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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여자를 빼앗는 방법-575화 (576/898)

〈 575화 〉 575화 영웅 사관 학교 (5)

* * *

“…오랜만이야. 누나.”

도저히 외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칭을 내뱉는 노인.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리고 그런 노인을 향해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어린 모습의 예리엘.

그간 미소를 자주 보여주던 예리엘이었지만, 한층 더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다급하게 앞으로 나가는 여자가 있었다.

“회장님! 굳이 이곳까지 이동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가 찾아왔으니 내가 마중을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후우… 제가 주치의를 타박할 일이 또 생겼군요.”

40대의 비서가 다급하게 노인에게 다가가 다그치기 시작했다.

회장과 비서.

직급만 따지자면 절대 이뤄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언행이었지만, 겉보기에는 그저 부녀지간의 대화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허허…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움직여 보겠어.”

“후우….”

비서의 한숨에 오히려 흐뭇하게 웃던 노인은 어느새 예리엘과 비서가 아닌 나와 성수아에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흐음… 혹시 저 친구들이…?”

“네. 저분들입니다.”

비서의 말과 함께 노인이 타던 전동 휠체어가 움직이며 우리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손가락질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경이 연결된 것처럼 휠체어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와 성수아 앞까지 도착한 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내가 이곳의 회장일세.”

“안녕하세요. 성수아입니다.”

“안녕하세요. 성수호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불러서 미안하네. 내가… 오후에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라 말이지….”

“괜찮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뒤,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에브리카 본사의 최상층.

이 층 전부가 회장의 거처였다.

침실부터 사무실, 그리고 의료진이 24시간 상시 대기하는 의료실까지….

그저 출퇴근하는 사무실 개념이 아닌 회장이 여생을 지낼 거대한 공간인 셈이었다.

나와 성수아, 그리고 예리엘은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서 회장과 같이 식사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평가하자면 극찬을 아끼고 싶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음식을 앞에 두고 쉽사리 입 안에 넣을 수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초대받아놓고 눈치를 왜 봐요.]

‘당사자는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우리가 이런 걸 먹을 수는 없잖아.’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지만, 정작 회장은 그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죽 한 숟갈도 간신히 먹을 것 같은 부실한 신체.

그런데도 자신의 앞에까지 음식을 차려 놓은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딱 봐도 당신들을 배려하려고 차려 놓은 거 같네요. 그냥 드세요.]

‘끙….’

나는 난감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성수아.

“….”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분명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자연스럽게 행동해야겠다는 건 머리가 알지만, 몸이 쉽게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건….

“맛있네.”

별생각 없이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맛보는 예리엘이었다.

언뜻 보면 철없는… 아니, 순진한 초등학생 손녀가 할아버지 앞에서 음식을 맛보는 모습이었다.

일단 우리랑 다르게 보기에는 오히려 좋은 모습이었다.

‘우리랑 다르게 말이지….’

예리엘은 음식을 두 차례 삼킨 뒤, 나와 성수아를 보며 말했다.

“너희도 들어. 그렇게 멀뚱하게 보고 있으면 차려준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니까.”

“아… 네!”

성수아는 예리엘의 말에 다급하게 식기를 들었고, 나도 적당히 눈치를 보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하는 내내 우리는 회장과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대부분 내용은….

“두 사람의 노고는 잘 들었네. 정말 고맙군.”

나와 성수아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성수아는 대표로 나서서 회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크흐… 그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게 없지.”

성수아는 상급 영웅이라 그런지 고위직 쪽에 있는 인물과 어떻게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식사하며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는 순간이었다.

“크흣… 푸흣!”

신나게 대화를 나누던 회장이 고개를 숙이며 얕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기침하는 순간 비서와 의료진이 황급히 달라붙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사레가 들렸나 싶겠지만, 회장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런 사례조차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예리엘도 그런 회장에게 황급히 다가가서 안쓰럽게 묻기 시작했다.

“괜찮아? 몸이 안 좋으면 지금이라도….”

“푸훗… 아, 아냐…. 허어… 허어… 괜찮아. 이제, 괜찮아.”

“….”

예리엘은 어린 외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걱정을 전부 짊어진 표정으로 회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기침을 하던 회장은 도통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일단 의료실로….”

결국 식사는 그 자리에서 마무리되었고, 회장은 황급히 의료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회장이 사라지고, 비서가 남아서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최근 몸 상태가 좋다고 판단되어서 초대한 건데….”

그녀의 말에 예리엘이 눈을 감고 힘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후우… 괜히 들렀나.”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바라신 일이었습니다. 특히… 예리엘 님과 꼭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

씁쓸한 예리엘의 표정을 보던 비서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우리를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마저 전하지 못한 말씀은 제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어? 식사가 끝났는데, 굳이….”

“회장님께서 초대하신 건 그저 식사를 위함이 아닙니다.”

회장은 고작 밥 한 끼 먹자고 나와 성수아를 이곳까지 부른 건 아니리라 생각은 했었다.

당연히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보상 때문일 것이다.

“사측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지원과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일단 보상을 주겠다는 건 알겠지만, 이것만 들어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백지수표라는 게 막상 받아도 뭘 써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게 인간이니까.

“지원과 보상이라는 게….”

“지금 당장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훗날 필요하시면… 여기, 제 연락처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나와 성수아는 비서에게 명함과 비슷한 카드를 받았다.

카드에는 연락처도 적혀 있었다.

“참고로 그 카드를 이용하시면 저와 연락하는 것뿐만 아니라, 에브리카의 전 지점의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 그거 내가 가지고 있는 거랑 비슷한 거야?”

“예리엘 님께서 가지신 것과 같은 수준의 권한 카드입니다.”

“와… 외부인 중에서 나 말고 그거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생길 줄이야.”

예리엘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회장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볼까? 오래 머물러봤자 민폐일 테니….”

“아, 예리엘 님.”

“응?”

예리엘은 비서의 부름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비서는 예리엘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중요한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 회복하실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예리엘은 비서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우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오늘 바쁘지 않지?”

..

..

강한나의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안 돼.]

‘….’

그녀는 지금까지 본인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몇차례 겪었지만, 저만큼 절망하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들려왔다.

[말도 안 돼. 저게 그 꼬마라고요?]

‘다섯 번째 말하지만, 본인의 원래 모습이래요.’

[아니, 무슨….]

강한나가 저토록 절망하는 이유는 하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곤란한데요?”

“아, 죄송합니다. 저번에도 봤지만, 쉽사리 적응되지 않아서….”

예리엘의 아바타 때문이었다.

과거 예리엘의 성인 모습을 본뜬 아바타가 강한나에게 큰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현실에서의 예리엘은 양갓집의 곱게 자란 어린 딸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성인 모습의 예리엘은 양갓집 규수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충격의 여파가 나에게도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혹시 이상한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현실에서는 어린애잖아요. 정신 차리세요.]

‘….’

정신 차려야 할 게 누군데….

나는 강한나의 헛소리를 흘려들은 뒤, 성인 모습의 예리엘을 보면서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마음껏 공격해요. 여기서 내가 다친다고 현실에서 다치는 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예리엘은 우아한 포즈로 멀리서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보는 성수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잖아요?”

“….”

예리엘의 행동을 보면서 어느 정도 직감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리엘이 지금 던진 대사로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과 성수아의 관계를 눈치챈 거 같네요.]

‘….’

[왜 그렇게 긴장해요? 입은 무거운 여자 같은데.]

강한나의 말대로 예리엘은 내가 보더라도 입 하나는 무거운 여자 같았다.

하지만….

‘비밀은 새어 나가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는 법이죠.’

[하긴….]

한 명이라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니까.

그래도 다행이라면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그저 호감이 있는 사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도 컸다.

나는 일단 그 사실을 접어둔 채 예리엘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훗, 그런 기세는 좋네요.”

나는 예리엘의 웃음 신호와 함께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

..

나는 힘없이 눈을 뜨며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후우… 죽겠다.’

아까까지 보이던 대련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캡슐 내부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캡슐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안 움직여….’

분명 직접 마나를 사용한 것이 아님에도 몸에 힘이 빠져서 힘이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캡슐 내부에서 멍하니 있자, 누군가가 내 캡슐 문을 열고 내게 손을 뻗어왔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성수아였다.

나는 성수아의 손을 잡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우며 대답했다.

“하하… 네. 괜찮아요.”

나는 성수아의 도움을 받아서 캡슐에서 나와서 조심스럽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끄으….”

그런데 간단한 스트레칭조차 고역이었다.

분명 육체는 문제가 없는데, 기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성수아는 기진맥진한 상태의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무 무리하셨어요.”

“하하… 저도 모르게 승부욕이 생겨서….”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예리엘과 처음 대련할 때만 하더라도 그저 실력 테스트를 받자는 기분으로 임했던 나였다.

VR 속이라 다쳐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예리엘 정도라면 내 공격도 충분히 막아낼 것이라는 안도감도 분명 한몫했다.

하지만 내 공격이 전혀 먹혀들지 않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약이 올랐고, 점차 강도를 높이다 보니 어느새 진짜 승부욕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트레칭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예리엘 님은 회장님에게 가신 거죠?”

“네. 비서분께서 오셔서 부르자마자 바로 가셨어요.”

“끙… 결국 마지막까지 유효타 한번을 먹이지 못했네요.”

“…정말 대단하네요.”

“네?”

설마 성수아가 비아냥!?

나는 설마 나를 놀리나 싶어서 성수아를 향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성수아는 비아냥이 아닌,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실력이 늘어서 놀랐어요.”

“아….”

“이 짧은 시간에 갑자기 이렇게 변할 줄….”

하긴 성수아가 내 실력을 마지막으로 봤던 건 저번 에브리카 습격 사건 때였다.

중간에 에넬로 능력을 대폭 올리는 바람에 차이가 너무 과하게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예리엘 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는걸요?”

“…탑에 있는 마법사 95%는 무서워서 성수호 교관님처럼 공격도 못 했을걸요?”

“하하….”

일단 성수아의 말을 들어보니 에넬로 능력을 올린 게 체감이 되기 시작했다.

일단 이 정도면 순수한 실력 면에서는 생도 수준은 간단하게 뛰어넘은 듯 보였다.

거기다 마법진과 조준력을 더하면 중급 이상 녀석들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역시 안 되겠다. 확인해보자.’

[…? 뭘 확인하시게요?]

나는 푸른 캡슐실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입을 열어서 성수아에게 말했다.

“후우… 성수아 교관님. 저 잠깐만 쉬어도 될까요?”

“아! 의료진 불러올까요?”

“아니에요. 잠깐만 쉬면 될 거 같아요. 잠깐 벤치에 누워서 쉴게요.”

“그, 그러세요!”

나는 성수아의 말을 듣자마자, 힘겨운 듯 벤치에 눕자마자 통신으로 말했다.

‘예리엘 님이랑 회장이 무슨 이야기하는지 들어봐야겠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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