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67 - 767.위그드라실 (6)
“캬아아, 얼굴 죽이… 아니, 드디어 나오셨군요. 제가 오늘 공주님의 대리 호위인 성수호입니다. 웨드록 가문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후광이 쏟아져 나오듯, 스텔라의 뒤편에서 석양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잎사귀 같은 눈망울에서는….
‘캬… 표정 죽이네.’
혐오감이라는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피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스텔라는 내 말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나는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스텔라는 혐오감이 출렁이는 눈망울로 응시하다가 내 갑옷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갑옷은 길드온에게 뺏은 [아르보스 왕실 갑옷]이었다.
그렇게 갑옷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스텔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저를 호위하던 근위병들을 어떻게 했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내가 근위병들을 전부 처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그녀의 오해를 풀기 위해 설명을 시작했다.
“크흠, 말하자면 좀 긴데….”
나는 VIP 카지노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해줬다.
길드온과 대결, 그리고 이어진 그의 부하들과의 대결.
그리고 현재 그들의 상황까지….
“그렇게 해서… 너를 호위하던 근위병들은 당분간 나를 위해서 일하기로 했어.”
“….”
스텔라는 황당함이 잔뜩 담겨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호위를 위해 데리고 온 녀석들이 죄다 도박에 빠져서 포인트와 아이템, 거기다 자기 몸까지 팔아버렸다.
여기서 침착하면 그건 사람… 아니, 엘프가 아니지.
스텔라는 몇 차례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제 호위병을 자처했다는 건가요?”
“응. 내 실력이면 충분하잖아?”
사실 스텔라가 내 말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며 이 일을 꾸민 건 아니었다.
지금 내가 이런 행동도 일종의 도발이었다.
네가 믿고 의지하던 호위병을 전부 내가 처리했고, 너는 2주일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네가 지금 의지해야 할 인물은 나 뿐이라는 식의 도발….
나는 스텔라가 내 도발에 화끈하게 반응할 줄 알았다.
하지만 스텔라는….
“좋아요. 가죠.”
기품있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앞장서라고 눈치를 줬다.
“…?”
화끈하긴 화끈하다.
설마 저렇게 수락할 줄은….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스텔라가 눈썹을 아름답게 좁히며 말했다.
“참고로 제 호위를 자처했으니, 주의 사항을 말해드릴게요. 제가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세요.”
“하하하….”
얼떨결에 나는 스텔라의 호위병이 되었다.
‘일단 재미있어 보이니까, 장단에 맞춰줄까.’
그렇게 스텔라를 데리고 앞장서며 호텔 바깥으로 나왔다.
길드온이 미리 말해준 대로 호텔 입구에는 웨드록 가문에서 보내온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차로 향하는 내내 나와 스텔라는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뭐야? 저 공주 또 방문했네?)
(조심해. 괜히 눈 마주치면 바로 칼부림 나니까.)
(맞아. 저번에 쳐다봤다는 이유로 바로 눈에 칼을 쑤셨지?)
(거기다 여기서는 엘프들의 살인도 어느 정도 눈감아주니까….)
스텔라는 이미 유명한 인물인 듯 보였다.
심지어 민하연과 한봄에게 치근덕댈만한 소환사들도 스텔라에게는 접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유명인이 스텔라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호위병이 왜 한 명… 그것도 인간이네?)
(어!? 저 사람 성수호 아냐?)
(아니, 저게 뭔 일이야…?)
다들 괴상한 조합을 보듯 나와 스텔라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경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마차에 도착하자, 나는 예의상 마차 문을 열어주고, 스텔라가 탑승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설마 저 혼자 타라는 건가요?”
“…응?”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서 눈치를 보자, 스텔라가 살짝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 오를 때 몸을 지지할 수 있도록 손을 잡아달라는 의미였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하하….”
솔직히 놀랐다.
내가 쳐다보는 것조차 혐오하던 스텔라가 손을 잡아 달라고 할 줄이야.
나는 이 독특한 엘프의 모습에 웃으며 손을 잡아줬다.
스텔라는 하얀색의 팔뚝 전체를 감싼 형태의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맨손을 직접 만져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었다.
‘뭐… 애초에 나도 중갑을 착용하고 있어서 의미 없지만….’
스텔라는 내 손을 잡고는 마차에 차분하게 올라탔다.
그렇게 스텔라를 마차에 태운 뒤에 나도 마차에 탑승해서는 웨드록 가문으로 향했다.
마차 내부는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예전처럼 위치 노출을 꺼려서 그런지 마차 창문은 전부 암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마차 내부에는 나와 스텔라만 탑승한 채 조명 하나가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스텔라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심심한지 한마디 던졌다.
“의외네요.”
“응? 뭐가?”
“아까 에스코트… 능숙하길래요.”
내가 슈트라에서 에스코트 행위를 자주 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능숙할 정도로 많이 했나 하면… 잘 모르겠다.
“흠… 그냥 대충 한 것뿐인데.”
그런데 스텔라는 계속해서 그 부분에 관해서 내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제 주변에 있는 자들은 오랜 기간 저를 보필했으면서도 서툴기 짝이 없었어요.”
“흐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철저하게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스텔라가 내게 칭찬하니 나름 쑥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의문도 들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저러지?’
내 호위를 승낙한 것부터 이렇게 수다를 떠는 모습, 심지어 내게 칭찬 세례를 늘어놓는 것까지 모두가 의문이었다.
거기다 스텔라의 칭찬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에스코트 부분은 진심이 어느 정도 담겨 있긴 했지만, 그 뒤에 늘어놓는 말들이 억지로 뽑아내는 느낌이랄까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의문은 웨드록 가문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해소할 수 있었다.
“로열층은 언제 비워주실 예정인가요?”
“하하하하….”
그놈의 로열층….
‘이야… 진짜 대단하다.’
칭찬을 만들어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었다.
기질창으로 본 스텔라의 성격대로라면 없는 칭찬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녀에게는 굉장히 고역이었을 테니까.
스텔라의 말에 놀란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신기하네요. 로열층이 탐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저 정도는 아닌데.]
[엘프들은 절제력이 높은 편이지만, 한번 욕구가 넘치면 절제력이 감당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길드온이 되겠다.
길드온과 그의 부하들은 내 권모술수에 놀아나서 고작 하루 만에 도박에 빠졌으니까.
‘이따 저녁에 업소에 갈 시간은 되겠지?’
스텔라 호위를 마치고, 나중에 길드온 패거리를 데리고 매춘 업소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계약대로라면… 마담이 내게 꽤 큰 포인트를 건네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대하며 스텔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근위병들은 걱정되지 않아? 너를 로열층에 묵게 해주려다가 빈털터리가 됐는데?”
“하아….”
스텔라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려는 내 모습에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불만보다는 그저 내 말에 순순히 대답해줄 뿐이었다.
“이제 근위병이 아닌데, 제가 굳이 신경 써줘야 할 이유가 있나요?”
“하하하….”
길드온과 그의 패거리들… 오늘부로 백수 신세가 되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좋은 일자리 마련해줄 테니까.’
엘프들이라면 한여름 못지않게 잘 벌어다 주겠지?
나는 속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스텔라의 초록색 눈빛을 응시했다.
나를 응시하는 내내 불쾌함이 담겨 있었지만,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스텔라는 아까 내가 한 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고는 대답했다.
“그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겠는데? 지금 로열층의 비용은 내가 내고 있지만, 혼자 지내는 게 아니거든.”
“…그게 무슨 말이죠?”
나는 스텔라에게 로열층에 지내고 있는 내 여자들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그리고 로열층에서 지내면서 겪은 광란의 파티도 적나라하게 읊어줬다.
하지만 추파와 같은 경험을 말해줘도 스텔라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걱정할 뿐이었다.
“후우… 결국 그 여자들 때문에 나가기 힘들다는 이야기인가요?”
“응. 다만 아까 낮에 했던 내 제안을 들어주면 내가 설득해볼 수는 있겠지.”
내 제안은 간단하다.
스텔라가 내 침실에서 같이 자는 것.
스텔라는 내 말을 듣자마자 지금까지 보여줬던 불쾌감보다 한층 더 깊이 파인 듯한 혐오를 내비쳤다.
“…인간은 저희 엘프들 기분을 저조하게 만드는 데에 재능이 있는 것 같네요.”
다른 여자들이랑 물고 빠는 이야기는 관심 없었지만, 그 사이에 자신이 끼는 이야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스텔라는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내게 제안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
“전(前) 근위병사들을 당신에게 완전히 넘겨주겠어요.”
“허…, 이미 3층 한정이지만, 길드온과 병사들의 소유권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3층 한정이지만, 길드온의 패거리는 이미 내 소유물이었다.
하지만 스텔라의 말은 3층 한정이 아니었다.
“5층에는 지배력이라는 게 존재해요.”
스텔라는 왕가의 출신으로 아르보스 왕국의 40% 지배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근위대 병사들은 전부 제 소유물이죠. 그 권한도 넘겨드릴게요.”
“와….”
아무리 길드온이 쓸모 없어졌어도 이렇게까지 팔아먹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그저 로열층에서 지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스텔라에게 근위병사들은 부하가 아니었다.
“어때요? 길드온은 나름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의 기사예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의 토지와 재산도 넘겨줄 수 있어요.”
“허….”
그저 소유물 같은 것이었다.
정말 궁금했다.
‘아르보스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4층도 가지 않았는데, 5층이 어떤 곳인지 벌써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장난으로 길드온에게 춘식이라고 하긴 했는데, 그 이름과 굉장히 어울리는 세상이 아닐까 싶었다.
스텔라는 기대감이 흘러나오는 눈동자로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차용증서이라도 써드릴까요?”
나는 이 황당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스텔라를 쳐다봤다.
“허어….”
진짜 어지간히도 로열층에서 묵고 싶은 모양이었다.
‘흠… 그런 이건 어떠려나?’
나는 로열층을 애타게 원하는 스텔라에게 허무맹랑한 제안을 치우고….
“그럼 이건 어때?”
“…?”
정식으로 제안했다.
“합숙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