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5화 (6/344)

Chapter 5 - 5화- 구미호족 수장 수아

마을에서 벗어난 강림과 아트리아는 절벽에 도착했다.

“저기에 수아를 묶어놨다고?” “네.”

절벽 위에는 두 개의 굵은 통나무가 세워져 있었다. 두 통나무 사이에는 얇은 흰색 한복을 입은 구미호 여성이 묶여 있었다. 사지가 X자 형태로 벌려져 있으며, 그 상태로 통나무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 구미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강림이 묻자, 아트리아는 긍정했다.

“감히 주인님을 암살하려 했기에 이곳에 묶인 거랍니다.” “어쩌다가 당한 건데?” “저 여우 년과 밤을 보내려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화가 나는지 아트리아는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저 여우 년은 무조건 저희한테 항복한다고 했죠.”

프롤로그에서 나온 내용을 아트리아는 다시 읽어주듯이 설명했다.

“저 여우 년은 스스로 옷을 벗고 엎드렸습니다. 주인님의 발등을 혀로 핥아 충성 서약을 맺었죠.”

그런 일이 있을 줄은 강림도 예상하지 못했다. 단순히 수아가 그리드에게 제압당하고, 겁탈당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 설화가 탈출한 직후 여우섬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나오질 않았다.

빼먹으면 안 될 것 같다. 강림은 좀 더 유심히 들어봤다.

“주인님은 그런 수아를 자신의 노예로 삼을 생각이었습니다.”

“노예가 되면 구미호족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죠.”

“여우 년은 그 약속을 받아들였죠.”

안전을 보장해? 정말 웃기지도 않는 얘기네. 그 말에 강림은 코웃음을 쳤다. 보이는 여자란 여자는 전부 노예로 삼아버리고, 남자란 남자는 다 죽이는 녀석이 그런 약속을 지킬 리가 있나? 새빨간 거짓말에 강림은 기가 찼다.

“주인님은 저 여우 년을 임신시키려고 했습니다.”

아트리아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저 여우 년을 임신하기 위한 황금 거위로 만들라고 지시했죠.”

“저흰 그 지시에 따라 저 여우 년의 몸에 주인님의 씨앗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가했습니다.”

구미호는 임신하기 어려운 체질을 가졌다. 그러니 첫째를 가지기도 힘들다.

그래도 그리드는 원했다. 자신의 씨앗을 수아의 자궁에 심어지기를 원했다. 심어져서 자라나기를 바랬다. 자신에게 대든 이 건방진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품게 하고 싶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마음에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개조를 지시했고, 개조된 수아는 그리드의 침실로 끌려왔다.

“그랬는데, 저 여우 년이 주인님에게 독을 주입했습니다.”

수아는 그리드가 자신의 몸을 안는 순간, 저주를 걸었다. 몸 내부에서 독기를 생성하는 저주를. 수아가 완전히 항복했다고 착각한 그리드는 그녀가 영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사전 조치를 가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간신히 주인님은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그거…참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자업자득이다. 자신이 승리자라고 자만한 나머지 벌어진 업보.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악당에게 있어서는 인과응보인 결과다. 만약 죽었다고 해도 이를 추모하는 이는 없을 거다.

잘 죽었다고, 꼴 좋다고, 그러니 착하게 살지, 왜 그렇게 나쁜 짓만 골라서 하냐고. 나쁜 짓만 하니까 그 꼴이 나는 게 아니냐고 비웃을 거다. 강림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데….

왜 이렇게 배가 아픈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이상하리만큼 속이 안 좋았다.

“저희는 즉시 저 여우 년을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아트리아는 설명했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노예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습니다. 보여줘서 반항하면 이 꼴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아니, 그랬다간….”

더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강압적으로 통치하면 불만만 커질 텐데? 그런 강림의 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트리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의식을 잃기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때만큼은 따르기 싫었지만, 라고 아트리아는 곱씹었다.

“저 여자는 죽이지 말라고.” “….” “아직 쓸모가 있으니 죽이지 말고 놔두라고. 적당히 벌만 주라고.” “그 적당한 벌이라는 게 저거라는 거야?”

-철썩!

갑자기 큰 파도가 절벽을 덮친다. 차가운 바닷물에 구미호, 수아는 또다시 흠뻑 젖었고, 부르르 떨었다.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철썩, 철썩, 철썩, 철썩!

계속, 계속 파도가 절벽을 덮쳤다. 절벽 그 자체를 집어삼키려는 듯이 끊임없이 덮쳤다. 끊임없이 덮치는 바다의 고문에 구미호 수아는 언제나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입술은 새파래지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어야 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한복이 옷에 달라붙어 있으니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귀는 물론이요, 꼬리도 물을 잔뜩 먹은 바람에 축 늘어졌다.

저런 걸 적당한 벌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보통 사람은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건데, 저걸 며칠씩이나 방치한다고? 강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

“네, 저 여우 년의 능력을 생각하자면 저 정도가 딱 적당해요.” “그, 그래도 저건….” “한 번 보세요.”

파도는 그쳤다. 물귀신이 되어버린 수아만 있을 뿐. 잠시 뒤, 수아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치이이익!

몸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젖은 몸을, 옷을 다 말라버린다. 축 늘어진 귀도, 꼬리도 뽀송뽀송한 채로 다시 위로 올라갔다. 바다가 주는 무서움에 덜덜 떨던 구미호는 다시금 살아났다.

그 광경을 본 강림은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런 강림을 향해 아트리아는 자기 말이 맞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때요, 제 말 맞죠?” “아아, 그래. 잊고 있었네.”

뒤늦게 강림은 깨달았다.

‘설화가 얼음이라면….’

수아는 불이다. 주인공 설화가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빙(氷)이라면, 언니 수아는 모든 걸 태워버리는 화(火)다. 실제 게임상에서도 불의 여신,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다수의 적을 불살라 버리는 필살기 연출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 막장 개발진들이 여기에만 돈을 투자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중에 너무 강력하다는 이유로 수아가 출시된 지 한 달 만에 능력치가 하향되고 말았지만.

‘수아가 낳은 자식들도 다 불속성이었지.’

어미의 힘이 강력하기에, 어미의 힘을 물려받은 걸까? 종종 게임에서 등장하는 적, 구미호 전사 중에는 불이 속성인 녀석들이 있었다. 그 녀석들은 십중팔구 수아가 낳은 자식들로 밝혀졌다. 이 사실을 알고 설화가 충격을 받아 한동안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건 덤이고.

‘그리드 녀석, 그렇게 아낀 주제에, 왜 죽인 거야?’

안타깝게도, 수아는 시나리오에서 사망한다. 극적으로 설화와 재회하는 데는 성공하나, 진작에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그리드가 수아의 몸속에 집어넣은 독약을 발동시켰다. 설화와 수아가 힘을 합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으니까. 영력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독에 중독된 수아는 동생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 장면을 봤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왜 해피 엔딩을 만들지 않고 배드 엔딩을 만드는 거냐고, 이제 좀 행복해질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개발진들은 악마냐고 욕을 바가지로 하고 싶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렇게 항의가 빗발쳐도 개발진이 결말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서로가 독을 써서 죽이려 했다니, 뭔가 묘하네.’

수아는 독을 써서 그리드를 암살하려 했다. 반대로 그리드 역시 독을 써서 수아를 죽이려 했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독이라는 수단을 이용했고, 결국 그리드가 이겼다.

만약 그리드가 그대로 죽어버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수아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최악의 미래를 맞이했을까? 그리고 강림 자신은 어찌 되었을까? 다른 인물에게 빙의되었을까? 아니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다. 지금은 현실에 집중해야 할 때. 강림은 수아가 묶여 있는 절벽으로 향했다. 아트리아도 따라가러 했으나,

“넌 그냥 여기에 있어.”

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멈출 수밖에 없다. 힝, 소리를 내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지만, 강림은 애써 무시했다.

‘나중에 저년에게 물어보자.’

자신이 그리드가 아닌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눈치챈 녀석이다. 그렇다면, 혹시 왜 자신이 이 페이크 보스 몸에 빙의되었는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으니까. 방에서는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질문을 던지지 못했으나, 나중에 한 번 추궁하자. 추궁해서 이따위 짓을 저지른 흑막인지, 흑막의 따까리인지 알아보자. 강림은 그리 다짐했다.

“우으응?”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수아는 즉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 짓도 하지 못하게 눈가리개로 시야가 가려져 있고, 입마개로 입을 봉했다. 강림은 먼저 눈가리개부터 풀었다.

“우으으윽?”

며칠 만에 세상 빛을 보게 된 녹색 눈동자는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을 보고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남자가 나타났으니 당연할 수밖에. 경악하던 눈동자는 잠시 뒤, 증오심을 쏟아냈다.

“우으으윽, 우으으윽, 우으으으읍!”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울부짖는다. 그 모습에 강림은 살짝 기겁했으나, 마음 굳게 먹고 입마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푸하!”

며칠 동안 입을 막은 마개도 떼버렸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마개를 강림은 저 멀리 던져버렸다.

“아, 안녕? 정말 오랜….”

강림이 인사하려던 순간,

“퉷!”

얼굴에 침이 묻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악에 받친 목소리로 수아는 분노를 표출했다.

“또 날 겁탈하러 온 거라면 꿈 깨. 난 죽어도 네 놈이 노예 따윈 되지 않을 테니까!” “아니, 그러니까 일단 제 말을….” “들을 것 같냐? 들을 것 같아? 들을 것 같냐고!”

정말로 물어뜯을 생각으로 들이대는 수아. 강림이 재빨리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뜯겨나갔을 거다. 수아는 멈추질 않았다.

“이, 이봐.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내 말 좀….” “시끄러워! 너 같은 놈과 말 섞을 생각 없어!”

땅에 박힌 통나무가 삐걱거릴 정도로 수아는 날뛰었다. 그 모습에 강림은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여자, 원래 이렇게 사나웠나?’

게임에서는 인자한 여신으로 나왔는데, 왜 이렇게 불같냐? 대화로 마음을 먹으려고 했던 강림의 계획은 초장부터 완전히 엇나가버렸다. 이제 어찌하면 좋지?

-뿌득

“어?”

갑자기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수아가 매달리던 통나무가 갑자기 부러졌다.

“어?”

부러지면서 수아는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수아는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이런, 젠장!”

그걸 본 강림은 재빨리 뛰어내렸다.

“주인님, 잠깐만요!”

아트리아가 불러세웠지만, 이미 강림은 밑으로 내려간 뒤였다.

무언가 풍덩,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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