, 아파, 아프다고요오오!
백성들도 그리드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슨 세뇌라도 당했는지 그리드는 토끼족 전원을 임신할 때까지 허리 놀림을 멈추질 않았다. 수백 명에 달하는 토끼족을 전부 먹었음에도 허리가 나가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다른 남자들은 받아들이지 말도록.’
그렇게 토끼섬을 유린(蹂躪)한 그리드는 그리 명령을 내렸다.
‘받아들이면 이 망치로 깨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라.’
토끼족은 종족 번영을 위해 외지의 남자들을 납치한다. 납치해서 정액을 배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피부가 뼈에 달라붙을 때까지 남자들은 정액을 짜내야 하며, 짜낸 정액을 통해 토끼족은 자손을 낳는다.
그 짓을 그리드는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고, 그 엄명에 누구도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이 악마는 한다면 진짜로 하는 녀석이니까.
‘내 말을 열심히 들어준다면 너희들의 안전은 내가 보장해주지.’
진짜로 하기에 섬을 지켜준다는 약속도 제대로 이행해줬다. 만약 갑작스럽게 교류를 끝내고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았다면 수인 연합을 쉽게 몰아낼 수 있었을 거다.
“그 남자를 믿은 내가 바보였어.”
레비는 정말 화가 났다. 최후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을 택한 자신을. 항복하면서 모든 백성을 그 남자의 가축으로 만든 자신을. 그래도 자기 자식이니 모른 척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자신을. 자신의 소유물이니 분명 함대를 보내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을. 애초에 버려질 운명이었는데 그런 놈에게 의지했다는 자신이 너무나 화가 났다.
‘녀석은 우릴 버렸어. 버렸으니까 원군도 오지 않는 거라고.’
수인 연합의 공격이 시작되자 레비는 즉시 전서구를 이용해 구원 요청을 보냈다.
수인 연합의 공격이 임박 되었으니 즉시 원군을 보내달라고. 대다수가 만삭이라 전투에 참여할 수 없으니 제발 보내달라고. 소유물인 자신들이 망가지는 걸 기어이 보고 싶은 거냐고. 자칫 그리드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내용이 가득했지만, 레비는 신경 쓰질 않았다. 자신의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원군은 없었다.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를 들은 레비는 깨달았다.
그놈에게 있어서 우린 장난감에 불과했다는 것을.
“미안하구나, 아가들아.”
뱃속에 잠들어 있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사죄하며 레비는 부러진 검을 들었다.
“이 못난 어미를 용서해주렴.”
어차피 자신은 죽을 거다. 호랑이족 수장 타이와 악어족 수장 크로커는 분명 사형을 주장할 거다. 어떤 이유가 있든 적과 내통한 자를 살려둘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오겠지. 매우 호전적인 두 녀석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 죽자. 적에게 잡혀 치욕스럽게 죽을 바에야 이렇게 죽는 게 낫다.
그리 생각하며 레비가 목덜미에 칼을 들이댄 순간이었다.
-콰가강!
갑작스러운 폭발음. 그러나, 포탄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비명이 들려오는 일도 없었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폭발하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지?” “여왕님, 우린 살았습니다!”
당혹스러워하던 레비를 향해 아까 떠났던 병사가 달려왔다. 절망으로 가득 찼던 얼굴은 환희로 넘쳐났다.
“주인님이, 주인님이 원군을 보내주셨습니다!” “아….”
너무 다행스러운 나머지 레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