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4화 〉 564화 동서냉전
* * *
레나는 주방에 방문하자마자 내게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넸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나는 그런 레나의 모습에 당황하며 물었다.
“응? 벌써 일어났어?”
“배려 감사합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습니다.”
레나의 대답과 함께 비올라와 베아트리체가 그녀에게 달려들며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요, 요리 좀 가르쳐주라냥!”
“레나 씨! 빵! 빵 어떻게 만들어요?”
흠칫.
비올라가 빵, 빵 거릴 때마다 또 몸이 움찔움찔 거렸다.
내 움찔거림을 느낀 아르모니아가 내게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혹시 감기이십니까?]
‘…아니.’
감기보다 더 무서운 거….
나는 애써 반죽 트라우마를 잊으려고 애쓰며 주방 쪽에 있는 강한나와 시호 쪽을 바라봤다.
“오… 분홍색 머리다. 신기해.”
시호는 그저 새로운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라봤다면….
“….”
아까까지 느슨하던 강한나의 눈에서 광채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눈빛이 달라졌네.’
언뜻 보면 화가 난듯한 모습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계심.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아닌,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아군을 보는 듯한 눈빛.
막상 저 모습을 보니 궁금해졌다.
‘아르모니아.’
[네.]
‘함선 소개하면서 멤버 소개도 해줬지?’
[직접 대면시키지는 않았지만,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그때 레나에 대해서 뭐라고 소개해줬어?’
[간단하게 소개했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 강한나가 경계하는 분위기를 이끌고 레나에게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저는 강한나예요. 잘 부탁해요.”
“저는 레나 드… 아니, 레나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고고한 분위기가 풍기는 두 사람의 인사와 함께 통신으로 아르모니아의 말이 들려왔다.
[저의 함선에서 제일 유능한 인재라고 소개했습니다.]
..
..
아까까지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던 두 팀은 레나의 등장으로 다시 냉전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
사실 레나의 등장보다는 강한나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었다.
아까까지 비올라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시호 사이를 잘 봉합하던 강한나가 바늘을 집어 던지고, 칼을 가는 분위기로 변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 분위기에서 이득이 있다면….
‘덕분에 밥은 빨리 먹을 수 있겠네….’
오늘 안에 먹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식사를 바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강한나는 레나의 등장 이후, 시호와만 소통하며 미친 듯이 요리에 몰두했다.
그리고 레나는 비올라와 베아트리체의 팀에 정식으로 합류하면서 그녀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요리를 시작했다.
‘레나와 강한나가 확실히 성격이 완전히 딴판이네.’
두 팀은 요리해야 한다는 목표는 같았지만,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한나 쪽은 시호의 보조를 받으며 혼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진행했다.
그에 비해서 레나 쪽은 초보자들을 이끌며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분위기였다.
[어느 쪽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 레나와 강한나는 각자 장단점이 있을 뿐이지, 절대 둘 중의 하나가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떨 때는 레나처럼 리더쉽을 발휘하며 팀원을 이끄는 쪽이 좋고, 어떨 때는 강한나처럼 팀원을 통제하며 자신이 모든 것을 진행하는 쪽이 훨씬 나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와… 이게 무슨….”
커다란 테이블 위에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강한나와 시호가 서 있는 쪽에는 한식.
레나와 비올라, 베아트리체가 서 있는 쪽에는 양식이 펼쳐져 있었다.
어느 쪽도 선뜻 손을 내밀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음식이 진열되어 있었다.
심지어 몇몇 음식은 화려하게 플레이팅까지 해 놓은 상황….
“이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데?”
“너무 부담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주인님. 부디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맞아요. 애초에 당신 하나만 보고 만들어준 게 아니니까.”
아까는 나한테 만들어주고 싶은 욕구 때문에 요리 대결을 넣은 거라며….
나는 츤츤거리는 강한나와 느긋하게 바라보는 레나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는 결국 결심했다.
“후, 미안.”
나는 수저를 들고 한식 쪽에 있던 육개장 국을 먼저 퍼서 입 안으로 넣었다.
“크흐응….”
강한나는 자기 음식에 먼저 손을 댄 내 모습에 콧김을 뿜으며 흥흥거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긴 좋았던 모양이었다.
국을 먼저 먹은 나는 수저를 놓고 입을 열었다.
“레나, 미안해. 함선 안에서 국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이쪽으로 먼저 손이 가버렸네.”
“괜찮습니다.”
레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음에는 그 음식을 제가 만들어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주인님.”
“고마워. 자 그럼….”
나는 나를 보고 서 있는 여자들을 보면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우니까. 이제 같이 먹자.”
..
..
따로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상 요리 대결은 강한나와 시호 쪽의 승리가 되었다.
내가 먼저 식기를 한식 쪽으로 향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레나에게는 미안했지만….
‘강한나 분위기가 많이 느슨해졌네.’
그 덕분에 멤버들 사이에 감돌던 냉기가 한층 가라앉고 다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들 상대방이 만든 요리를 맛보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 싸움의 시초였던 베아트리체와 시호는 비올라의 중재 덕분에 조금씩 대화를 늘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강한나와 레나의 분위기까지 풀린 건 아니었다.
강한나는 철저하게 레나와의 대화를 피하면서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런 레나는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억지로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레나가 침묵형 스타일이긴 하지.’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다음 종목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까는 강한나 혼자 주도했지만, 이제는 레나까지 합세한 터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몸 쓰는 걸 초반에 진행해서 다행이네.’
기동성과 전투.
레나가 있더라도 딱히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기동성은 그대로 시호가 이겼을 것이고, 전투는 기권으로 레나 쪽이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랐겠지.’
아마 기권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충돌이 났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애초에 전투 자체를 대결에 포함하지 않던가….
그렇게 음식으로 풀린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대결을 결정하던 멤버들은….
“그럼 게임 어떨까요?”
“게임… 이요?”
“네! 수호 씨가 사준 게임 있어요!”
내가 비올라를 이곳에 데리고 올 때, 나 자신에게 다짐한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를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주겠다는 다짐.
최근 계속 만화만 보는 게 걸렸던 나는 그녀에게 지상에서 눈여겨봤던 몇 가지를 구매해줬다.
그런데 만들어준 건 사실 게임기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
사실 보드게임 같은 것이 아닌 진짜 게임을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에 해주기로 했다.
‘처음부터 눈이 높아지면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 거 같으니까….’
강한나는 비올라의 제안에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게임도… 머리를 쓰는 거니까 나쁘지 않겠네요.”
강한나의 대답과 함께 다들 비올라의 방으로 향했다.
..
..
처음 보드게임을 대결 항목에 넣었을 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철회하기로 했다.
“….”
“….”
두 사람이 하는 보드게임은 그저 간단한 전쟁을 표현한 보드게임이었다.
8시간.
30분 정도면 끝날 보드게임을 강한나와 레나가 장장 8시간 동안 플레이를 이어나간 것이다.
밀리면 상대의 빈틈을 노려서 원상 복귀시키고, 밀고 들어가면 상대방의 한 수에 말려서 불리해졌다.
사실 처음에 전쟁을 표현한 보드게임이라길래 레나가 압승이 될 줄 알았지만….
‘강한나도 보통이 아니네.’
[보드게임으로 두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였다.
레나는 안전 지향이었다.
보급과 병사를 중시하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에 비해서 강한나는 효율을 중시했다.
보급과 병사를 최대한 활용해서 상대방의 피해를 극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안전과 효율.
그렇게 두 사람이 8시간 동안 보드게임을 하면서 피해를 본 건 비단 두 사람의 보드게임 안에 있는 병사들이 아니었다.
바로….
“흐아….”
“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냥….”
“제가 했던 게임이랑 너무 달라요….”
정작 게임을 포기한 세 사람이었다.
설마 게임이 8시간이나 흐를 줄은 본인들도 전혀 몰랐겠지….
하지만 그 8시간의 흐름도 결국 막을 내렸다.
레나가 30초간 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졌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강한나의 승리로 보드게임이 마무리되었다.
의외였다.
솔직히 나는 이번만큼은 레나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강한나가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해도 전략적 재능에 특화된 레나만큼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강한나는 분명 승리를 거머쥐었음에도 전혀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저 레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
하지만 강한나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다음 대결로 넘어갔다.
강한나는 다른 멤버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잠이에요.”
“…잠이요?”
다들 졸린 눈을 한 채 강한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긴 했다.
오전에 시작했던 대결은 어느새 밤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강한나가 잠이라고 말했던 건 취침과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던 것이었다.
“잠을 자지 않은 채 오래 버티는 사람 쪽이 승리하는 걸로 하죠.”
“아….”
이걸로 알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에 대해서 안 알려줬구나?’
[수면 부분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그러니까 저런 이야기를 했겠지.’
패착.
이번 승부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절대 강한나 쪽이 이길 수 없었다.
베아트리체도 수면 스킬을 사용하면 잘 수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킬을 사용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강한나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말씀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응? 왜?’
[이번 대결은 최대한 지켜보는 쪽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나도 아직 내가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바로 균형.
좀 비겁하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레나 쪽이 이긴다면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점수는 3:1로 강한나와 시호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대결이라고 해도 친선전인만큼 점수 차를 좁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다름 아닌 레나에 의해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건 불공평합니다.”
“설마 졸리셔서 그러신가요? 그럼 그냥 패배를 선언하시면 되는데.”
강한나의 비웃음이 담긴 대사에 레나는 특별한 반응 없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그저 할 말을 할 뿐이었다.
“베아트리체 씨가 빠지지 않으면 이 대결은 애초에 형평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강한나의 의문에 레나가 설명해줬다.
베아트리체의 수면에 관한 이야기를….
평생 잠들 수 없는 그녀의 이야기를….
레나의 말을 들은 강한나는 부당한 대결을 하지 않아도 됐다는 안도감보다 오히려 레나의 행동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굳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한 거죠?”
“부정한 승리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정…?”
레나의 말에 강한나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일부러 지는 것도 부정 아닌가요?”
“…?”
무슨 소리인가 싶은 순간 강한나가 레나의 앞에 서서 이를 갈면서 채 노기를 드러냈다.
“아까, 왜 일부러 져 준 거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