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드라실 (6)
“자, 그럼… 그 성수호라는 녀석을 끌어내 볼까나….”
“개소리하지 마!!”
레드 소환사의 말에 순순히 응할 한여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여름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이런 씨발!!! 안 움직여!!”
그저 레드 소환사의 명령에 따라 석고상처럼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입을 주절주절 떠들며 화풀이하려고 했지만….
“시끄럽군. 너는 입 좀 다물어라.”
“끄으으읍!!”
자신을 농락하던 성수호에게 당하는 것처럼 레드 소환사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말하지만, 계약은 계약이고, 상태 이상은 상태 이상이다. 우리 쪽이 상위라는 이야기지.”
“끄읍…!?”
레드 소환사의 말인즉슨….
“우리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네 녀석이 할복해서 자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
한여름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회귀라는 기회를 캐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선택지가 더 생겼을 뿐이었다.
한여름에게 그 선택지를 선택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한여름을 죽일 수 있는 선택지를 가진 자는 성수호와 앞에 있는 레드 소환사.
레드 소환사는 한여름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한여름은….
“그리고 너는 말주변이 없으니까 이제부터 입도 뻥긋하지 마. 대화는 무조건 저 예언자를 이용하도록 하지.”
한마디도 못 하는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희망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래… 이 녀석들 분명 인질로 쓰려고 잡은 거지? 나중에 쓸모없으면 분명 나를 죽일 거야.’
성수호의 그늘 안에서는 도저히 회귀할 방법이 없던 한여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 성수호를 죽이거나, 자신을 죽을 방법에 좀 더 근접한 셈이었다.
희망이라는 빛이 그늘 안으로 새어 들어온 셈이었다.
얌전해진 한여름의 모습에 레드 소환사는 피식 웃고는 한가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가을은 두려움이 담긴 눈동자와 별개로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니까. 우리를 살려줄 생각이 없나 보네?”
“훗… 걱정하지 마라. 인질로 쓰이고 나서는 좋은 자리 마련해주지.”
“….”
한가을은 레드 소환사의 말뜻을 단번에 해석할 수 있었다.
‘같은 레드 소환사로 만들겠다는 소리네.’
위그드라실에서 제일 위험한 존재들을 뽑으라고 하면 단연코 레드 소환사였다.
위그드라실에서 제일 안전한 여관부터 시작해서 동네의 식료품 상점조차 이용하지 못하는 그들….
그런 환영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을 환영하는 자들은 하나뿐이다.
같은 레드 소환사.
레드 소환사가 되면 절벽에서 떨어지기 싫어서라도 썩은 동아줄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아.’
이대로는 성수호가 와도 도와줄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오면 레드 소환사의 명령대로 그를 더 큰 위험에 빠트릴 뿐….
거기다 그렇게 성수호를 위험에 빠뜨린 뒤, 레드 소환사의 길까지….
‘그냥… 겨울이나 따라갈걸….’
한가을은 그렇게 후회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절망하기 시작했다.
그런 한가을의 모습을 만족했는지 레드 소환사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레드 소환사는 자기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명령하기 시작했다.
중요 지점에 함정을 깔아 놓는 것부터 시작해서 성수호를 유인하는 것까지….
“녀석에게 미궁으로 혼자 들어오라고 쪽지를 남겨라. 절대… 절대 직접 전달하지 말도록.”
“네!”
한가을은 점집을 운영하면서 상대방의 분위기를 금세 파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람이 정말 강하긴 강한가 보네.’
레드 소환사들은 성수호 하나를 유인하기 위해 갖가지 함정을 설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심지어 협박성 메시지를 넘기는 것조차 주의하라고 말할 정도….
‘그래… 그 사람 강하잖아. 기대해보자.’
한가을은 성수호라는 존재를 믿으며 레드 소환사의 명령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한여름은….
“끄으읍… 끄으으읍!?”
“…하아.”
닫힌 입으로 계속 바둥거리며 한가을의 불안감을 계속 증폭시킬 뿐이었다.
..
..
한가을이 이렇게 인질이 되고 나서 한가지 긍정적인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어? 뭐야? 혹시나 해서 들러봤더니 무슨 일이래?
한가을의 채널에 누군가가 채팅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직 고작 한 명뿐이었지만, 한가을에게 있어서 나름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한가을은 채팅 대화를 입을 열었다.
“납치됐어요.”
└엥? 납치? 네가 왜? 앞날도 잘 보면서 재미없게 지내더니.
채널의 반응은 정상적이었다.
한가을은 3층에 오고 나서 도시 밖으로도 거의 나가본 적이 없던 안전 지향형 인물이었다.
던전, 콜로세움, 카지노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여유 있는 삶을 살던 그녀였다.
이제 막 들어온 채널의 존재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한가을은 레드 소환사에게 끌려가는 중에도 마치 평생 응어리를 쌓아 놓았던 외로움을 털어내듯이 채널의 존재에게 모든 사실을 술술 불었다.
그간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던 한가을이었다.
하지만 그간 쌓였던 외로움 때문인지, 한가을은 채널에 있는 유일한 존재에게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낼 정도로 속 시원하게 내뱉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채널의 존재는….
└이런 미친! 그런 재미있는 장면을 놓쳤다고!?
“….”
한가을은 잠깐 이마에 열이 치솟아 올랐지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채널의 존재들이 어떤 녀석들인지는 그녀도 반년간 지내면서 잘 알고 있었다.
한가을을 끌려가면서 조심스럽게 채널의 존재에게 물었다.
“혹시 빠져나갈 방법 있을까요?”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절망감을 불어 넣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절망감이 가득한 안개 같은 존재라고 해도….
└쓰읍… 나도 뭔가 도와주고 싶다만 내가 줄 수 있는 건 포인트뿐이다.
<10,000포인트를 후원해주셨습니다.>
“….”
외로움이라는 진흙 늪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아… 큰일이네. 어떻게 하지.”
레드 소환사들의 계획은 대충 감이 왔다.
한여름과 한가을을 약속 장소에 놓고, 성수호가 두 사람을 구하러 왔을 때, 단번에 덮치겠다는 계획.
단순하지만, 한편으로 효과는 뛰어날 것이었다.
지금 있는 장소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였다.
한가을은 지금 그들이 끌고 가는 이 장소가 어딘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아까 갇혀 있던 동굴 같은 장소도 있고, 어떨 때는 미로 같이 건축화된 벽의 형태를 띠는 장소도 있었다.
그리고 장소마다 나타나는 몬스터의 종류도 확연히 달랐다.
모르는 장소, 모르는 몬스터, 모르는 함정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한가을은 이 장소를 바로 유추할 수 있었다.
‘도시 지하 미궁이구나….’
한가을이 아는 한, 3층의 공용 위상 던전은 미궁이 유일했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익숙한 석벽들을 볼 때마다 한가을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겨울이가 억지로 가자고 해서 몇 번 들른 적이 있긴 했지.’
도전 정신이 투철한 한겨울은 한가을을 끌고 몇 번이나 이 미궁을 도전한 적이 있었다.
결국 그 당시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에 레드 소환사를 만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실력을 갈고닦으면 다시 도전하겠다고 선포한 한겨울.
그 당시에 한겨울의 모습은 한가을에게 짜증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귀찮게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동생 같지 않은 동생.
‘…지금 뭐하려나.’
한겨울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후회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선두에 있던 레드 소환사가 발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함정은 잘 깔아 놨겠지?”
“그… 깔았습니다. 다만, 어제 소실된 함정이 너무 많아서… 창고에 있는 것을 전부 털어왔습니다.”
“…씨발.”
한가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제 소실된 함정?’
완벽하지 않았지만, 대충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성수호.
‘…그렇게 쓰고도 못 잡은 거구나.’
그 한 명을 잡기 위해 뭔가 일을 꾸몄는데, 처참하게 실패한 모양이었다.
아마 성수호와 같이 있던 파티원들의 도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가을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성수호만 맴돌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실력이 좋지? 초기에 소환된 사람들 말고는 대부분 밸런스 조정이 되어 있을 텐데….’
가늠할 수 없는 실력.
한여름의 운조차 꺾어 버리는 운.
그리고 동료애까지….
딱히 불평등하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납치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민하연과 한봄 옆에 있는 성수호가 신경 쓰인 거지, 성수호의 실력이나 운을 신경 쓰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렇게 잡히고 나니 그녀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은 위그드라실… 여긴 결국 대자연의 품이 아니라, 무법지대라는 거지.’
위기가 그녀를 덮치자 그녀도 기대고 싶은 누군가를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냐… 일단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부터 신경 쓰자.’
한가을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이 녀석들 여기에다가 묶어놔.”
“!?”
레드 소환사들이 한가을과 한여름에게 안대를 씌우고 포박하기 시작했다.
“끄으으읍!? 끄으읍!!”
입을 열지 못하는 한여름 대신에 한가을이 먼저 질문했다.
“뭐야!? 우리를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 하기는… 여기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어. 그리고 너.”
너라고 지칭한 존재는 한가을이었다.
그는 한가을을 보며 한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 성수호라는 녀석 나타나면… 네가 몸을 날려서 녀석을 방해해.”
“웃기지 마! 내가 왜 그런 짓을….”
한가을은 반항하려고 외치다가 목소리를 점차 낮출 수밖에 없었다.
화를 낮춘 게 아니었다.
화를 낮출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글쎄…? 왜 할지는 너희들이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해주는 거지.”
“….”
레드 소환사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한가을은 눈 앞을 가리는 안내가 씌워지면서 속으로 바랐다.
‘제발… 제발 오지 마!’
한가을이 할 수 있는 건 이제 기도뿐이었다.
성수호가 온다면 분명 한가을은 레드 소환사의 명령대로 성수호의 발을 묶는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등 뒤에서 날아오는 칼까지 막아내는 인간은 없다.
‘제발 오지 마. 오면….’
한가을은 하염없이 그렇게 기도했다.
하지만 한가을은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내면 어딘가에서 자신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안대를 쓴 채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순간이었다.
자신의 귓속으로 다정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정말 여기 있었네?”
“아….”
누워 있음에도 순간 온몸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속으로는 오지 말라고 계속 바랐지만, 한편으로 간절히 기다린 남자.
그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괜찮으세요?”
“흐읏….”
안대가 풀리면서 빛이 눈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자연의 빛이 아닌 사람에게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렇게 한가을이 강한 빛에 눈을 가리고, 최대한 시야를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순간이었다.
“이야… 정말 올 줄은 몰랐는데?”
보이지 않는 시야 너머에서 레드 소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다정했던 성수호의 목소리에 분노가 압축된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너냐? 어제 우리 파티 습격하고, 한가을 씨를 납치한 게?”
“글쎄…? 굳이 내가 대답해야 할 그런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한가을은 그 말과 동시에 시야에 초점을 맞추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직 쓰러진 한여름과 이제 막 포박에서 풀린 자신.
그리고….
“…머리 위에 빨간 보석을 주렁주렁 단 녀석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네?”
성수호의 말대로 주변에는 많은 레드 소환사가 포위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상황.
“얌전히 있으면 죽이지는 않을게. 우리가 이래 봬도 신사적으로….”
레드 소환사가 그렇게 말을 이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퍼어엉! 찌지직! 콰콰쾅!!
“끄아아아악!”
“히끼이이익!!”
“커억….”
레드 소환사들 무리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덮치기 시작했다.
터진 건 딱 봐도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강한 능력들이었다.
화염이 퍼져나가고, 번개가 터져나가며, 누구는 목이 순식간에 꿰뚫렸다.
대화를 주도하던 레드 소환사가 날벼락 같은 일에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뭐, 뭐야!!!”
“기, 기습인 것…! 커억!”
대답 도중에 또 한 명이 죽어 나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드 소환사가 성수호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이런 씨발! 목숨을 살려주려고 했더니, 동료를 끌고 와!? 나는 합공한다! 일단 녀석을 생포해!”
“와봐! 오늘 뒤졌다!”
성수호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레드 소환사를 상대하려는 순간이었다.
“저 녀석을 방해해라!”
“!?”
레드 소환사가 명령한 건 조직원이 아니었다.
바로….
“내, 내 몸이!”
바로 한가을이었다.
한가을은 갑자기 들려온 명령에 옆에 있던 성수호의 몸을 와락 껴안으며 그의 행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가을이 성수호를 와락 껴안은 순간….
“흐어어….”
한가을의 눈꺼풀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한가을의 귓속으로 들려온 마지막 소리는….
푸욱!
“크읏!”
무언가 살을 파고 드는 소리와 성수호의 신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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