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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22화 (23/344)

Chapter 22 - 22화- 악습을 없애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다

수소는 동족을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암소는 전사에게 봉사하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들소족에게 내려오는 전통이었으며,

이제는 동족을 갉아먹는 저주였다.

“너, 들었어? 이웃집에 사던 캐리 있잖아, 해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데.” “뭐, 정말?”

이런 일은 들소섬에선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얘기를 옆에서 듣는 카우는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피해자가 자신과 같이 살던 이웃이라는 사실에 두 눈이 동그랗게 떴을 뿐이다.

“사고사라고는 한데, 그건 아닌 것 같아.” “설마, 누가 캐리를 살해하기라도 한 거야?” “그런 것 같아.”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은 끔찍한 걸 봤다는 얼굴로 실토했다.

“폭행 흔적이 남아있었거든. 내가 현장에 있었는데, 정말 참혹했어.” “세상에.” “그렇게 당했는데도 사건은 빨리 종결한 게 너무나 수상해.”

동족이 살해당했다. 공식 사인은 익사. 사건은 종결되었고, 시신은 바로 현장에서 태웠다. 죽은 자의 넋을 기르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그러기에는 수상했다.

적어도 넋을 기리기 위해선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하지 않고 왜 시신을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걸까? 중대한 사항임에도 왜 그냥 넘어가려는 걸까? 파면 팔수록 의혹만 증폭되었다.

“이걸 그냥 눈뜨고 지켜봐야만 해? 살인 사건이잖아?” “살인이지만, 방도가 없어.”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권력은 전부 수소들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놈들이 있는 한 재수사는 꿈도 꿀 수 없어.” “잠깐,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수소들이….” “쉿, 조심.”

진실에 도달해도 말조심은 해야 하는 법.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

“누군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말은 가려서 하자.” “알았어.” “카우도, 알았지?” “그래, 알고 있어.”

카우는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밀고할 생각은 없었다. 카우 역시 이 섬의 불합리한 제도에 불만이 많으니까.

“아무튼, 사건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으니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정말 운도 없다. 하필 들소족으로 태어나서….”

추측하건대, 캐리라는 암소는 캐리를 따먹으려고 한 수소에게 살해당했을 거다. 살해당했으나, 아무도 이를 조사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본다.

고작 암소니까. 이 섬에 차고 넘치는 게 암소인데, 한 마리 죽는다고 뭐가 대수냐?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덮어버리자. 섬 지도층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거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놈들이니 분명 그리하고도 남을 거다.

유독 이런 일들이 들소섬에서 자주 일어났다.

“아, 그냥 나가고 싶다. 몰래 도망칠 수 없나?” “갈 수 있어야지. 해안가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가능하겠어?”

섬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암소는 수소들의 물건이니 외부로 유출되는 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섬 내부가 폭로되는 걸 막기 위함이지만.

설사 나갈 수 있다 해도 다음이 문제였다.

“다른 섬들은 우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외부인을 달갑게 여기는 수인은 없으니까.” “하긴, 악어섬에 갔다가 송환된 자들도 있었으니까.”

수인들은 자신들 섬에 외부인이 정착하는 걸 매우 싫어한다. 그것이 설마 같은 수인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자기 동족 외엔 다 금지라는 주의 때문에 암소들은 갈 데가 없었다.

“엘프 숲은 어때? 우릴 박제하는 왕국보다는 좀 낫잖아?” “낫긴 하지. 갈 수만 있다면.”

갈 수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으나,

“여기와 너무 거리가 멀어. 도착할 때까지 발각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았다.

“쳇, 그냥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 수밖에 없다는 거잖아?”

이쪽도 안 되고, 저쪽도 안 된다. 암소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아, 나 씨받이가 되고 싶지 않은데.” “별수 없잖아. 캐리처럼 살해당하지 않기를 빌어야지.”

수소들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 그것이 암소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나 먼저 일어날게.”

더는 대화가 듣기 싫은 카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 맨 바구니에는 약초가 한 무더기 이상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음, 그래. 잘 가.” “내일 보자.”

형식적으로 두 친구와 인사한 이후 카우는 관리자한테 향했다. 자신이 캔 약초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거기에 맞춰 나온 보수를 받은 뒤에 카우는 밭에서 나왔다.

보통은 집으로 돌아가나, 카우는 해변으로 향했다. 수소들의 감시가 없는 해변이니 잠시 쉴 수 있을 거다.

“하아….”

가는 내내 카우는 땅이 꺼질 지경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고 싶다.”

강인한 남자가 취향이지만, 툭하면 살해당하는 것은 사절이었다.

어째 여기 남자들은 왜 그렇게 폭력적인 걸까? 폭력적이지 않다면 무엇이든 해줬을 텐데. 만약 이런 고질적인 병폐가 아니었다면 씨받이가 되어야 한다는 운명에 수긍했을 거다. 다른 두 친구처럼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어릴 때는 총명하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카우는 어릴 적에 머리가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너무 좋아서 부모님이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한탄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카우는 나이를 먹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깨닫고 절망해버렸다.

‘다른 수인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카우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다른 수인들이 차별이 덜하다고 하던데, 만약 다른 수인이 된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었을까?

“음?”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던 카우는 보게 되었다.

“이, 이건 뭐야?”

자신이 휴식처로 사용하는 해변에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다. 해안가를 지키던 수소들이다. 전원 예외 없이 머리가 으깨져 있었다. 고운 모래밭은 붉은 대지로 변질했다.

“목격자인가?”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눈앞에 있었다.

“도망치지 말아라. 도망치면 알지?”

낡은 군복을 입은 검은 머리의 남자, 그리드는 피 묻은 망치로 죽은 수소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당연히 카우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

“너, 내 노예가 되어라.”

카우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리드는 그리 말했다.

“내 노예가 되어서 평생 씨받이가 되어라.”

다른 수소들과 똑같은 말을 카우 면전(面前)에 지껄였다.

“…지금은 안 돼요.”

카우는 그리 말했다.

현재 그녀는 포로가 된 상태였다. 근처에 있는 동굴로 끌려간 그녀는 그리드의 심문을 받았다. 본래라면 거부하는 게 도리이나, 카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임신하면 의심받을 거예요.” “의심하면 싹 죽여버리면 그만이지, 뭐가 문제야?” “아니, 그래도….” “난 질문하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이 태도 때문이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피 묻은 망치로 자신을 겨눴다. 언제든지 머리통을 깰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이.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우는 무조건 네네,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행여 일이 틀어지면,

“히익,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잘못했으면 죽일까?” “….”

숙여도 용서할 마음이 없다고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지만.

“진심으로 죄를 뉘우친다면 내 말에 복종하라.” “….” “대답.” “네,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그리드는 망치를 내려놓았다.

‘이, 이 미친놈!’

이 녀석, 성격 파탄자야, 뭐야? 사람 죽이는 게 무슨 장난인 줄 알아? 그리드의 무자비함에 카우는 공포에 빠졌지만,

‘그, 그래도 이런 남자라면 좋을지도….’

…라는 생각마저 할 정도로 호감이 생겼다.

“그럼 명령을 내리지.”

처음 만난 암소에게 그리드는 명령을 내렸다.

“이 섬의 주인이 되어라.” “이, 이 섬을요?” “그래, 나는 이 섬을 정복할 계획이다.”

정복하겠다는 말에 카우는 기겁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남자가 이 섬의 악습을 없애줄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수하들을 보내주마. 아주 우수하니 우두머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그런 말을 하며 그리드는 카우의 젖가슴을 주물렀다.

“히익?”

만지지 마,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또다시 신경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로 망치에 쪼개지기 싫다는 것도 있지만,

“하으으으, 흐으으으….”

이런 남자에게 만져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 파탄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빠져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음, 나쁘지 않네.”

그렇게 가슴을 희롱한 그리드는 물었다.

“해서, 따를 거냐?” “네, 네, 따를게요. 따르는데….”

카우는 물었다.

“왜 저를 고른 거죠? 단순한 암소에 불과한데.” “그야….”

카우의 귀에다 대고 그리드는 속삭였다.

“너는 야심이 있으니까.” “….” “야심이 있는 자와 손을 잡으면 일이 잘 풀리니까. 그래서 고른 것뿐이다.” “….” “설마, 멍청하게 수소들의 씨받이로 살다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카우는 표정이 굳어졌다.

“아까 네놈이 말했잖아. 이 섬은 불합리하다고. 너무 불합리해서 나가고 싶다고. 나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고.” “….” “그 불합리를 없앨 기회를 너는 포기할 건가?” “가능하나요?”

카우는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나요?”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허나….”

그리드는 답했다.

“나는 널 노예로 삼았다. 삼았지만 기회를 줬지.” “….” “하지만 놈들은 기회조차 주질 않지.” “….” “그러면 누구의 말을 믿고 싶겠냐?”

눈앞의 괴물은 자신의 노예로 삼고 싶어 한다. 동시에 출세할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이 섬의 쓰레기들은 출세할 기회조차 주질 않는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지 뻔하지 않겠나? 답을 요구하듯이 그리드는 한 손으로 카우의 턱을 붙잡았다.

“자, 선택해라.” “…나는.”

●●●

“…해서 이분의 키스를 받아들였지.”

고이 잠든 강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카우는 그리 말했다.

“이분 덕분에 수장이 되었고, 더러운 수소들을 다 죽일 수 있었어.”

수장이 된 카우가 먼저 한 것은 수소들의 처분이었다. 지금까지 섬의 왕 노릇을 하던 수소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처단했다.

“다 죽여서 들소족이 멸종할지 모른다는 말도 들었지만.”

카우는 해맑게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 이분이 다 해결해준다고 했으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아는 덜덜 떠는 목소리로 비난했다.

“하필 손을 잡아도 이 녀석과 손을 잡다니.”

카우에게 있어선 기회였을 거다. 모든 걸 뒤엎어 버릴 기회를 카우는 버릴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 그리드와 손을 잡는 길을 택했을 거다.

수아에게 있어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처, 천벌 받을 짓을 어떻게….” “천벌, 이게 천벌인가?”

카우는 물었다.

“나쁜 놈들을 죽이려고 주인과 손을 잡았는데, 그게 천벌이야?” “하지만 이 녀석은!” “그래, 네 원수지. 하지만….”

카우는 매섭게 노려봤다.

“이 분은 내 은인이야.”

만약 진짜 저지르면 죽여버리겠다는 눈빛으로 수아를 노려봤다.

“주인을 해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카우….” “그러니까 복종해.”

절대 바뀌지 않는 운명을 카우는 입에 담았다.

“복종해서 네 행복을 찾아. 허튼짓 그만하고.” “그, 그런 건!” “아니라고? 천만에.”

카우는 손가락으로 수아의 가슴을 찔렀다.

“이미 그렇게 좋아했던 주제에 아니라고 할 거야?” “뭐?”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

찌른 손가락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네 몸도 진작 알고 있고.”

내려간 손가락은 볼록 튀어나온 배에 멈췄다.

“그러니까, 외면하지 마.” “….” “널 구원할 답을 무시하지 말라고.”

구원? 이놈을 따르는 게 구원이라고? 이런 쓰레기의 개가 되는 게?

당장 따지고 싶었으나, 수아의 입에선 어떤 말도 나오질 않았다.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숙일 뿐이다.

‘나는, 나는 어찌해야….’

왜 부정할 수 없는 건가? 아니, 부정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미 수아도 자신이 골라야 할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단지, 그 답을 고르면 어찌 될지 두려울 뿐이다.

보름달이 구름에 완전히 가려져 방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마치 지금의 수아의 처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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