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드라실 (5)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결투장 중앙으로 이동하는 여인.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현대인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독특하게 무림인의 복장을 한 여인.
나이는 대략 서른 초반처럼 보였지만, 고고함이 담긴 분위기가 훨씬 젊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키는 레나와 비슷한 170을 넘긴 듯했고, 기다란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옆머리에 달린 꽃장식과 머리 위에 돌아다니는 파란색 보석.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통신으로 외쳤다.
‘아르모니아! 예쁘다고!! 기질!!!’
[…알겠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떨떠름한 듯한 목소리와 함께 여자의 기질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
남궁유하
[무술], [안구 손상 실명], [차분함], [그리움], [외로움]….
=====
처음에 눈을 감고 계속 이동하길래 폼을 잡는 건가 싶었지만, 기질창을 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상태 이상이 아니라. 진짜 맹인이었네.’
기질창에 나온 안구 손상 실명의 설명을 보면 스킬로 회복되는 기질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남궁 유하는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구사하며 결투장 중앙으로 향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가을이 흥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오늘 운이 좋네요. 3층 도전 경기를 볼 수 있다니.”
“3층 도전 경기요?”
다들 나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한가을의 말을 기다렸다.
한가을은 설명해줬다.
“지금까지 보스전을 치르고 층을 올라오셨죠? 3층에도 그런 시험이 존재해요. 그리고 그 시험이 바로….”
한가을의 말은 콜로세움을 가득 메우는 진행자의 소리에 잘려버렸다.
<도전자의 이름은 로헤르! 오늘 도전으로 4번째 도전입니다! 과연 오늘은 4층 티켓을 거머쥘 수 있을까요!?>
진행자의 말을 들은 한가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곳의 콜로세움 도전이에요.”
콜로세움 도전.
다른 경기와 다르게 4층 티켓만을 목적으로 한 결투였다.
도전자는 위그드라실이 지정한 3층 가디언과 싸워서 일정한 실력을 증명하면 4층 티켓을 받을 수 있는 구조였다.
한가을은 경기 시작을 앞두고 우리에게 조언해줬다.
“잘 봐두세요. 저 여자가… 3층 가디언 중의 한 명이니까.”
한가을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단 선공을 날린 건 도전자 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선공을 가하며 우위에 점할 줄 알았던 도전자는….
“크아악!”
몇 차례 합을 나누더니, 여러 상처를 안은 채 뒤로 뒷걸음질 쳐버렸다.
그리고 정작 남궁유하는….
“….”
처음 있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평온하게 서 있었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와… 앞이 보이지 않는데, 저렇게 싸울 수 있다고?’
도전자의 무기는 남궁유하의 몸에 생채기는커녕 옷깃조차 닿지 못한 채 멀찍이 물러났다.
그래도 도전자라 그런지 물러났음에도 침착하게 남궁유하의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투의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다.
“크아악!”
<이런이런!! 이번 도전자! 4번째 패배를 맛보는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진행자의 말과 함께 관객들의 유흥거리로 전락한 도전자는 몸이 회복된 뒤, 분을 못 이기며 경기장을 박차가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디언이라고 불리던 남궁유하는….
<이번에도 가디언의 승리입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천천히 퇴장하기 시작했다.
남궁유하의 퇴장하는 모습조차 감탄이 흘러나왔다.
‘신기하네. 아무리 결투장이 평지로 고르게 잘 다져져 있다고 해도 저렇게 여유롭게 걸을 수 있나?’
내 의문을 아르모니아가 해결해줬다.
[무술 쪽 기질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
-[발천보(發闡步) 8성]-
보법의 한 종류로, 이동할 때마다 주변 사물의 존재를 감지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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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만 따지면 평범한 사람에게는 크게 필요 없는 보법이었다.
보법이라고 하면 대개 자신이 쓰는 검술과 연계하면서 신법으로 구사하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보법은 쓸모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경공술 같은 건!?
[아쉽게도 맹인이라 보법은 배웠지만, 경공술은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까비….’
현재 나는 풍속성 마법을 이용해서 빠르게 이동하는 방식을 습득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내가 마법을 순식간에 발동시킬 수 있다고 해도, 결국 하나 더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는 사실은 좋을 게 없으니까.
유통과정을 최대한 생략해야 물건이 싸지는 것처럼….
[다만 보법 외에도 몇몇 가지 무술은 배워놓은 것 같습니다.]
‘좋아. 일단 콜로세움 구경 다 하고 나중에 차근차근 확인해보자.’
그렇게 남궁유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관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콜로세움 구경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특히 토너먼트전 마지막 경기가 압권이었다.
참가자는 검사였고, 그와 싸우게 된 건 권사였다.
신기한 점은 권사의 경우, 토너먼트전 내내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생뚱맞게 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등장과 동시에 검사의 얼굴을 완전 떡으로 만든 것도 놀랐고….
우리는 난전까지 모두 관람한 다음 호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권사의 정체는 한가을에 의해서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토너먼트전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도미 드레크예요.”
도미 드레크.
일단 권술 레벨이 29로 굉장히 높은 편에 속했다.
3층 소환사 수준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것을 고려하면 진짜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군림이라는 의미도 알려줬다.
“토너먼트전은 그 검사의 우승으로 끝난 거예요. 마지막 도미 드레크와 싸우는 건 우승자로서의 던전 지분을 빼앗는 이벤트 경기예요.”
이곳의 던전은 주인이 존재한다.
우리가 처음 방문하자마자 던전 앞에서 입장료를 받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는… 그 던전의 지분을 빼앗는 이벤트 경기였다.
참고로 우승자가 지배자와 싸워서 이기면 지분을 빼앗는 것과 동시에 토너먼트전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거기서 이기면 모든 던전을 갖는 건가요?”
“아뇨. 서쪽 던전만 가질 수 있어요.”
그것만 해도 어디냐….
우리가 방문했던 곳은 동쪽이었지만, 서쪽도 크게 다를 건 없을 것이다.
“그럼 동쪽 던전 지분은요?”
“그건 풀리그에서 우승하면 풀리그 지배자들과 싸워서 뺏을 수 있어요.”
“…설마?”
오늘 아침에 만났던 깡패 같던 무리….
설마 그 녀석들이 지금 풀리그의 지배자인가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권술사랑은 실력 차이가 있어 보이던데….
내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묻자, 한가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달라요. 그들은 지분은 없고, 다만 지분을 가진 녀석들의 수하들이에요. 뭐… 결과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요.”
“하하하….”
아까 험악한 얼굴로 조심하라고 했던 이유가 이거구나.
아까 개인전에서 상대방의 얼굴을 피떡으로 만든 권사도 실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단체전에서 우승하는 녀석들도 보통 실력이 아닐 것이다.
그런 녀석의 수하로 지내니, 좀 거들먹거려도 문제가 없겠다고 판단한 거겠지.
단 하루.
하루 만에 이 도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던전 지분, 카지노, 콜로세움, 도전까지….
그렇게 우리는 콜로세움까지 전부 구경한 뒤, 호텔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향하던 중에 두 무리로 나뉘었다.
“저랑 하연이 언니는 한동안 동생 가게에서 지낼게요.”
민하연과 한봄이 한가을의 가게에서 지내기로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떨어지는 게 좀 미안했지만, 막상 지금은 미안할 일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희는 수호 씨 도움 좀 받을게요.”
삼인방은 내 포인트를 이용해서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나는 삼인방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죠.”
“네~”
다들 싱글벙글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내 옆에 있던 민하연과 한봄이 내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수호야. 호텔 갔다가 꼭 와야 해.”
“내일은 몰라도 오늘은 저도 양보 못해요.”
두 사람은 아까 신좌의 게임을 한 덕분에 아직 달아오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걸 풀어주지 않고, 삼인방과 잠자리를 가진다?
나중에 몇 배로 앙갚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삼인방과 같이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삼인방이 머물게 될 방을 잡기 시작했다.
삼인방이 지내게 될 장소는 방이 세 개로 나뉘어 있고, 각자 침대가 마련되어 있는 삼인실이었다.
가격은 하루 30만 포인트.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계산할 시, 하루 무료로 해서 180만 포인트를 계산했다.
내가 방을 잡아주자, 삼인방이 굉장히 부담스러워했지만, 나는 세 사람을 설득했다.
“모이는 건 오전마다 여기서 모이기로 할게요. 그럼 쉬세요.”
“정말 고마워요!”
내가 이렇게 비용을 내면서까지 세 사람을 좋은 곳에 묵게 한 건 이유가 있었다.
‘이러니까 죄책감이 좀 덜어지네….’
내가 한여름에게 제약을 걸어 놓을 때, 패스한 인물들이 바로 삼인방의 안전이었다.
삼인방의 경우에는 아직 회귀 사실 자체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녀들에게 문제가 생기더라도 회귀를 하면 그만이라고 합리화하며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더 남아 있는 죄책감을 강한나가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은 합리적인 결정은 한 거예요.]
강한나의 위로를 받으며 좀 털어낼 수 있었다.
[저 여자들은 당신이 없었으면 밑에 층에서 남자들에게 휘둘리며 살았을 거예요. 오히려 평생 은인으로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에요.]
‘끙… 그래도….’
[…최소한 저는 당신에게 끌려온 게 인생 최고의 행복이었어요. 그것만 알아주세요.]
강한나… 참 마음에 드는 여자다.
자존심이 쎈 여자였지만, 이럴 때는 또 자신의 자존심을 이용해서 나를 위로해주는 여자.
정말 데리고 오길 잘했다.
‘…고마워요.’
나는 그렇게 강한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뒤, 한여름의 방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한여름이 허튼짓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 잘 있었네?”
“….”
한여름은 객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호텔 객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을 줄 알았는데.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얼마 벌었냐?”
“…2천만 포인트.”
한여름은 일반 카지노에서 1시간 만에 3천만 포인트를 벌었던 전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VIP 카지노에서 2시간 동안 고작 2천만 포인트?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사실 사정이 있었다.
“잘했어.”
사실 내가 정해 놓은 하루 리미트가 2천만 포인트였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너무 벌면 부작용도 생길 수 있으니까….’
가령 칼부림이 나서 죽을 수도 있고, 아니면 VIP 고객들 사이의 블랙리스트로 찍힐 수도 있었다.
‘쯧… 그냥 일반 카지노를 계속 이용할 수 있었으면 개 쩔었을 텐데.’
이미 불가능한 부분까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한여름에게 손을 뻗으며 살랑살랑 도발했다.
“자, 수금해주세요~”
“…씨발.”
한여름은 욕설을 내뱉은 것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듯 내게 2천만 포인트를 건네줬다.
나는 순식간에 들어온 포인트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돈이 좋아!”
“…미친놈.”
한여름이 내 흥분에 혀를 찬 뒤,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간신히 내뱉었다.
“야… 네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적당히 봐주면 안 되냐?”
노예와 주인 사이에 오고 갈 대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뭘 봐달라는 걸까?
“방 안에 있을 때만이라도… 제약을 풀어줬으면 해.”
한여름은 은근슬쩍 내 눈치를 보며 제약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 새끼 머리 좀 쓰네?
2천만이라는 거금을 단시간에 벌어줬으니, 방 안에서는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의미처럼 보이게 꾸며서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여름이 누구인가?
회귀자다.
이미 그가 꾸미고 있는 흉계가 뭔지 알고 있었다.
그 제약을 푸는 순간….
“절대 안 돼~”
분명 자살해서 모든 것을 초기화 시킬 것이다.
한여름은 내 거절에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리기 시작했다.
“아니, 씨발! 나도 방 안에서는 편하게 지내고 싶다고!!”
“안돼. 안돼~ 절~~~~대 안돼~”
“…씨발!”
한여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욕설과 함께 침대 위로 몸을 던지며 누웠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뭐… 화가 난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흠… 적당히 구슬려볼까?
나와 한여름은 우정이나 동료애, 심지어 인류애조차 손톱만큼도 남지 않은 관계였다.
하지만 한여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존심이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래야지. 회귀 후에도 또 깝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여름에게 말했다.
“좋아! 한동안 말 잘 들으면 나중에 고려해볼게.”
“…정말?”
아마 내가 이렇게 바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여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저… 정말 고려한다고?”
“그래.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매일 하루에 2천만 포인트씩 모아서 수금이나 잘해.”
“…알았어.”
한여름은 그렇게 대답하며 몸을 돌려서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한여름의 표정은 대략 짐작… 아니, 볼 수 있었다.
‘멍청아. 창문에 비친다.’
한여름은 실실 웃고 있었다.
내가 제약만 풀어준다면 바로 초기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것이었다.
뭐…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혹사할 필요는 없지.
그야, 나중에 더 큰 고통을 선사해주긴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여름에게 말했다.
“내일도 점심 먹고 나서 알아서 2천만 포인트 벌어놔라. 그럼~”
“….”
나는 창문으로 비치는 한여름의 웃음을 보며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왔다.
“자, 그럼 가볼까.”
그렇게 방을 나와서 한가을의 가게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야.
그간 조용하던 게꼬수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 왜요?”
게꼬수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흥분이라는 감정이 담긴 채팅을 쳤다.
└게이 같은 꼬추의 수호자: 빨리 딸 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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