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 2화-비서가 왔다
“아, 아트리아?”
아트리아가 왔다는 말에 강림은 깜짝 놀랐다.
‘아트리아는 분명….’
그리드의 여비서다. 야심이 있는 여자처럼 보여 주인의 뒤통수를 칠 여자처럼 예상되었으나, 실상은 그리드를 위해서라면 몸도 마음도 다 바치는 충신. 단순한 미친 과학자에 불과하던 그리드를 해적 함대의 수장으로 우뚝 서게 하고, 공포의 제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아트리아 덕분이다.
만악의 근원의 충신이니 적으로 나오는 건 당연지사. 게임상에선 주인공 설화와 그녀의 동료들과 대립하는 보스로 등장한다.
그리드의 최측근이라 그런지 토 나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능력치를 보유한 여자다. 과금을 질러서 얻은 캐릭터들과 장비들로 맞서도 역부족인 적이었다.
너무 강해서 공략한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질 않자 능력치 좀 하향시켜 달라고, 하다못해 패턴 좀 줄여달라고 게임 공식 홈페이지 게시글에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막장 게임을 만든 집단답게 개발진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석 달 정도 지나고 나서야 조정에 들어갔지만.
강림도 아트리아를 잡아본 경험이 있었다. 가지고 있던 캐릭터들과 장비들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자, 돈을 무진장 질렀다. 새로운 캐릭터들과 장비들을 얻어서 아트리아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간신히 사람들이 올려준 공략법을 통해 아트리아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 쓰라린 경험을 맛보게 한 장본이 오게 될 줄이야. 근데, 지금 만나도 되는 건가? 아니, 그보다 왜 온 건지? 중요한 일이 아니면 시중을 드는 여자들이 아니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강림은 당혹스러웠다.
“주인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다시 한번 문을 두들긴다.
-똑똑똑
몇 초 뒤, 다시 한번 더 두들긴다.
-똑똑똑
또 몇 초 뒤에 문을 두들긴다.
-똑똑똑
-똑똑똑
-똑똑똑
-똑똑똑
몇 초 뒤, 몇 초 뒤, 몇 초 뒤, 몇 초 뒤, 몇 초 뒤, 몇 초 뒤, 몇 초 뒤….
문을 두들기는 주기가 점점 빨라졌다.
“주인님, 대답해보세요. 무슨 일 있으시나요?”
-쾅, 쾅, 쾅!
살짝 두들기는 정도가 점점 높아진다.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들긴다. 이를 본 강림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크, 큰일 나기 전에 막아야 해!’
다급해진 강림은 즉시 대답했다.
“아, 아무 일도 없어!” “…그렇군요.”
대답을 듣자 아트리아는 더는 문을 두들기지 않았다. 겨우 한시름 놓은 강림은 물었다.
“그, 그보다 왜 온 거지? 무슨 일 터졌어?” “….” “왜 대답이 없어?” “좀 당혹스러워서요.”
당혹? 뭐가 당혹스러운데? 의문을 표하는 강림 앞에서 아트리아는 대답했다.
“주인님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거든요.” “….” “알몸으로 들어와라, 속옷 차림으로 들어와라, 토끼족 전통 의상으로 들어와라, 개처럼 들어와라, 문 열 때까지 자위하고 있어라.” “….” “그런 식으로 조건을 붙이는데, 오늘은 아니네요.” “….” “그래서 큰 병 걸린 게 아닌가 아트리아는 너무나 걱정된답니다.” “….”
그런 변태적인 요구를 했다고? 이 썩을 그리드 놈이? 상상하지도 못한 설정에 정강림은 머리가 띵해졌다. 국내에 정식 서비스되는 모바일 게임 중 게임 등급이 이례적으로 성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막 나가는 놈일 줄은 몰랐다.
‘아니, 처음부터 막 나가는 게임이었지.’
툭하면 강간하는 장면이 나오질 않나, 윤간당하는 장면이 나오질 않나, 여자를 가축으로 삼는 목장이 나오는 건 기본이고, 기계를 이용해 여자를 능욕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주인공 설화는 물론이고, 그 설화를 따른 동료들도 능욕당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걸 볼 때마다 강림은 저절로 손이 아래….
‘아니, 아니,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을 지운 강림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트리아가 부탁했다.
“한 번 들어가게 해주세요, 주인님. 제가 진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 아니 그, 그럴 필요는….” “제가 필요 없어진 건가요?”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흐윽, 그 여우 년이 뭐가 좋다고. 당신을 죽이려 했던 그 여우가 가장 맘에 드신 겁니까? 평생 함께한 우리보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갑자기 우는 거야? 울 일도 아닌데? 너무나도 격한 반응에 강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 내가 미안하니까, 그만 울어. 그만 울라고.” “역시 주인님은 아프신 거 맞아요. 흐윽,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데….” “….”
대체 이 쓰레기 자식은 평소에 뭐하고 행동했던 거야? 아트리아의 울음이 점점 커지자 강림은 갈팡질팡했다.
‘어쩌지, 어떻게 달래지?’
단순히 사과만으로는 안 된다. 뭔가, 뭔가 특별한 것을 해야만 한다.
근데, 뭐가 있지? 이 녀석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는 뭐가 있을까? 그리드라면 분명 이렇게….
“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강림은 번뜻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크흠, 하며 헛기침한 뒤, 강림은 입을 열었다.
“누가 울라고 했나?”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아트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감히 주인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다니, 용기가 가상하구나.”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이 아트리아는 황급히 사과했다.
“미천한 죄인이 감히 말을 함부로 놀리고 말았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
와, 효과 굉장한데?
그리드는 기분이 매우 안 좋았을 때는 목소리를 내리깐다. 그 목소리는 뼛속까지 한기가 들어온 듯한 느낌이라던데, 해보니까 효과가 좋네. 효과가 없으면 어찌 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통했다.
“죽여주십시오, 주인님!”
반응이 너무나 격한 것 같지만. 강림은 아트리아에게 요구했다.
“그리 죽을죄를 지었다면 얼른 말해 보아라. 왜 날 찾아왔는지.” “…미, 밑으로 서, 서류를 넣을 테니 보, 봐주세요.”
덜덜 떠는 목소리로 말하며 아트리아는 문 밑으로 서류를 집어넣었다. 강림은 즉시 그 서류를 확인했다.
[구미호족 복원 계획서]
“구미…호라고?”
구미호. 동아시아에 나오는 여우 요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사람의 간을 먹는 요녀로 능히 알려져 왔다. 21세기에 들어서는 공포의 대상이 아닌, 사랑스러운 여성 캐릭터로 인식이 바뀐 지 오래였지만.
<여우의 은총>에서도 구미호가 종족 단위로 등장한다. 주인공 설화 역시 구미호족이며, 유일무이하게 요력을 다루는 종족이라 그런지 큰 주목을 많이 받는다. 만약 멸종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인구가 급감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지배자는 인간이 아닌, 구미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향후 구미호들은 100년 이내로 역사에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귀한 인재들을 쉽사리 썩히게 둘 순 없다.]
[지금부터라도 구미호족 인구를 최소 100명 이상씩 매년 증강 시켜야 한다.]
프롤로그에서 그리드가 구미호들이 사는 섬, 여우섬을 공격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구미호족을 자신의 노예로 삼기 위해서. 전력으로 삼아 세계 정복의 발판으로 써먹기 위해서. 그래서 전 병력을 이끌고 여우섬을 급습했다.
주인공 설화는 간신히 도주했으나, 나머지 구미호족은 전부 잡히고 말았다. 잡혀서 실험체가 되었고, 평생 그리드를 위한 전사들을 낳는 씨받이로 개조당했다.
이런 식으로 낳은 전사들이 적으로 나오며, 동족을 가축으로 취급하는 것에 분노한 설화가 여우섬을 탈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강림이 들고 있는 서류에는 구미호들을 씨받이로 개조하기 위한 실험 과정이 담겨 있었다.
[확인 결과, 구미호족은 착상이 쉽사리 되질 않는다.]
[배란 주기에 맞춰 수백 번 넘게 정액을 주입했음에도 임신한 개체는 열 명 중 한 명꼴이었다.]
분만대에 앉아 억지로 다리를 벌린 채 구속되어있는 구미호들. 구미호 한 명당 커다란 기계 상자가 놓여 있으며, 그 상자에는 굵은 막대기가 달려 있었다. 막대기는 보지 구멍에 박혀 있고, 상하 운동을 열심히 반복 중이다. 반복하면서 애액이 쏟아지고, 반복한 끝에 막대기 안에 담겨 있던 정액도 쏟아진다.
강제로 범해지는 것에 절규하는 구미호들의 모습이 사진에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와우, 이거 대단한데?’
게임에서는 단순히 삽화로만 봤던 내용이 실물로 보게 될 줄이야. 그림 이상으로 현실적인 모습에 강림은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이 중 한 명만 얻고 싶….
‘아니, 잠깐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파멸하기 싫으면 착하게 살아야 하거늘, 왜 나쁜 쪽으로 머리가 굴려지는 거지? 이러면 정말로 파멸할 건데? 강림은 나쁜 생각(?)을 지우려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댔으나,
한 번 떠오른 망상은 좀처럼 지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모든 구미호의 체질을 변경한다.]
[배란일 주기를 일 년에 열 번 이상 나오게 만든다.]
[남자만 보면 당장 박히고 싶어 안달이 난 존재로 바꾼다.]
[아이에게 먹일 충분한 모유가 나오도록 젖가슴을 키우고 들어가는 모유량도 확대한다.]
[착상이 완성될 수 있게 자궁도 개조한다.]
전면이 유리로 이루어진 통에 갇힌 구미호가 찍힌 사진이 있었다.
통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차 있으며,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동아줄은 오직 뚜껑에 달린 산소 호흡기뿐. 구미호의 입에는 산소 호흡기가 달려 있으며, 물거품이 크게 올라오는 모습이 사진에 적나라하게 나와 있었다.
양 가슴에 끝이 밥그릇처럼 생긴 케이블이 달라붙어 있고, 가랑이 사이에도 굵은 케이블이 꽂혀 있는 모습도 적나라하게 나왔으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모습도 적나라하게 나왔다.
‘정말 구미호들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썼구나.’
그리드가 구미호를 찬양하는 대사는 게임에서도 자주 나왔다.
구미호는 어떤 종족보다 강력한 놈들이다. 지금은 멸종위기종이나, 그게 아니었다면 충분히 이 세상을 지배하고도 남을 거다. 이 구미호들을 이용해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 사용할 거다.
…라고, 침을 튀기듯이 칭찬했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구미호들을 대량 생산하는 데 그리드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계획은 주인공 설화에 의해 대실패로 끝나버리지만 말이다.
“음?”
계속 읽던 도중 강림은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이건….”
[그리드 님의 정액을 쓸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라는 글귀와 함께 서명란이 찍혀 있었다.
“저기, 아트리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아까보다 겸손한 말투로 아트리아는 대답했다.
“왜 내 정액을 써야 한다고 나와 있는 거지?”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오히려 아트리아가 되물었다.
“여우들은 오직 자신의 씨앗으로 임신시키겠다고 주인님이 그리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 말에 강림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런, 괜히 물어봤어!’
그냥 알았다고 얘기할 것을, 왜 또 의구심이 든다고. 그리드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잖아. 그렇구나, 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왜!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강림은 머리가 아팠다.
“주인님?” “아, 그게, 그러니까….”
이렇게 되었으니 변명은 하자. 강림은 좀 그럴듯한 말을 꺼냈다.
“요즘 머리가 너무 아파서 기억이 가물가물해. 내가 그런 걸 했다는 걸 미처 몰랐다.” “그렇군요.”
조금 전에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아트리아는 캐묻지 않았다.
“그럼 사인을 해주시겠습니까? 탈리아가 얼른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얼른 쓰고 쫓아내자. 그런 생각으로 강림은 서명란에 사인했다.
“….”
이런, 정강림이라고 써버렸다. 바로 그어버리고 그리드라는 이름을 썼다. 다 쓴 강림은 문을 열었다.
“자, 여기….”
이때, 강림은 깨달았다.
“아….”
왜 문을 열었을까? 그냥 밑으로 넣으면 될 것을. 무의식적으로 문을 열어버린 강림은 팬티 바람 차림의 모습이 노출되고 말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속옷 차림의 아트리아가 얼굴에 홍조를 띤 상태로 강림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