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복하라, 지배하라, 진짜 보스가 되어라-1화 (2/344)

Chapter 1 - 1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라

“….”

일주일. 일주일 동안 강림은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 멍하니 침대 위에 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석상이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질 않았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다른 분들이 걱정하고 계세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팔에 가슴을 끼운 채로 비벼대도 강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요,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기운 차리세요.”

마찬가지로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만삭의 여인이 자신의 배를 강림의 등과 밀착시켜도 강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섰는데도 안 하실 건가요?”

이불 한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발기한 자지를 가리킨 알몸의 여인은 물었지만, 강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하, 아하하하….”

허탈하다는 듯이 웃는 걸 제외하면 정강림은 누구와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

‘왜, 왜 이 썩을 놈으로 다시 태어난 거야?’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깔끔한 검은 머리와 용마저 잡아먹을 정도로 매서운 흑색 눈동자.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겉만 보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왜 다른 놈도 아닌, 그리드인 거야?’

모바일 게임 <여우의 은총> 세계관의 만악의 근원인 그리드였으니까. 그리드가 누구인지 <여우의 은총>을 즐긴 강림은 잘 알고 있었다.

<여우의 은총>은 미소녀들을 육성하는 게임이다. 아군 차례가 되면 공격하고, 적의 차례가 되면 공격받는 턴제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으며,

좋은 캐릭터와 우수한 장비를 오직 뽑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막장 게임이다.

게임을 즐기면서 얻는 재화로 구매할 수 있는 캐릭터와 장비는 한정되어 있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보스를 쓰러뜨리면 무료로 캐릭터와 장비를 획득할 수 있으나, 난이도가 터무니도 없이 높아서 구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 수준이다.

이렇게 높으니 게임의 핵심이 되는 이야기도 쉽사리 즐기기가 어렵다. 에피소드 초반부는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으나, 중반부에 들어서면 급격하게 높아진 난이도로 인해 이야기를 보는 걸 포기하는 사람들이 수두룩 나왔다.

방도는 하나. 성능이 좋은 캐릭터와 공격력이 보장된 상위 등급 장비를 얻는 것.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파산을 각오할 정도의 많은 돈이.

돈을 내질 않으면 제대로 게임을 즐기기 어렵게 만들었기에 여러모로 악평을 받았다. 그렇게 악평을 받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인기는 많았다.

많은 이유는 하나.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나오니까. 너무 매력적이라 아무리 돈을 쓰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지갑을 열게 만든다.

당연한 소리지만, 남자 캐릭터가 출시되는 일은 없다. 오직 게임 시나리오에서만 나올 뿐.

그리드는 이 막장 게임에 나오는 악당이다.

‘이놈이 되어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는데!’

그리드는 게임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치는 만악의 근원이다. 지금까지 출시된 여성 캐릭터들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다 얽혀 있으며, 여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그리드를 증오한다.

그리드는 프롤로그에서 바로 등장하며, 프롤로그에서 저지른 만행을 강림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드는 뛰어난 두뇌와 무력을 가진 어느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프롤로그에서 나온 소개문대로 그리드는 천재였다. 남들은 범선을 타는데 그리드 자신은 철로 만든 배로 세계관을 쑤시고 다니니까. 화력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서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이야기가 중반부로 넘어서면 비행선까지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어째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에서 현대 문물이 등장하는 것은 뭐냐고. 아무리 적이 강하게 나와야 한다고 하지만 이건 좀 아니라고. 그러니 설정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막장 게임을 만든 사람들답게 개발진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러한 논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리드는 수많은 섬을 점령했다. 방해되는 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짓밟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드가 구제 불능의 쓰레기라는 거다.

[원하는 여자가 있으면 전부 손에 넣고 자신의 자손을 낳게 했다.]

만악의 근원답게 그리드는 여자를 좋아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지위 관계할 것 없이 무조건 강탈하고, 무조건 취했다. 임신하여 자신의 자손을 낳을 때까지 계속 범했다.

지금까지 출시된 여성 캐릭터 중 상당수가 이러한 피해를 겪었으며,

지금 강림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세 명의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얼굴이지만, 분명 그리드가 먹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들을 노예로 삼았을 거다.

[그리드가 만들어낸 강철 부대와 그리드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들의 막강한 힘 앞에 세계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 직후 어떤 장면으로 넘어갔다.

[흐윽, 흐윽, 이, 이 나쁜 녀석. 언니를, 언니를 돌려줘!]

고향이 그리드가 이끄는 해적 함대에 점령당하고, 언니가 끌려가는 걸 본 주인공 설화가 그리드와 대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선택지가 주어진다.

도주한다. 싸운다.

시나리오상 주인공 설화는 그리드와 싸우기에는 너무나 약하기에 답은 1번으로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만약 2번을 골랐을 경우,

[후윽, 후으읍, 후으으읍, 후으으으읍!]

패배하고, 그리드에게 겁탈당하는 결말을 맞이한다.

[시 싫어, 하지 마, 하지 마아아아아!]

프롤로그 한정으로 더빙이 이루어져 있으며, 당연히 설화가 강간당하는 장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우분이 처절하게 절규하는 연기에 강림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설화는 끔찍한 생지옥을 겪으며,

[하우으윽, 흐으윽, 제, 제발 누가 구해줘어어어어!]

평생 그리드의 자손이나 낳는 씨받이로 이용당하는 배드 엔딩을 맞이한다. 만삭인 주인공이 분만용 의자에 구속당한 채 기계에 농락당하는 모습을 강림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주인공을 범해버린 그리드의 모습도 당연히 잊을 수가 없었고.

‘이런 쓰레기가 인기 상위권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수많은 여자의 눈물을 빼앗고, 순결을 빼앗고, 자유도 빼앗고, 꿈마저 앗아갔다. 끊임없이 여자들을 범하고, 범하고, 또 범해서 임신시키는 미친놈. 그러면서도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몽상가이며, 주인공 설화에게 시련을 내리는 자다.

어쩌면 미치광이 과학자 속성과 정복자 속성이 섞인 개성적인 인물이라 인기가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그리드의 본질은 결국 악역이다. 주인공 설화에게 토벌당해야 할 최종 보스다. 사람들은 언제 그리드와 결전을 벌이는지 궁금했고, 게임 시나리오 1부가 후반부에 다다르자, 마침내 설화와 그리드는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그 결전에서 패배한 그리드는 도주했고, 도주한 끝에 만난 자신의 충신에게 살해당했다.

“….”

시체는 뒤이어 쫓아온 아군들에게 갈기갈기 찢어졌다. 시체 조각들을 꼬챙이들에 꽂아 광장에 내걸었다. 마침내 악마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수많은 사람이 환호했다. 지금까지 당한 울분을 갚기 위해 돌팔매질까지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던졌는지 꼬챙이들 밑에 작은 돌산이 생겼을 정도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정강림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필 빙의해도 끔찍한 최후만이 기다리는 페이크 최종 보스가 되었다는 충격에 강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알몸의 여자들이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있어도 이들을 안겠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일단, 일단 상황부터 정리해야만 해.’

그래,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멍하니 때려봤자 시간만 허비할 뿐이다. 어느 위인이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나? 시간은 금이라고. 그 금을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된다.

“저기, 미안한데,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저, 혼자 있고 싶은데?”

강림은 혼자 있을 시간을 마련해달라며 세 여자에게 부디 나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요청에 여자들은 불만 없이 나갔으나,

“존댓말? 주인님이 우리한테 존댓말을 써? 귀신 곡할 노릇이네.” “그 여우 년에게 당한 이후로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쉿, 조심해. 저분 귀에 들어가면 또 고문당할지 몰라.”

…라고 수군거렸다. 그걸 들은 강림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죄송하지만, 전 고문 안 해요. 할 생각 없어요.’

고문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지 잘 아는 데 그딴 걸 할 리가 있나? 그것도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상대로?

그래도 조교 하는 거라면 나름 보기 좋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이놈아!’

꾸짖듯이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팍팍 때린 강림은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팬티 한 장만 입은 민망한 모습이었으나, 개의치 않고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에 놓인 빈 종이를 꺼내고, 펜을 꺼내 작성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보자. 이 미친놈의 행적을.’

파멸이 확정된 막장 쓰레기이지만, 막장 쓰레기처럼 죽을 생각은 없다. 그리드의 몸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리드처럼 모두의 미움을 받으며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다. 현실로 돌아갈 방도가 아예 없다면 살아남기라도 해야지.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멍청하게 있지만은 않을 거다. 강림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모든 기억을 쥐어 짜냈다.

<여우의 은총>에 나온 그리드의 행적. 시나리오 나오는 모든 캐릭터의 대사. 그리고 1부 전체를 이루는 모든 챕터의 전체 줄거리 등. 희미한 기억도 강림은 전부 다 적었다.

그리고 잠시 뒤,

“이 정도면 되겠지?”

수십 장에 달하는 종이가 책상 위에 쌓였다. 잘못 쓰는 바람에 버린 종이도 수십 장이었지만. 강림은 자신이 쓴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기억이 나질 않아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부위도 있지만, 그래도 틀리진 않았을 거다. 마지막 한 장까지 다 읽은 강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정말 쓰레기네.’

제작진은 미움받는 캐릭터로 만들 작정이었을까? 그리드가 저지른 온갖 악행이 종이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마을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거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기본이요, 남자는 자신 혼자만 있으면 그만이라며 포로로 잡은 남성을 다 죽이기 일쑤이며, 연인이나 남편이 있는 여자에겐 아주 끔찍한 짓을 저질러 강제로 굴복시켜 복종하게 하고, 만약 자신에게 대드는 여자라면 아무리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여자라고 끔찍하게 고문한다. 필요하다면 그 이상도 한다.

이게 그리드였다. 오직 자기만이 최고라 여기며, 자신에게 거스르는 자들은 가차 없는 악당. 착한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변호라도 해줬을 텐데. 여자들을 마구 후리고 다니니 부럽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는데, 이놈의 행적을 보니 왜 동경했는지 강림은 후회했다.

“이제는 탈출 방도를 찾는 것뿐인데….”

그리드의 행적을 전부 알아냈다. 남은 것은 이 행적에서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말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는 것. 그걸 어찌 찾아야 할지 강림은 막막했다.

처음부터 쓰레기였으니까.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의 언니를 겁탈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 주인공 설화까지 먹던 놈이다. 프롤로그 이전부터 악행을 저지른 놈인데, 과연 생존 루트가 있을까? 차라리 이놈의 유년기 시절에 빙의했다면 답을 찾았을지도 모르나, 한창 해적 활동을 하던 시기에 빙의되었다.

이런 악조건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똑똑똑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긴 건 그때였다.

“주인님. 아트리아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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