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 14화- 자신만의 폭군의 길을 걷겠다
주인님이 왜 갑자기 회의를 열겠다고 한 걸까? 기함 내부에 있는 회의실에 속속 도착한 간부들은 그런 의문이 생겼다.
해적 대함대 <더 퀸즈>가 조직되고, 규모가 점점 확대되자 그리드는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개최되었다. 보통 회의라면 여러 가지 의제를 두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게 목적이나,
‘우리는 이 섬을 공격한다.’
‘작전은 3일 뒤. 개시일 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도록.’
‘실패한 자는 참수할 테니 그런 줄 알아라.’
실상은 그리드가 일방적으로 명령을 통보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어떤 반론도 제기되지 않았으며, 제기한 순간 바로 찍혔다. 찍힌 간부는 그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설령 알고 있어도 아무도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다.
주인에게 까불면 어떤 꼴이 되는지 몸소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다들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무슨 안건을 가지고 회의할까?” “함대 해산이란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이미 수배당한 지 오래잖아.” “설마 그 여우 년한테 모든 걸 다 주겠다는 건 아니겠지?”
이번 회의는 정말 오랜만에 열렸다. 그리드가 구미호족 수장 수아에게 독살당해 죽을 뻔한 사건으로부터 약 3주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열리는 회의였다.
3주라는 시간은 간부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시간이었다.
깨어난 주인님은 느닷없이 구미호들과 친해지겠다고 암살미수범과 가까이 지내질 않나. 더는 침략할 생각이 없다며 수인 연합과의 전투를 일방적으로 중단하지 않나. 퀸즈의 전력으로 삼기 위해 진행된 구미호족 복원 계획을 폐기하려고 하질 않나. 심지어 우리의 기밀 정보를 넘길지 모르는데 무작정 구미호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지 않나.
다 된 밥에 왜 재를 뿌리려 하는지 간부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주인님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던 간부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측근인 이리스와 아트리아를 통해 부디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무위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간언했다.
그 간언 덕에 구미호들에게 줄 자유가 어느 정도 제한되어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으나, 간부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언제든 주인님이 변덕을 부릴 수 있으니까. 그 변덕이 오늘 회의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다들 걱정이었다.
“모두 모였나?”
중저음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지자, 수군거리던 간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지?”
다 낡아 빠진 검은색 군복을 입은 흑발의 남성이 무대 위로 올랐다.
그들의 주인인 그리드다. 해적 대함대의 주인이니 입는 옷도 화려할 줄 알았겠지만, 실상은 아니다. 어머니인 라우페이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의미로 항상 다 찢어진 군복을 입고 다닌다.
정작 사랑을 베풀라는 어머니의 가르침과 달리 그리드는 무자비하게 가르치지만.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너희들에게 해줘야 할 말이 있다.”
해줘야 할 말? 그게 대체 뭐지? 혹시 새로운 작전 계획인가? 아니면 구미호들 숙청? 암살미수범인 수아의 공개 처형?
그리드, 아니 정강림 입에서 나온 발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미안하다.”
허리를 90도 직각으로 숙이고 사과했다.
“그동안 너희들의 불안을 헤아리지 못하고 멋대로 일을 추진해서 정말 미안하다.”
주인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에 간부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웅성거림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이게 말이 돼? 주, 주인님이 사과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독에 당해서 이상해졌나?” “이거 꿈은 아니지? 내가 헛것을 들은 건 아니지?”
모두 다 경악했다. 독불장군인 주인님이 자신들에게 사과하다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에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담지 않던 남자가 그걸 입에 담다니. 순간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 게 아닌가, 다들 그리 생각할 뻔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그렇게 짧게 사과를 끝낸 정강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라.”
그 말에 다들 침묵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반론을 제기했다가 숙청당한 간부들의 이야기를 익히 들었는데, 누가 하겠나? 아무리 명령이라고 한들, 그 명령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강림이 전방을 살펴봐도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아니, 있었다.
“지, 질문이 있습니다.”
막 간부가 된 여성이었다. 친우들이 ‘이 미친년아, 죽고 싶어 환장했냐?’라고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강림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으니까.
“그래, 물어봐라.” “왜 수아라는 구미호에게 애정을 준 것입니까? 그 여자는 주인님을 두 번이나 죽이려 한 자입니다. 그런 여자를 왜 예뻐하셨습니까?” “좋은 질문이다.”
강림은 잠시 심호흡한 뒤, 대답했다.
“꿈을 꾸었다.” “…꿈이요?” “그래, 우리가 파멸하는 꿈을 꾸었다.”
꿈이라는 말로 강림은 <더 퀸즈>가 맞이한 결말을 얘기했다.
“내 꿈이 이루기 직전에 처참하게 패배하는 악몽을 꾸었다.”
“너희들은 죽음을 맞이하고, 나 또한 갈기갈기 찢어서 꼬챙이에 꽂히는 불행을 맞이했다.”
간부들이 ‘우리가 파멸한다고?’라며 웅성거렸다. 강림은 계속 이야기했다.
“그걸 본 나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라도 달라지지 않으면 끔찍한 결말만 맞이할 테니까.” “그래서, 수아라는 구미호를 곁에 둔 것입니까?” “그래.”
강림은 긍정했다.
“수아를 우리 편으로 만들면 파멸하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여겼지.”
하지만, 라고 강림은 운을 뗐다.
“그건 착각이었다.”
지금이라도 착하게 살 수 있다면 될 거라고 판단한 자신이 바보였다.
“우리는 이미 손에 피를 잔뜩 묻혔다. 너무 묻혀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지.”
“우리를 향한 원망도 매우 깊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것도 잊은 채 나는 정반대의 길을 가려고 했다. 실패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기에 너희들을 무시하고 강행했다.”
“그렇게 강행한 결과, 내 목숨을 잃을 뻔했지.”
그러면, 라고 질문을 던진 간부가 물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원상 복귀한다.”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되돌린다. 그리드라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삶을 살기로 한다. 그리드가 바라던 폭군의 삶을 정강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
“대신 이제부터 새로운 방식을 쓸 것이다.”
그리드와 다른 폭군이 될 거다. 무자비하게 피만 묻히는 폭군이 아닌,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폭군이 될 거다.
그게 정강림이 선택한 길이었다.
“우선….”
강림은 앞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어떤 변화가 있을지 차근차근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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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호응이 대단한데?”
강림의 이야기를 듣는 탈리아는 주변을 살펴봤다.
“저 사람, 진짜 주인님 맞아? 아닌 것 같아.” “이유는 모르지만, 주인님이 저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지는 않을 거야.” “이제 우리 제대로 취급받는 거야? 그런 거야?”
반응은 괜찮았다. 강림이 내세운 정책에 간부들 전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기존과 똑같으면서도 자비를 겸한 정책에 큰 호응을 얻었다.
“당연한 거 아닐까? 지금까진 우린 장난감 취급당했잖아.”
원주인은 냉혈한 그 자체였다. 자비라고는 모래알만큼도 없는 자였다. 수틀리면 누구든 다 죽이는 마왕 그 자체였다. 제아무리 총애를 받는 자들이라도 언제든 죽을지도 몰라 항상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탈리아도, 이리스도, 심지어 아트리아도 두려워했다.
하지만 강림은 달랐다.
“우리 전원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옛날의 주인이었다면 결코 입에 담지 않았을 거야.”
너희들은 노예다. 노예지만, 물건이 아니다. 앞으로 너희들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겠다. 너희 전원을 동등하게 취급해 줄 테니 앞으로는 편히 자신을 대하라. 원한다면 이름을 막 불러도 상관없다.
그 말만으로도 파격적이었다. 폭군이었던 주인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혹시 독에 당해서 더 이상해진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해.”
이런 정책을 쓴다는 것에 아트리아는 크게 안도했다.
“정말? 사실상 그리드는 죽은 거나 다름없잖아?” “그건…좀 안타깝지.”
탈리아의 말에 아트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드의 영혼은 이방인의 영혼에 흡수되었으니까.”
만약 그리드의 영혼이 강했다면 흡수당하는 건 강림이었을 거다. 예전과 똑같이 무자비한 폭군으로 군림했을 거다.
그러나, 지금 저 자리에 있는 흑발의 남자는 강림이다. 강림이 있다는 건 그리드보다 강했다는 증거. 본인은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하나, 그리드의 육신을 차지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강함은 입증된 거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더 퀸즈도 숨통을 트일 수 있게 되었으나, 아트리아는 약간 안타까웠다. 언젠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그것도 살리는 대가로 사라질 줄은 아트리아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난 괜찮아.”
그리드는 사라졌지만, 죽은 건 아니다.
“저분도 우리가 모셔야 할 주인님이니까.”
여전히 그리드는, 정강림이란 주인은 저기 무대 위에서 잘 살아있으니까. 그러니 아트리아는 슬퍼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도 우리를 위해 싸워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난 열심히 모실 거야. 너는?” “당연히 모셔야지.”
탈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옛날보다는 나으니까.”
예전에는 언제 목이 달아날까 두려웠다. 실험에 실패하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볼지, 혹시 실망해서 숙청하는 게 아닐지, 아니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죽이는 게 아닐지 탈리아는 무서웠다.
이젠 그런 것에 시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없어졌으니 마음 편히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거다. 실패해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거다.
연구에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탈리아는 강림을 위해 뭐든 할 작정이었다.
“조금은 어려운데….”
탈리아 옆에 앉아 있는 이리스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되도록 생포하라니. 그게 가능할 리가….” “왜, 천하의 돌격 대장님이 그것도 못 할 것 같아?”
탈리아가 놀리듯이 물었다.
“못할 거면 총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거 어때?” “그래, 원하면 주인님의 애완견이 될 수 있을 거야.”
아트리아가 탈리아에게 동조했다.
“늘 곁에서 모유를 주는 기사. 어쩌면 지금의 주인님이 반기실지도 몰라.” “야! 그런 농담은….”
그렇게 세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강림은 연설을 끝냈다.
“얘기는 여기까지다.”
일정은 끝났다. 이제 다음 일정으로 넘어갈 차례다.
“너희들이 많이 쌓여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항상 간부들과의 사이가 냉랭했던 그리드와 다르게 간다. 얼음을 녹이고 새싹을 피우게 한다. 그러기 위한 방도가 뭔가. 강림은 알고 있었다.
“내가 수아만 끼고 살아서 다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지?”
그 말에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와라.”
강림은 선언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만족시켜 줄 테니 차례대로 와라.”
그 말에 간부들은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