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드라실 (5)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민하연과 한봄만큼은 비상시에 혼자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실력을 갖게 하고 싶었다.
그야, 한봄은 힐러라는 직업 특성상 혼자서 무력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당장은 예외로 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민하연은 달랐다.
B등급 소환사를 단숨에 제압한 민하연.
분명 지금 결투로 실력을 입증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벨이 오른 덕분이었다.
민하연도 충분히 위기를 많이 겪었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3층부터 본격적으로 사람과도 싸워야 하니까 강한 녀석이랑 싸우는 법도 익혀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영혼 소환술]을 시도했다.
카테고리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자… 아까 민하연이 소환한 녀석들이랑 싸우려면 나름 실력 좀 있는 녀석을 소환해야겠지? 일단 호감도 순으로 해서….’
나는 그렇게 훑어보며 호감도 순으로 목차를 나열하는 순간이었다.
의외의 존재가 카테고리 안에 섞여 있었다.
‘응? 이건 또 뭐야?’
호감도는 높았지만, 이름이….
$#%345 [호감도 68]
영사관에서 봤던 연호와 같은 분위기였다.
다만 연호와 다르게 이름이 전부 가려져 있었다.
나는 카테고리에 나와 있는 인물의 목록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 능력은 장난 아니네? 좋아. 일단 불러서 누군지 확인이나 해보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록에 나와 있는 영혼을 소환했다.
***
민하연은 B등급 소환사를 순식간에 처치한 뒤, 성수호에게 손을 흔들며 흥얼거렸다.
“나… 진짜 강해졌네.”
민하연은 위그드라실에 도착하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불안감만 품으며 지내오고 있었다.
한여름과 같이 위그드라실에 소환됐을 때만 하더라도 민하연의 내부에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두려움이 심어져 있었다.
그나마 그녀가 침착한 표정과 태도를 유지할 수 있던 건 양궁을 하던 경험 덕분이었다.
하지만 점점 현실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싸움을 겪으면서 깊숙이 박혀 있던 두려움이 온몸으로 퍼져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려움이 점차 피어오르는 동안 두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 남자는, 자신의 옆에서 오랜 시간 있었음에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한여름.
그리고 다른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성수호.
성수호는 만나자마자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하연은 성수호에게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불편하거나,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너무 자주 겪는 일이다 보니 어느 순간 태연해진 것뿐….
하지만 성수호와 보스 전을 치르면서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로서의 보호 욕구.
남자 품 안에서 보호받는 그 기분.
여장부 기질을 달고 살던 민하연이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과 더불어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회귀로 인해서 민하연은 성수호를 절대 떠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민하연은 언제나 그런 성수호와 같이 지내면서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성수호를 방해되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을….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그 부담감을 살짝 지울 수 있었다.
민하연은 자신감을 조금 깊게 품으며 피식 웃었다.
“뭐, 이것도 수호 덕분이지만….”
민하연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리며 다시 콜로세움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로 향하는 길에는 경비원들을 제외하고는 딱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B등급 중에서도 패배한 자들은 돌아가고, A등급의 경우에는 아직 마주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민하연은 조용한 복도를 거닐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하는 고민은….
‘다음에는 어떤 플레이를 해야 좋아할까.’
성수호를 만족하게 만들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 민하연과 성수호는 서로 껴안기만 해도 행복해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민하연도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성수호 곁에 여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자신만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은 한정되어 있었다.
민하연은 한동안 고민하더니, 고개를 절레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냐…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문제가 생기기 전에 없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진짜 생길 뿐이니까.’
민하연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안절부절못한 마음을 잠재우며 다시 대기실로 향했다.
그렇게 대기실에 거의 다다르는 순간이었다.
대기실 쪽에서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호쾌하게 웃으며 민하연을 맞이했다.
“드디어 왔군.”
“…하아.”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민하연의 입에서는 한숨부터 나왔다.
그렇게 한숨을 쉬자,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뭐, 귀찮게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대화 정도는 가능하겠지?”
“아니.”
“…뭐?”
민하연의 말에 남자는 아까 성수호에게 거절당했을 때처럼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미소와 불쾌함이 동시에 담긴 독특한 표정이었다.
민하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수호가 하는 결정에만 따라. 수호가 당신이랑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 말을 지킬 뿐이야.”
“호오… 의리가 있군.”
민하연은 의리라는 단어에 오히려 화를 낼 뻔했다.
오늘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과 성수호의 관계를 애정에서 의리로 격하시킨 것이었다.
‘아냐… 이런 걸로 화내면 진짜 바보가 되는 건 나지.’
민하연은 속으로 꿍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다시는 찾아오지 마.”
“만약….”
“…?”
남자가 흘리는 말에 민하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렇게 멈춰선 민하연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그 녀석을 이기면 대화가 된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
민하연은 도미 드레크의 말을 골똘히 머릿속에 정리하더니,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웃어?”
아까보다 더 험악한 표정을 지은 도미 드레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민하연은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네가? 푸하하… 수호랑 싸워서 이겨? 크흐흐….”
“….”
도미 드레크가 이를 갈며 민하연을 보자, 민하연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
“만약에 네가 수호랑 싸워서 이긴다? 그럼 내가 종일 상대해줄게.”
민하연의 말에 도미 드레크는 피식 웃더니, 한마디를 흘렸다.
그가 흘린 말은….
“이제라도 그 남자의 얼굴이라도 많이 봐둬라. 그 자신만만한 표정도 오늘까지만 볼 수 있을 테니까.”
성수호에 대한 경고였다.
도미 드레크는 그렇게 성수호에 대한 경고를 남기고 떠나갔다.
민하연은 그렇게 떠나간 도미 드레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한숨을 쉬면서 투덜거렸다.
“하아… 나도 진짜 바보네. 수호한테 조심하라고 해놓고 순간 욱해서….”
차라리 자신을 향해 추파를 던졌다면 적당히 내쳤을 것이다.
하지만 도미 드레크가 건드린 상대는 다름 아닌 성수호.
민하연의 역린이었다.
“끙… 수호한테 미리 말해줘야겠지?”
민하연도 상대의 실력을 보는 눈은 어느 정도 가진 편이었다.
민하연이 지금까지 봐왔던 성수호의 실력은 규격 외였다.
도미 드레크처럼 한 층을 군림한다고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쯤은 민하연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과 별개로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아직 멀었네…. 차라리 나를 욕하던가….”
민하연은 분노의 화살을 어느새 자신에서 도미 드레크로 향하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대기실 안에는….
“아… 설마 지금 출전하러 간 건가?”
성수호의 모습은 없었다.
민하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대기실을 나온 뒤, 경기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경기장에 서 있는 성수호의 모습을 보면서 안도했다.
“아… 지금 나갔구나.”
딱히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다만 작은 상처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걱정하다 보니 어느새 경기는 마무리되었다.
<맙소사! 비전투원인 연금술사가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초유의 사태입니다!>
민하연은 저 말에 잠시 갸우뚱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 맞다. 연금술사는 원래 비전투 소환사였지.”
성수호가 다방면으로 활약을 하는 바람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금술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이긴 성수호를 보며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만약 나랑 수호가 계속 이기고 올라가면….”
A등급 전에서 싸우는 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민하연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성수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백기를 들면… 그건 안 되겠지?”
콜로세움은 명색이 결투장이긴 하지만, 포인트가 오고 가는 도박도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만약 민하연이 경기 시작 전에 백기를 들게 되면 자칫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일단 수호랑 이야기를 해보자.”
민하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성수호에게 가려고 했지만….
(민하연 선수! 다음 순서입니다! 빨리 와주세요!)
“하아… 사람 숫자가 없어서 엇갈린 거 같네. 일단 B등급 전투 끝나고 나서 이야기해보자.”
쉴 시간도 없이 전투에 불려가게 되었다.
..
..
무난하게 A등급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A등급만의 대우.
“1인실….”
민하연은 A등급만 이용할 수 있는 1인실에 들어와서 내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호텔처럼 우아함은 없지만, 편의성만큼은 충분히 호텔과 견줄만한 장소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날 콜로세움에 참가해야지만, 이용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뭐, 그것만으로도 어디야.”
민하연은 싱긋 웃으며 화려한 장식이 꾸며진 침대 위에 뒹굴기 시작했다.
대결은 30분 뒤.
그렇게 남은 시간을 떠올리며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면서 한 사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음… 설마 안 오는 건가?”
직접 찾아가도 되지만, 민하연은 내심 성수호가 찾아와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동시에 한편으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하아… 맨날 그런 여자들 보면서 욕해놓고 나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네.”
남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여자들….
민하연은 그런 여자들이 이해가 가는 한편 답답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신 또한 그렇게 변한 것에 대해서 오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단 가서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민하연은 그렇게 변명거리를 만들며 대기실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민하연이 대기실 문을 열자, 문밖에 서 있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쿠, 깜작이야.”
“어?”
처음에는 외부인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고 나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콜로세움의 경비원이었다.
경비원은 민하연의 놀란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무언가 건네줬다.
“종이?”
“네. 그 성수호 선수가 전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경비원은 용무를 마치자마자 히죽거리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크흐흐… 역시 A급 소환사라 그런지, 포인트는 많다니까.”
“….”
쪽지 한번 전달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포인트를 줬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사였다.
민하연은 피식 웃으며 쪽지를 확인했다.
사실 쪽지라기보다는 편지에 가까운 분량의 문장들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몸조심하고….>
성수호의 걱정과 격려가 담긴 문장을 보며 민하연은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쭉 읽어보는 순간이었다.
“…응?”
민하연은 마지막 문장을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비빈 다음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민하연의 눈에 비치는 문장은 아까와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마지막 문장에는….
<나랑 싸우게 되면 최선을 다해. 만약에 하연이, 네가 이기면….>
민하연은 다음 경기가 펼쳐지기 전까지 성수호가 보낸 쪽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민하연은 저 멀리서 능구렁이처럼 걸어오는 성수호를 보며 토끼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하긴… 지금까지 안 만난 게 오히려 운이 좋은 거라고 해야 하나?’
민하연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토대로 당연히 성수호와 결승전에 만나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걸어오는 성수호가 그녀의 추측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두 사람 콜로세움의 환호성을 들으며 서로 대화가 가능한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민하연은 성수호를 앞에 두고 나지막이 말을 흘렸다.
“수호야. 아까 보낸 편지… 네가 보낸 거 맞지?”
“응. 내가 보낸 거야.”
“후우….”
민하연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장난을 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떨쳐내는 것과 동시에 민하연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성수호에게 말했다.
“내가 이기면 3층에 있는 동안 내 노예가 된다는 거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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