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 - 프롤로그-페이크 보스가 된 남자
빙의란 무엇인가?
단어 그대로 자신의 영혼이 다른 존재에 깃들게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 예시는 매우 다양하다.
뼈 빠지게 가난한 집안의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고, 평범한 중산층 집안의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으며, 평생 놀고먹고도 남을 부잣집 자손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던 게임, 만화, 소설 캐릭터의 몸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혹은 악역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주인공과 대립하다 끝내 몰락하는 악역 영애가 될 수도 있고, 끔찍한 최후가 예정된 악역이 될 수도 있으며, 반드시 토벌당해야 할 최종 보스가 될 수도 있다.
악역도 선한 역도, 주인공도 아닌, 그저 배경에만 나오는 단순한 단역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도 있으며,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일도 있다.
이렇게 빙의에 관한 예시는 무궁무진하나, 어디까지나 상상의 나래에 불과하다. 진짜로 빙의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빙의해서 활약할 수 있는 다른 세계의 존재도 허구일 뿐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밝혀지지도 않았다. 만약 진짜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세상이 발칵 뒤집혀 졌을 거다.
현실에 지쳐 새 삶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 그 소망을 위해 만들어진 요소. 진심으로 그리되기를 소망하나, 허구에 불과한 존재.
그것이 빙의다. 일어날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정강림이란 남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 이게 뭐야….”
거울에 나타난 존재를 보질 않았다면 그 생각이 백번 옳다고 주장했을 거다.
“이 얼굴은 뭐냐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림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조각상처럼 반듯한 턱선. 매서운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에 물든 것처럼 보이는 흑색 단발머리. 꾸준히 관리한 흔적이 엿보이는 탄탄한 근육.
일에 치여 얼굴 관리를 제대로 하질 못해 언제나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자신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존재였다. 살이 뒤룩뒤룩 쪄서 볼품없던 자신의 몸과 달리 이 육신은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약 강림이 꾸준히 몸을 관리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완벽한 이상향이었다. 혹시나 해서 등을 돌리니 뒤쪽도 근육이 확실하게 잡혀 있었다.
“왜 내가 이런 녀석에게….”
눈을 뜨기 전에 강림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야근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바람에 회사에서 야근하고 있었다.
사실 강림은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잔소리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일찍 시작할 것이지, 왜 이제야 시작하냐? 제대로 해놓은 것도 없는 주제에 그 길로 밥벌이를 할 수 있겠냐? 설득할 결과물도 내놓지 못한 주제에 무슨 그 길을 간단 말이냐? 좋은 말로 할 때 공부해라. 공부해서 취직해라. 안 그러면 가지고 있는 거 다 부숴버린다.
잔소리인지, 협박인지 구분할 수 없는 폭격을 강림은 연일 당해야만 했고,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원하는 일을 포기하고 공부해서 회사에 취직했다. 취직했지만 강림이 마음 편히 쉬는 날이 없었다. 승진한 이후에도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날을 가질 수 없었다. 부모님은 자기들 말이 옳다는 식으로 주장하나, 강림은 전혀 아니었다.
취미로도 하고 싶은 일은 하지도 못하고, 돈을 버는 기계로 살아나는 나날. 매일 지친 상태로 퇴근하는 강림에게 있어서 유일한 안식처는 모바일 게임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게임을 하면, 하면서 캐릭터를 육성하면, 과금을 질러서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오면 강림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좋아하는 캐릭터가 야릇한 상황에 빠질만한 전개가 나오면 입꼬리는 귀에 걸렸다.
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그림이든, 실사든 몸매가 발군이 여자를 보면 저절로 서는 게 남자의 숙명이니까.
그래도 남들에게 들키면 매우 위험한 게임이라 항상 아무도 없는 곳에서 즐겼다.
그날도 혼자 남아 야근하고 있었기에 한 번 즐기자는 생각으로 게임을 켰고,
그 직후 의식을 잃어버렸다.
“왜 하필 이놈이야….”
그리고 깨어난 강림은 알게 되었다.
자신이 즐기는 모바일 게임 속에 나오는 어느 한 남자에게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미소녀 육성 게임이라 키울 수 있는 캐릭터는 오직 여성 캐릭터들 뿐이다. 남자 캐릭터는 시나리오상에서만 나온다.
강림은 게임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잘 알고 있기에 이 남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왜 페이크 보스인 녀석으로 다시 태어난 거냔 말이야!”
그래, 페이크 보스. 다른 누구도 아닌, 페이크 보스인 남자가 되어버렸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페이크 보스가.
하필 빙의해도 왜 하필 이 쓰레기에게 빙의한 거냐. 강림은 크게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