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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13화 (14/344)

Chapter 13 - 13화-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해독제를 먹었으니 문제없을 거야.”

병상에 누워 있는 강림을 향해 탈리아는 설명했다.

“혹시나 저번과 똑같은 독약을 쓰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조잡한 거라서 정말 다행이었어.”

구미호 수아는 이번에도 암살을 꾀했다. 목에 쇠고랑을 차고 있었기에 요력을 쓰는 건 불가능. 예전처럼 저주를 날려 강림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수아는 남몰래 독을 제조했다. 강림의 비호 아래에서 그녀는 조금씩 재료를 모았다. 원수를 고꾸라뜨릴 수 있을 정도의 양이 될 때까지.

이 사실을 강림은 전혀 눈치채질 못했다. 함선 안에만 있어서 답답하니 바람 쐬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 본인의 죽음으로 직결될 뻔했다.

“며칠만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그렇게 말해도 내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멍하니 앞만 바라보는 강림을 보며 탈리아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운 내십시오, 주인님.”

이리스가 강림의 왼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모든 건 다 그 여우 년 때문입니다. 주인님은 약속을 지키려고 했어요. 어긴 사람은 그년입니다.” “….”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너는.”

자신을 쳐다보는 이리스를 향해 강림은 물었다.

“나한테 지독한 짓을 당했으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어?” “무슨 말을 하는지….” “시치미 떼지 마.”

이리스가 그리드에게 뭔 짓을 당했는지 강림은 알고 있었다.

“너희 가문은 유명한 기사 가문이었지. 가문에 속한 이들이 전원 기사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자들이었어.” “네, 저희 가문이 괴물 소굴이란 소리를 자주 듣긴 하죠.” “그 가문을 풍비박산 낸 게 바로 나야.” “….”

그 말에 이리스는 표정이 굳었다.

“눈앞에서 네 아비를 죽이고, 눈앞에서 네 어미는 물론이고, 너의 언니들, 동생들, 시녀들, 그곳에 속한 기사들도 전부 내가 강간했어.” “….” “평생 나를 위한 병사를 낳으라며 씨받이로 삼았지.” “….” “그런 걸 당했으면서도 너는 나한테 매달릴 수 있는 거야?”

왜 갑자기 이리스의 과거를 들추는 걸까? 그건 강림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모든 게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 뿐. 허망해서, 그냥 다 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착하게 살려고 했건만, 그게 무의미한 짓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뭐가 두렵겠나? 이리스가 분노하든 말든 강림은 술술 다 불었다.

“탈리아, 너도 마찬가지야.”

이번에는 탈리아를 보며 얘기했다.

“네가 불합리한 일을 당해서 해적에 가입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내가 의도한 거야.”

게임 이야기 내에서 밝혀진 탈리아의 과거를 강림은 전부 다 불었다.

“널 내 수하로 삼으려고 일부러 널 궁지에 몬 거야.” “….” “그런 짓까지 한 날 계속 따를 수 있겠어?”

이리스와 탈리아는 말없이 강림만 쳐다보다가 동시에 대답했다.

“저는 따를 겁니다.” “나도 따를 거야.” “…어째서?”

강림의 의문에 먼저 이리스가 대답했다.

“당신이 절 망가뜨렸다는 걸 잘 압니다. 한때 당신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죠.”

이리스도 수아처럼 복수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습니다.”

체념한 목소리로 이리스는 말했다.

“주인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노려도 다 들켜요. 들켜서 고문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죠.” “….” “여기에 해적에 속했다는 이유로 지명수배까지 당했으니 저한테 선택지가 있겠습니까? 그냥 미쳐서 당신을 따르는 것 말곤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신도 이미 범죄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리스는 포기했다. 기사의 긍지도, 명예도 전부 다 버렸다. 다 버리고, 오직 그리드라는 주인에 대한 애정만 갈구했다.

그렇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으니까. 산산이 부서져 내린 여기사는 오직 주인님만을 위한 검이 되어버렸다.

“나는 진작 알고 있었어. 날 구렁텅이로 떠민 놈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탈리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별수 없잖아? 해적단에 들어간 이상 다른 선택지가 있겠어? 평생 해군에게 쫓기다 여생을 마치겠지.” “….” “그럴 바에야 그냥 주인을 모시며 윤택한 삶을 사는 게 낫지 않겠어?” “….” “지금 와서 잘못했다고 착하게 사는 건 무리야. 나쁜 짓을 잔뜩 저지르며 살았는데, 어떻게 착해질 수 있겠어?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게 낫지.” “내 맘대로, 내 맘대로라….”

그 말에 강림은 자조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네 말대로 할 것을….”

왜 자꾸 착하게 살겠다고 지랄을 떨었던 걸까? 어느 시점에 빙의된 건지 알게 되었음에도 착하게 살 수 있다고 믿은 이유가 뭘까? 소설에 나오는, 악역에 빙의된 주인공들처럼 원작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왜 믿었던 걸까? 그랬다면 처절하게 실패하지도 않았고,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없었을 텐데.

-네놈이 남자들을 다 죽였잖아!

수아는 말했다.

너는 위선자라고. 수많은 생명을 빼앗은 주제에 이제야 착하게 살겠다고 발광하는 게 역겹다고. 그런 놈을 한 번도 믿질 않았다고.

맞는 말이다. 끔찍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던 쓰레기다. 그런 쓰레기가 되었는데 수아가 자신을 믿어줄 거라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막 나가는 게 좋지 않았을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때, 병실로 아트리아가 들어왔다.

“암살자들의 신원을 파악하느라 늦었습니다.” “수아는 어찌 되었지?” “아, 그 여우 년 말이죠.”

떠올리기 싫다는 듯이 아트리아는 표정을 구겼다.

“다른 수인들과 같이 실험실에 가둬놨습니다.” “….” “명령만 내리시면 어떤 벌이든 내리실 수 있습니다.” “….” “세뇌하든, 평생 가축으로 만들든, 주인님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답니다.” “….” “그 전에 얘기부터 할까요?”

아트리아는 서적 하나를 침상 위에 올려놨다.

“이게 뭐야?”

뭔가 가죽을 세게 뒤틀어 놓은 듯한 문양을 가진 책을 가리키며 이리스는 물었고,

“이, 이건….”

탈리아는 뭔가를 깨달았는지 크게 경악했다.

“영혼 소환법이 적힌 책이잖아? 네가 왜 이걸 갖고 있어?” “이 책이 뭔데?” “아주 위험한 책이야.”

궁금해하는 강림을 보며 탈리아는 얘기했다.

“다른 세상에 사는 영혼을 불러서 이 세계에 강제로 안착시키는 주문이 담겨 있어.” “안착?” “네, 특정 조건을 맞춰야만 성공할 수 있답니다.”

탈리아 다음으로 아트리아가 설명했다.

“갈망이 있어야 해요.” “갈망?” “안착할 육신이 바라는 갈망과 영혼이 바라는 갈망. 두 가지가 합의를 이루어야만 주문이 성공합니다.” “잠깐만.”

그 말을 들은 강림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네가 말하는 영혼이라는 게 산 사람의 것을 말하는 거야?” “아뇨, 죽은 사람의 것을 말합니다. 산 사람의 영혼은 데려올 수 없어요.” “….”

그 말을 들은 순간, 강림은 머리에 무언가 쾅, 하고 강타당한 기분이 들었다.

‘죽은 사람만 가능한 거라면….’

현실 세계의 자신은 이미…. 설마, 하는 생각에 강림은 아트리아를 쳐다봤으나, 아트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야, 아트리아. 설마, 이걸 써서 주인을 살린 거야?”

탈리아가 추궁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사경을 헤매던 주인이 멀쩡했을 리가 없지.” “그, 그렇다면 이 남자는 우리가 알던 주인님이 아니라는 거야?”

이리스가 당혹스러워하듯이 물었다.

“아니, 주인님 맞아.”

아트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꿈에서 헤매고 있었을 뿐, 분명 우리 주인님이야.” “하지만, 방금 다른 세계의 영혼이라고….” “그래도 우리 주인님 맞아.”

아트리아의 주장은 확고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겠어?” “알아먹기 좋게 설명 좀 해봐.”

강림은 요구했다.

“왜 내가 이딴 구제 불능 쓰레기의 몸을 가졌는지, 당장!” “아까 말했죠. 육신과 영혼이 갈망하는 게 같아야만 한다고.”

다른 세계의 영혼을 이 세계의 육신에 정착시키는 방법은 하나. 서로 끌리는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

“우리 원래 주인님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를 자신의 노예로 삼고 싶어 했어요. 그 방법이 너무 잔혹한 게 탈이었지만, 그 목적이 변하는 일은 없었어요.” “….” “그럼 묻겠습니다.”

아트리아는 물었다.

“당신이 바라던 갈망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평범한 회사….” “아니, 그거 말고 진짜 바라는 거요.”

아트리아가 병상 위로 올라왔다. 이리스가 무슨 짓이냐며 제지하려 했으나, 탈리아가 막아섰다.

“그 세계에서 당신이 정말 바라는 일이 무엇이었나요?”

만삭의 배를 강림의 몸에 밀착시키며 아트리아는 다시 물었다.

“진짜로 당신이 바라는 게 무엇인가요?” “나, 나는….”

인간 정강림이 바라는 게 무엇일까? 평범한 회사원으로 다니며 돈 버는 기계로 살던 강림이 바라던 게 무엇일까?

“나는….”

과거를 회상한다.

-강림아, 좋은 말 할 때 엄마 말 따르렴.

강림은 어릴 적에 부모님이 하는 말에 순종하는 개였다.

-안 따르면 확 죽여버린다?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기에 언제나 떨어야만 했다. 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걸로 어찌 돈 번다는 거니? 뻘짓 하지 말고 공부해라. 공부해서 취직해. 응?

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허락은 주어지지 않았다. 자그마한 취미 생활조차 허락되질 않았다. 공부해서 취직해라. 안 하면 죽여버린다. 그 협박에 시달렸다.

그럼 취직했으면 다 나아지나? 아니, 그렇지 않았다.

-강림 씨. 얼른 안 하고 뭐 합니까? 제가 우스워요?

하필 짜증 나는 여상사에게 찍혔다. 한 번 문서를 늦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매일 갈굼만 당한다. 뭔가 매력적인 요소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좋겠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매일 볼품없는 돼지인 자신을 아무 이유 없이 갈구기만 한다.

어른이 될 때까지는 부모님에게 시달리고, 어른이 된 이후에는 여상사에게 시달렸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유일한 도구는 게임. <여우의 은총>을 할 때가 강림은 너무나 즐거웠다.

그 게임을 할 때마다. 그 게임에서 한눈에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 캐릭터들이 나올 때마다. 그 여자 캐릭터들이 농락당할 때마다. 그 여자 캐릭터들이 농락당하면서 무너지는 걸 볼 때마다.

강림은 이상한 쾌감에 휩싸였다.

해보고 싶다. 자신도 저리 해보고 싶다. 막장인 그리드와 달리 죽이지 않고 해보고 싶다. 평생 자신을 따르게 만들고 싶다. 자신의 의지대로 해보고 싶다.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모은 여자 캐릭터들을, 게임 속에 있는 여자 캐릭터들을….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싶었다. 자신의 노예로 삼은 그리드처럼 말이다.

“아하하,”

그걸 강림은 뒤늦게 깨달았다.

‘뭐야, 결국 나도 쓰레기였네.’

쓰레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결국은 쓰레기였다. 쓰레기였기에 쓰레기에게 빙의된 거였다. 처음부터 착하게 살아간다는 선택지 따위 강림에겐 없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네요.” “….”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주인님.”

강림을 끌어안은 아트리아는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는….”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았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지 않은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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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강림은 모든 간부를 긴급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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