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5화 〉 565화 동서냉전
* * *
“아까 왜 일부러 진 거죠?”
강한나의 추궁에 레나는 스쳐 지나가듯 침묵한 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진 적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믿었을 거예요. 하지만….”
강한나는 레나의 정면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은… 마지막에 저를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패배를 선택했어요.”
나는 당최 강한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했던 보드게임을 처음에는 흥미롭게 봤어도 막판에는 정신력이 흐트러지면서 집중해서 보지 못했으니까.
강한나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르모니아에게 물었다.
‘정말 그랬어?’
[맞는 말이긴 하지만, 강한나 씨의 발언에도 어폐가 있습니다.]
‘무슨 어폐?’
내 질문에 대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모니아가 아닌 레나였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그 마지막 수… 일부러 패착의 수를 두신 건 그쪽이시지 않습니까?”
“….”
레나의 말과 그전에 강한나가 했던 말을 종합 해석하자면….
[강한나 씨는 고의로 패배의 수를 뒀고, 레나 씨는 승리할 수 있는 수를 두지 않고 일부러 패배를 선언했습니다.]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잡기 힘든 상황….
언뜻 보면 강한나는 지친 나머지 실수로 패배의 수를 던진 듯 보였고, 레나는 자존심 때문에 그 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두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들이 아니었다.
강한나는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포기할 여자가 아니었고, 레나는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패배를 선언할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흉흉한 기운이 풍기자 그동안 조용히 바라보던 내가 나섰다.
“그럼 일단 베아트리체만 빼고 진행하죠.”
“…그게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주인님.”
두 사람이 내 말에 수긍하며 짙게 깔렸던 어둑한 분위기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결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쿨….”
“흐에….”
비올라와 시호가 곯아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강한나와 레나, 둘의 대결로 이어져 버렸다.
나는 그 이후 베아트리체에게 비올라를 생활실로 옮겨달라고 부탁한 뒤, [영혼의 시간]을 사용해서 시호를 주방 구석으로 옮겨줬다.
생각 같아서는 시호를 생활실로 직접 옮겨주고 싶었지만….
“….”
“….”
내가 없는 사이에 레나와 강한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처치 곤란한 상황으로 번질 것 같아서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호를 멀리 둔 뒤, 나는 다시 테이블에 앉아서 두 사람을 구경했다.
“….”
침묵.
수면을 참는 대결인 만큼 오히려 쓸데없는 대화가 상대방의 잠을 깨우는 요소가 되리라 생각해서 그런지 강한나와 레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
..
6시간이 흘렀다.
일반 사람이라면 슬슬 피곤해질 만한 시간이었다.
다만 이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평소에 아르모니아를 대신해서 밤새 나를 감시해주는 레나.
고민태의 연구 부지에서 밤샘 철야도 마다하지 않던 강한나.
밤새 야겜 하던 나.
그리고 종일 나를 몰래 관음하는 아르모니아.
[이상한 생각 하셨다면 사과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거참, 속마음으로 한 말도 사과해야 하는 세상이 오다니. 말세다, 말세….
그렇게 심층 깊은 한 곳에 아르모니아 몰래 투덜거릴 때쯤 6시간 동안의 침묵이 한 사람의 입으로 깨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못 들었네요.”
강한나는 팔짱을 낀 채 눈을 날카롭게 뜨며 입을 열었다.
“왜 일부러 진 거죠?”
“….”
레나는 강한나를 무심하게 바라본 뒤, 아까 일을 회상하듯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수가 뛰어났을 뿐입니다.”
“웃기지 마세요. 당신도 아까 말했잖아요. 제 수가 패착의 수라고….”
“아닙니다.”
레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강한나를 살며시 바라봤다.
서글픔이 한 꼬집 담겨있는 듯한 그런 눈동자로….
“당신이 저를 꿰뚫어 보고 그 수를 놓은 순간 당신이 놓은 수는 묘수가 된 것입니다.”
“….”
“저는….”
레나는 아까와 다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괴로운 상상을 하듯 암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의도대로 그 이후의 수를 둘 수 없었을 뿐입니다.”
“….”
“….”
레나의 괴로움이 담긴 말과 함께 다시 침묵이 시작되었다.
레나에 대해서 잘 아는 나도 여기서는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
이제야 아르모니아가 가만히 있으라는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강한나는 침울한 레나의 모습에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살며시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비극의 여주인공은 세상 어디에나 있죠.”
따스한 위로가 아닌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무리까지 냉기로 꽉 채워 담지는 않았다.
“제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될 자격은 없어 보이지만요.”
강한나도 나름 처절한 삶을 살아왔던 여자였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자기보다 훨씬 고난과 역경을 거쳐온 사람도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고난과 역경에 휩쓸려서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나는 살짝 누그러진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며 아르모니아에게 통신으로 말했다.
‘아르모니아, 레나 좀 따로 불러 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아르모니아는 내 말에 군말 없이 대답했고.
얼마 후, 레나의 당황하는 모습으로 통신이 잘 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레나는 나와 강한나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아르모니아 님께서 부르셔서….”
“일과 관련된 문제면 가야지. 한나 씨, 괜찮죠?”
“…갔다 오세요. 구석에 숨어서 몰래 자거나 할 분은 아니라고 믿겠어요.”
강한나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레나를 보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줬다.
레나는 그런 나와 강한나를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주방을 천천히 나갔다.
그렇게 레나가 나가고 나서 강한나가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르모니아 씨는… 설마 계속 지켜보고 계셨던 건가요?”
“네.”
“훗… 왠지 놀아난 기분이네요. 끄읏!”
강한나는 긴장이 풀린 듯 의자 등받이에 쭉 기대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껏 기지개를 켠 뒤,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의외로 시작한 이야기는 레나가 아닌 아르모니아에 대한 것이었다.
“어제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어느 정도 선까지 관찰이 가능한 건가요?”
“기본적으로 시야랑 청야(??)는 전부 전달된다고 보시면 돼요.”
“…설마 제 생각도 읽는 건가요?”
“아뇨. 아르모니아에게 전달하고 싶어 하는 생각만 전달돼요. 다만, 주의는 하셔야 해요. 별 생각 없이 속마음 했다가 듣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요. 당연하지만, 상호 대화도 가능해요.”
“…대단하네요.”
강한나는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닌 오히려 더 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능력이 있었으면… 제가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강한나는 나름 오랜 기간 고민태의 연구 부지에 잠입한 경력이 있었다.
하루하루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면 살던 그녀로서는 지금 기술은 또 한 번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강한나를 보며 물었다.
“제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불편하지 않으세요?”
“불편이라… 전보다는 훨씬 나은데요? 지금 저를 관찰하는 건 아르모니아 씨뿐이잖아요? 연구소에 비하면… 훨씬 여자로서 대우를 받는 거예요.”
“하하하….”
하긴 강한나가 처음부터 관리자 직책을 가진 건 아닐 것이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일반 연구원이었을 것이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지금은 감시하는 자가 같은 여자인 아르모니아뿐이었다.
같은 감시더라도 이쪽이 훨씬 더 여자로서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였다.
강한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아르모니아 씨는… 당신이 임무하는 내내 관찰하는 건가요?”
“네. 밤에는 레나와 교대하지만, 예전에는 일주일… 아니, 한 달 넘게 잠도 안 자고 저를 보조해줬죠.”
“…정말 황당무계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네요.”
강한나는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는 잠시 침묵하며 레나가 나간 주방 문을 보더니, 내게 정식으로 묻기 시작했다.
“…이제 저분에 관해서 알려주세요.”
“레나요?”
“네.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자리 비운 거… 당신이 의도한 거 이미 알고 있어요.”
역시 눈치 만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강한나에게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나는… 일루니아 대륙에 있는 페르온 공국의 공녀였어요.”
..
..
나는 레나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풀어낸 뒤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저희 함선에 오게 된 거죠.”
“…다사다난의 수준이 아니에요.”
강한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퉁명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레나의 인생만큼은 함선뿐만 아니라, 전 우주에서도 쉽사리 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아왔다.
올바른 신념과 정직한 성품, 하늘이 내린 노력과 땅을 뒤흔들 정도의 행동력.
이 모든 것을 갖춘 그녀에게 내려진 가혹한 죄.
아니,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려진 죄였다.
강한나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선택… 그런 선택을… 내가 강요한 거네요.”
그렇게 강한나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줄 때쯤….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레나가 주방으로 들어와서 아까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나와 강한나는 레나가 들어왔어도 딱히 내색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흘렀을까?
침묵하던 강한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시호를 방으로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지금이요?”
“네.”
강한나는 별 탈 없을 것이라는 신호를 눈빛으로 보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혼의 시간]을 이용해서 시호를 데리고 생활실로 향했다.
시호야 어차피 허공에 떠서 자는 스타일이라 침실이 필요하겠냐마는….
‘아르모니아.’
[네.]
‘두 사람 통신 꺼줘. 하고 싶은 말 자유롭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을 믿고 육체를 주방에 놓고 시호를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호를 생활실에 놓고 영혼 상태로 복도를 통해서 주방으로 향하자….
“응? 벌써 이야기 끝났나요?”
강한나가 생활실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내 물음에 강한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저히 졸려서 안 되겠어요. 잘래요.”
“하하하….”
“저는 이만 자러 갈게요. 당신도 제때 주무세요.”
강한나는 그렇게 일과 마무리 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생활실로 돌아갔다.
그 이후 나는 몸으로 돌아와서 레나에게 물었다.
“레나. 한나 씨가 뭐라고 했어? 혹시 말하기 꺼리면 굳이 말할 필요는….”
“나약하게 굴지 말라고 했습니다.”
“…뭐?”
솔직히 의아했다.
위로가 담긴 말을 해줄 줄 알았는데, 되려 쇠몽둥이를 휘두른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레나의 말을 듣고, 강한나가 휘두른 것이 진짜 쇠몽둥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과거에 사로잡혀서 주인님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 말라고 조언해줬습니다. 또 다른 후회를 남기지 말라면서….”
“….”
“저는….”
레나는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주인님께 결과를 중시하시라는 조언을 내뱉고도 저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얼마 전에 레나는 아르모니아와 같은 생각을 품으며 내게 조언을 건넸다.
과정과 현재보다는 결과와 미래를 중시하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나를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레나… 그렇게 자신을 질타할 필요는 없어.”
“아닙니다.”
레나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아까와 다르게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는 나약한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제 미래는 주인님뿐입니다.”
“레나….”
나는 다부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은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까 화원 만들어 놓은 거 봤어?”
“아직 가보지 않았습니다.”
“엥?”
의외였다.
레나라면 만들어주면 누구보다 먼저 가서 구경할 줄 알았는데….
살짝 섭섭한 마음이 맴돌던 찰나에 레나가 나를 살며시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혼자 보러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첫 방문만큼은 주인님과 같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
나는 레나의 모습에 웃으며 그녀를 껴안은 채 중얼거렸다.
“레나. 지금 화원에 가보자. 혹시….”
“…? 흐읏…!”
나는 레나의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피곤하면 내일 가도 괜찮고.”
레나는 내 손길을 맛보며 신음과 함께 얼굴을 붉히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가고 싶습니다. 지금 가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