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 12화- 다른 선택지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사실 정강림에겐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다.
[진짜 그리드가 되어 살아간다.]
파괴와 탐욕의 확신, 그리드의 삶을 받아들인다. 어차피 본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방도가 없는 이상, 그렇게 사는 게 맞을 거다.
그리드처럼 세상을 정복하고, 그리드처럼 손에 넣은 여자들을 전부 노예로 삼으며, 노예들을 모조리 다 겁탈한다. 겁탈하고, 겁탈하고, 또 겁탈해서 자신의 아이를 배게 만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리드는 이상하리만큼 자손을 낳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 정작 그렇게 낳은 자식들에게 이름 한 번 제대로 지어주지 않고 소모품으로 이용하는 막장 아비지만.
정말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최소한 자기 여자들한텐 자비라도 보여줬다면 호감이라도 생겼을 텐데, 그런 여자들도 자신에게 거슬리면 예외 없이 죽이는 놈이다. 그런 놈에게 호감이 생길 수 있겠는가.
이런 놈이 어째서 세계 정복을 노리는 걸까? 무슨 이유로 가로막는 적은 뼛속까지 다 태워버리는 악마가 되어버린 걸까? 어째서 제작진은 이런 악마를 탄생시킨 걸까? 그냥 게임사 역사상 가장 최악의 악당을 탄생시키고 싶다는 이유로 온갖 설정을 다 주입한 게 아닐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명확하다.
그 악마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 때문에 정강림의 미래는 파멸 그 자체라는 것. 게임 이야기에선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주인공인 설화를 궁지에 몰아넣는 등 최종 보스로서의 위엄을 톡톡히 보여줬다.
특히, 1차전에서 설화를 패퇴시키고 그녀를 성노예로 삼았을 때가 그의 최고 전성기였다. 1부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주인공이 최종 보스의 노리개가 된다는 전개는 당시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개발진들이 미쳤다며 이를 수정하라는 요구가 뜨겁게 타올랐을 정도다.
당연하게도 자랑스러운 불통의 개발진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날, 설화는 모든 걸 잃었다. 긍지도, 자유도, 순결도. 순백의 여우는 악마의 씨앗을 품고 말았다.]
…라는 해설이 붙을 정도로 그리드의 완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그리드는 제정신을 차리고 복수의 칼을 갈던 설화와의 2차전에서 패배하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강림은 그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드 새끼랑 같은 꼴 당하는 건 절대 사절이야.’
멍청하게도 현실에서도 하고 싶은 거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다. 부모님의 분노를 사기 두려웠기에, 부모의 명령이 떨어지면 곧이곧대로 따르는 인형이었다. 망할 상사가 자신을 윽박질러도 연신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하질 못하는 바보였다.
그런 썩어빠진 인생을 살아왔는데, 악당이 되어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는 삶이라니.
이런 건 받아들일 수 없다.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무조건 벗어날 거다. 끔찍한 최후만이 기다리는 미래에서 도망칠 거다. 인형처럼 살아왔다 한들, 쓰레기처럼 폐기 처분되는 꼴을 강림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 달라지자. 달라지자고. 요즘 소설을 보면 다들 그렇잖아?]
빙의를 소재로 쓰는 작품에선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게임이나, 소설, 혹은 만화에 빙의되었는데, 하필 악역이었다. 그것도 파멸만 남은 악역으로 빙의되었다. 파멸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작의 삶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간다.
그게 악역에 빙의 당한 주인공들의 공통적인 행적이었다. 강림도 그 행적을 그대로 따를 작정이었다.
당연히도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하필 그리드의 악행이 만천하에 알려진 지 오래인 시점에 빙의되었다.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탓에 자신의 부하들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원망받고 있는 처지다. 언제 뒤에서 칼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과연 개과천선이 가능할까?
세상의 미움을 있는 그대로 다 받을 수밖에 없다면, 그냥 그리드의 삶 자체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원작대로 성공하다 실패한 세계 정복을 완수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한 번 주인공을 이긴 전적이 있는 그리드다. 승리했다는 도취감에 취해 자만에 빠지질 않았다면 정말로 세상은 그리드의 천하가 되었을 거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런데도 강림은 고집을 부렸다.
‘설마, 실패하겠어?’
그게 이유였다. 악역이 되어 개고생하지만, 끝끝내 보상을 받은 주인공들처럼 자신도 그리할 수 있을 거다. 어려워도 결국에는 성공할 거다.
그런 안일한 생각의 결과가 이거였다.
“으윽….” “바보구나, 너는. 내가 주는 술을 그대로 마셔버리고.”
안일한 생각으로 강림은 진짜로 죽을 위기에 처했고,
“자,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여주마.”
진짜로 수아에게 참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
‘수아, 어째서 이런 짓을….’
파멸을 피할 첫 번째 수단으로 강림은 구미호족 수장 수아를 택했다.
일단 주인공 설화의 친언니이니까. 친언니인 수아가 살아있다면, 그녀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다면 끔찍한 최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을 수밖에 없던 캐릭터를 살리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키니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다.
그런 막연한 기대감을 강림은 품고 있었다.
기대감만 품고 있었기에, 수아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수아가 가진 복수심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드 씨. 신혼부부 놀이는 어땠나요? 재밌었나요?”
조롱으로 가득 찬 말투로 수아는 바닥에 엎어진 강림을 놀려댔다. 쓰러진 강림 옆에는 술잔이 깨져 있었고, 바닥은 포도주로 더럽혀져 있었다.
정사를 나누기 전에 술 좀 마시자는 수아의 제안에 강림은 받아들였고, 수아가 건넨 술잔에 목을 축였다가 이런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수아가 술잔에 독을 묻혔다는 사실을 강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셔야죠, 안 그래요? 이런 놀이 이제 질렸으니까, 더는 하지 말자고요.” “….” “아, 정말 속 시원하다. 언제까지 앙탈을 부려야 하나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는데….”
어디서 잘못된 거지?
수아를 손에 넣기 위해 강림은 자신의 정실부인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정실부인이 된다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포로가 된 구미호들의 처우를 개선해주겠다. 그들의 생체 실험을 중단시키겠다.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요력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겠다.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 필요하다면 섬 밖으로 나가게 해주겠다. 생계도 지원해주겠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강림은 그리 말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강림은 대부분 다 이행했다.
몸매가 다 드러나는 흰색 한복 외에 다른 옷을 입는 걸 허락했고, 탈리아가 주도하던 구미호족 복원 계획을 강제로 중단시켰으며, 마을을 감시하는 인원도 대폭 감소시켰다. 주민이 마을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도 따로 조사하지 말라는 엄명도 내렸다. 생계가 어려운 주민들에겐 직접 물품을 지원해줬다.
수아 앞에서 자신이 한 약속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이왕 이렇게 하는 거, 구미호들이 섬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허용할 방침이었으나,
‘수인 녀석들에게 우리 기밀을 다 넘길 작정이십니까! 그만 하세요!’ ‘네,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습니다!’
라고, 아트리아와 이리스가 결사반대를 했기에 포기했다.
이렇게 강림은 뭐든지 다 해주었다. 공약을 다 이행했다.
이행한 것에 그치지 않고 매일 섹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일 자신의 정액을 수아의 자궁에 가득 채웠다. 채워서 자신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를 바랬다. 정액이란 마약에 중독되어 원한이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기를 강림은 진심으로 원했다. 정액에 취해 무너진 아트리아처럼 되기만을 바랬다.
그렇게 되면 무슨 상황이 되어도 자신의 편이 되어줄 거다. 강림은 그리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그리되었다면,
“이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몇 번이고 넘어갈 뻔했는데, 겨우 참았어.”
수아가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지도 않았을 거다.
“어, 언제부터 이런 짓을….” “언제부터냐니, 처음부터였지.”
그딴 걸 이제야 물어보냐, 라는 표정을 지으며 수아는 강림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놈이 방심하기만을 기다렸어. 바보가 여우에게 홀리기만을 기다렸지.”
참으로 긴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아양을 떨었기에 이 쓰레기의 방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놈이 먹이는 정액에 취해 그대로 익사할 뻔한 일도 수도 없이 많았지만, 수아는 악착같이 버텨냈다. 놈의 말에 동조하는 척하고, 놈의 행동에 긍정하는 척했다. 사랑에 눈을 뜬 여자처럼 연기에 놈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끝에 마침내 독살할 기회가 다시금 찾아왔고, 멍청한 쓰레기는 그대로 마셔버렸다.
전신으로 퍼지는 독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어 나갈 거다. 원수가 중독되는 모습을 수아는 천천히 즐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수아 님. 어서 하십시오.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갈색 망토를 입은, 호랑이 귀가 달린 수인이 말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서너 명의 수인들이 갈색 망토를 입은 채 이 방에 있었다.
이들은 수인 연합에서 보낸 암살자들이다. 침략자 그리드를 죽이기 위해 여우섬에 몰래 들어온 이들은 수아의 협력을 통해 그리드가 있는 함선 내부까지 쳐들어왔다.
어째선지 경비병이 한 명도 없어 의아했지만, 침략자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그들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제가 할까요?” “아니 내가 해.”
수아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전사들의 원혼은 수장인 내가 달래주는 게 의무니까.” “이유가 뭐지?”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강림은 어떻게든 고개를 들려고 했다. 수아의 두 눈을 바라보며 강림은 대답을 요구했다.
“내가 달라진다고 노력했는데, 왜 이런 짓을….” “왜? 왜냐고? 지금 왜냐고 했어? 정말 기가 차서….”
그 말에 수아는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고, 너무나 화가 났다.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강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 “네놈이 남자들을 다 죽였잖아!”
수아는 참았던 분노를 다 터트렸다.
“남자는 필요 없다며 다 죽였어. 죽이고 바다에 수장시켰어. 그것도 우리 눈앞에서!” “무, 뭐?” “그런 걸 저지른 쓰레기가 뭐가 좋다고 내가 아내가 될 것 같아?” “그, 그런….”
이제야 강림은 깨달았다. 마을에서 자신을 싸늘하게 쳐다보는 시선들의 정체를. 단순히 침략자라는 이유로 노려보는 게 아니었다.
원수였으니까. 가족, 친구의 원수였으니까. 그 원수가 멋대로 활보하는 꼴이 너무나 화가 났으니까. 자신을 미워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림은 되돌릴 방도는 충분히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그리드는, 이 쓰레기는 다른 선택지마저 없애 버린 지 오래였다. 착하게 살아서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는 결말 따위 강림에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처음부터 이를 깨달았다면. 아니, 처음부터 악역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리 허망하지도 않았을 텐데. 모든 게 헛수고였다는 사실에 강림은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잘 가라, 그리드.” “….”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길 바랄게.”
그렇게 수아가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거기까지.”
검은 망토를 입은 자들이 수아와 암살자들을 포위했다. 허튼짓 못 하게 수아 일행에게 칼을 겨눴다.
“모두 얌전히 투항하세요.”
깜짝 놀란 수아와 강림은 방문이 열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내일을 맞이하고 싶다면 당장 무기를 버리세요.”
밖에는 세 명의 여성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이리스, 왼쪽에는 탈리아. 그리고,
“목이 달아나기 싫으면 얌전히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만삭의 몸을 가진 아르티아가 있었다.
“두 번은 없으니까 당장 항복해.”
아르티아는 싸늘한 어조로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