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0화 〉 560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에필로그)
* * *
금발의 미녀, 나탈리 피셔.
그녀의 직업은 영어와 한국어를 담당하는 외국인 강사였다.
한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영어권 외국인들에게 한국어에 대해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직 강사로서 인지도가 높은 건 아니었지만, 나름 미형의 외모 덕분에 서서히 인지도가 오르는 그런 여자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학생들을 가르쳐왔던 그녀가….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 다,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녀의 당황스러운 물음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재차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연구소가 이번에 해외 지부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내용의 요지는 나름 보수적이던 고민태의 연구소가 해외 지부를 놓으며 확장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해 여러 인재를 뽑고 있는데, 그중에 한 부분이 바로 교사 부분이었다.
지금까지는 재능이 확인된 인재만 뽑았지만, 이제부터는 재능을 기르는 교육기관을 자체적으로 설립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제가 강사 일을 하고 있어서 괜찮지만… 저는 그쪽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그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사가 아닌 전문지식도 두루 익혀야 하는 교사.
아무리 나탈리 피셔가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하지만, 전문지식 없이 전문지식과 관련된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제안한 남자는 나탈리 피셔에게 거듭 제안했다.
“괜찮습니다. 애초에 전문적인 부분은 따로 학과를 만들 거니까요.”
“아, 그럼 저는 영어랑 한국어 쪽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거네요?”
“아뇨.”
“…?”
남자는 몇십 장은 되어 보이는 종이 뭉치를 넘겨주면서 입을 열었다.
“그쪽 담당은 따로 인재를 확충할 계획입니다. 당신은 저희가 설립하는 기관 책임자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채, 책임자라고 하면…?”
“대충… 학교로 치자면 교장 같은 거겠네요.”
“네!? 저, 저한테 왜 그런 제안을….”
그저 교사로 채용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학교의 교장 같은 담당자를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런 제안을….”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탈리 피셔에게 말했다.
“고민태 박사님께서 추천인을 말하면 이해할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추, 추천인이요?”
“네, 추천인 이름이….”
***
검은색의 긴 유광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대생 유시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교수에게 되물었다.
“이, 인턴십 프로그램이요?”
“그래. 고민태 박사님의 연구소에서 이번에 인턴십 프로그램에 채용할 인원으로 널 지목했더구나.”
유시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거기 인턴 없잖아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교수는 고개를 절레거리며 자기가 아는 선에서 모두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고민태의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진행하는 인턴십 프로그램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 첫 번째 인턴 중의 한 명으로 유시아를 지목했다는 것이었다.
“저, 저는 거기 들어갈 정도로 성적이 나오지도 않았는데요?”
유시아도 고민태의 연구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한국 명문 대학에 입학했더라도 수준이 달랐다.
대학에서 수석 졸업을 해도 고민태의 연구소 문턱의 색깔조차 못 보는 것이 현실이었다.
심지어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놓고 정작 성적이 애매한 자신을 지목한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교수는 그런 유시아를 보며 고개를 절레거렸다.
“나도 안다. 너 성적 안 좋은 거….”
“으아! 너무해요! 여기서 이 정도 성적이면 다른 곳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고요!”
“나는 네 성적 보고 탄성이 아니라, 탄식이 흘러나온다.”
“히이….”
시무룩한 유시아를 보며 교수가 손을 절레거렸다.
“젠장 생각 같아서는 내가 네 자리를 꿰고 싶은 심정이다. 연구소 구경해 보는 게 내 평생소원이었는데….”
“그, 그 정도로 좋을까요? 아무리 대단한 곳이라고 해도… 고작 인턴인데.”
“얌마! 1기야! 1기! 고민태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인턴을 뽑는 거야! 심지어 조건이 교수인 나보다도 훨씬 좋더라!”
흥분한 교수의 모습만 봐도 엄청난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저일까요?”
“그쪽에서 추천인 이름을 알려주면 알 거라고는 하더라.”
“추천인이요?”
“그래. 추천인 이름이….”
***
김예빈은 소속사에 오자마자 건물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큰소리로 외쳤다.
“주, 주연이요!?”
“그래! 그것도 저번에 오디션 봤던 그 드라마 있잖아! 거기 주연이라고 하더라!”
“마, 말도 안 돼! 그 오디션 봤을 때, 그냥 조연 쪽 오디션만 봤잖아요?’
“모르겠어. 하여튼 PD가 직접 연락해서 통보해주더라.”
“와….”
김예빈은 허탈하게 웃으며 다리가 풀린 듯 소파에 털썩 앉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기 힘들 상황.
하지만 현실이었다.
연기자에게 돈만큼 중요한 건 배역이었다.
그런 배역이 갑자기 전혀 예고도 없이 김예빈에게 굴러 들어온 것이다.
“호, 혹시 착각은… 아니겠죠?”
“아냐. 너랑 착각한 거 아니더라. 이거 읽어봐.”
“…?”
김예빈은 소속사 사장이 건네준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종이.
그 종이에는 전부….
“이, 이거… 반성문 같은데요?”
“그 PD가 너한테 치근덕댄 거 미안하다면서 반성문까지 써서 왔더라.”
“내, 내용을 보니까… 저한테 주려고 한 건 맞는데. 왜 저한테 직접 안 주고요?”
“몰라. 너랑 직접 연락하면 죽을병에 걸린 사람처럼 벌벌 떨더라.”
소속사 사장은 그렇게 말한 뒤, 김예빈을 유심히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너… 혹시 스폰 생겼냐?”
“아잇! 나 그런 거 안 한다고요!!”
“귀 아파! 누가 하라고 했냐? 그냥 했냐고 물은 거잖아!”
소속사 사장은 귓구멍이 아픈 듯 귀를 파며 고개를 갸우뚱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건 누구지?”
“누구라뇨?”
“이번에… 우리 소속사에 누가 말도 안 되는 금액을 투자했어. 심지어 네 팬이라는 식으로 투자를 해서… 나는 당연히 그쪽인 줄 알았지.”
“투, 투자요?”
김예빈은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연예계는 분명 명예로 일어서는 곳이다.
하지만 그 명예를 얻기 위해서 돈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괜한 돈을 받아서 훗날 명예에 족쇄가 걸리는 경우도 허다했고….
“사, 사장님… 나 그런 거 싫어요. 아시죠? 만약 그런 쪽으로 말이 나오면….”
소속사 사장은 김예빈의 반응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투자자분께서 너 그렇게 나올 거 같다고 하더라. 뭐, 정 불안해하면 자기 이름 알려주면 안심할거라고 이야기도 했고….”
“이름이요? 그분 이름이 뭔데요?”
“투자자분 이름이….”
***
“이, 이민수요?”
한미소의 질문과 혼합된 대답을 들은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이민수 씨께서 한미소 씨께 50억 원과 소유하고 있는 집의 권리를 양도하기로 하셨습니다. 저는 대리인의 자격으로 왔고요.”
“오, 오빠는 지금…?”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대답한 변호사는 신속하게 한미소에게 서류를 건네준 뒤 양도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양도에 관한 법적인 문제가 전부 해결된 돈과 집이라는 점을 명시하며 서류 작성을 전부 마무리 지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네.”
한미소는 그렇게 변호사와 헤어진 뒤, 멍한 눈으로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양도받은 집의 위치는….
“…오빠 집이네?”
한미소가 공인중개사로 그와 거래했을 때만 해도 월세로 계약한 집이었다.
하지만 집 명의는 한미소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민수로 변경되었고, 그 상태에서 다시 한미소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한미소는 즉시 넘겨받은 집으로 향했다.
집 비밀번호를 이미 알고 있던 한미소는 이민수의 집을 들어가서 내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편지?”
텅텅 빈 집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가구인 침대 위에 자필 편지가 남겨져 있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갑자기="" 떠나서="" 미안.="" 정말="" 중요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만나기="" 힘들="" 거="" 같아….=""/>
편지에는 남자의 애틋한 마음이 글로 표현되어 있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위한 조언도 담겨 있었다.
“푸웃….”
뚝.
한미소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턱에 매달려 있던 액체가 편지 위로 떨어진 뒤 점차 잉크를 흐트러뜨리기 시작했다.
한미소는 그렇게 눈물이 묻은 편지를 품에 안고 침대에 엎어지며 흐느꼈다.
“…사람 후회하게 만드는 데에는 재능이 있네요. 오빠.”
한미소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그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들의 눈물이 담긴 울음이 남자에게 닿는 일은 결국 없었다.
***
구준병이 수척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무수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저야말로 도와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190 정도 되는 훤칠한 키에 나이대는 20대 초반으로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닌 남자였다.
도주하며 하루하루 지옥을 맛보던 구준병의 앞에 나타난 남자.
이 남자가 나타나고 나서 구준병의 삶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죄가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었지만, 눈앞의 남자가 위장 신분을 구해준 덕분에 더 이상 도주할 필요까지는 없어지게 된 것이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아, 제 이름이요?”
그의 이름은….
“제 이름은 이민수라고 합니다.”
“아! 이… 민수요?”
“왜 그러시죠?”
“아, 아닙니다! 예전에 들어봤던 이름 같아서요… 하하!”
이민수는 구준병의 어색한 웃음을 바라보며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상기 시키기 시작했다.
..
..
“너는 평생 여기서 살아! 나는 이제 떠날 테니까!”
충격과 공포였다.
평소에도 철없이 행동하는 모습이 있었어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친한 친구 같은 느낌도 들어서 좋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자신의 불행을 결정하는 요소라면 그냥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뭐야! 그냥 보내주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설마 내가 뭐 잘못했어? 혹시 기분 나쁜 게 있다면 사과할게!! 제발 나를 보내….”
“사내놈이 말이야! 으잉! 복수를 다짐했으면 마지막까지 봐줘야지!”
“하,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해줄 테니까!”
“…?”
자신을 사칭하던 남자는 다음날 이민수를 데리고 고민태의 연구소로 향했다.
그리고 고민태의 연구소에 도착한 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고민태가 분리 신체와 인공 장기를 전부 갖춰놓고 기다린 것이었다.
시체처럼 죽어 있는 육체.
그 육체를 보고 이민수가 감탄하듯 탄성을 내질렀다.
“와… 진짜 잘생겼는데? 거기다 몸도 장난 아니고…. 예전의 나랑 너무 다르다.”
이민수의 말대로 고민태가 준비해 놓은 육체는 소위 말하는 알파남의 정석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후 이민수는 사칭남에게 모든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이게 네 몸이야.”
“몸이라니? 분리 신체라는 게 대단하긴 하지만… 내가 어떻게 여길 들어가?”
사칭남은 잠깐 침묵하더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네가 여기에 들어갈 능력을 줄 수 있어.”
“저, 정말!? 진짜야? 마, 말도 안 돼!”
“진정!”
사칭남은 호들갑을 떠는 이민수를 진정시킨 뒤 진지하게 이야기를 진행했다.
“가능해. 다만 내가 그 능력을 주기 전에 너한테 맹세를 받아야 해.”
“마, 말만 해줘… 뭐든 할게!”
이민수는 혹시라도 사칭남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사칭남은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절대 고민태와 척지지 말 것.”
“아, 알았어! 아니. 맹세할게!”
“혹시라도 말하지만… 만약 네가 고민태에게 칼을 들이밀거나 반항을 한다?”
“….”
“그때는 내가 직접 나서서 바로 즉결처형을 할 거야. 명심해.”
“…명심할게. 내 모든 것을 걸고 약속할게.”
“좋아! 참고로 고민태에게는 내가 말해놨으니까. 육체에 들어간 네가 하는 부탁은 웬만해서 들어줄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
..
이민수가 사칭남과의 대화를 떠올며 추억에 잠겨 있는 중에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 덕분에 분위기가 깨져버렸다.
“저… 혹시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이민수는 회상을 방해받은 것 때문에 짜증이 몰려온 나머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변한 태도의 이민수를 보며 구준병을 쭈구리처럼 사과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어디 편찮으신가 싶어서….”
이민수는 구준병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전 내 모습 같네.’
구준병 앞에서 비굴하게 굴던 자기 모습과 똑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때의 구준병과 비슷했고….
‘처음부터 너무 강압적으로 다가갈 필요는 없겠지?’
이민수는 커다란 키를 일으켜 세워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두통이 와서… 그러고 보니, 가족은 있어요?”
“네! 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와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래요.”
이민수는 사칭남이 남겨준 마지막 조언을 상기하며 구준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번 복수를 다짐했으면 절대 망설이지 마. 그리고 남자 새끼는 죽이는 것보다 더 깊은 지옥에 빠트리는 최고의 방법은….
사칭남의 회상과 함께 구준병의 얼굴이 겹쳐졌고.
“위장 신분이긴 하지만, 가족들도 만나 봐야죠? 이참에 같이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요?”
“그, 그러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런 구준병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주변 여자들 계속 따먹어주면 그만이야.
이민수는 사칭남의 조언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미소를 지었다.
‘진짜 이름을 알고 싶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알려주지 않았네. 그래도 고맙다. 가짜 이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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