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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여자를 빼앗는 방법-519화 (520/898)

〈 519화 〉 519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

* * *

나는 하얀색으로 뒤덮인 복도를 걸어가면서 통신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진짜 미친놈이네.’

대사만 들으면 욕처럼 들리겠지만, 대사의 의미는 욕이 아니었다.

이렇게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 않는 산중에 몇백 명이 달라붙어도 간신히 설치할만한 시설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미친놈이라는 표현 말고는 도저히 떠오르는 칭찬 멘트가 없었다.

[내부가 연구소처럼 보이지만, 방은 없고 복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 복도를 걷는 내내 문 한 짝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여러 명이 지내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만든 시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나는 유령 상태로 복도를 걸으며 벽 속을 꼼꼼히 확인해봤다.

‘캬… 여기 안에 기관포가 달려있네.’

[그 옆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있습니다.]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인 함정이 즐비하고 있었다.

내가 육체를 가지고 이곳을 방문했다?

진작에 저 트랩들이 발동해서, 내 몸은 형체도 남지 않고 분해되었을 것이다.

[위그드라실이 여러모로 좋은 스킬들이 많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한여름 아니었으면 이런 스킬이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유령의 시간]­

육체를 가사 상태로 빠트리는 대신, 영혼 상태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스킬.

현재 한여름의 직업인 유령 기사의 스킬이었다.

내가 이 스킬을 배울 수 있었던 건 한여름이 스킬을 배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여름의 기질창은 아르모니아의 힘으로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내가 [유령의 시간] 스킬을 배울 수 있었던 건….

‘유령 기사 제단에 가서 확인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거 아니었으면 이 스킬 배우지 못했을 텐데.’

나는 당시 한여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미리 유령 기사로 전직할 수 있는 제단을 방문했었다.

그곳에서 직업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유령 기사의 제단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단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스킬을 본 덕분에 [유령의 시간]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스킬 좋긴 한데… 이 복도 얼마나 긴 거야?’

[수호 님. 그 여우 혼령이 가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어떻습니까?]

‘끙… 그러고 싶은데, 꿈속에서 본 장면이 너무 헷갈려서….’

시호는 이런 복도를 이용해서 통행하지 않고, 언제나 산꼭대기에서 다이렉트로 강한철의 작업실까지 뚫고 들어갔다.

나도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시호는 대충 위치를 기억해놓고 숙달한 상태로 뚫고 들어가는 것이지만, 나는 자칫 방향을 잃어서 시간만 더 허비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나중에 고민태가 이곳을 통해서 들어올 수도 있잖아. 우리가 미리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내 말에 아르모니아는 수긍했고, 나는 계속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중간중간 보안이 필요한 문이 존재했지만, 나는 그런 시스템을 무시하고 여유롭게 안쪽으로 향했다.

..

..

‘…드디어 도착했네.’

아까까지는 하얀색 철벽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복도였다면, 지금 내가 도착한 곳은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 흔적이 담긴 공간이었다.

시호의 꿈에서도 봤던 장면이다.

‘여기가 강한철이 사는 곳이야.’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치고… 아까 지나온 복도처럼 보안이 엄중한 것 같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 사람이 거주하는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CCTV가 널려 있었다.

나는 혹시 몰라도 철벽 안쪽을 확인해봤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자기가 사는 곳이라 그런지 함정은 설치하지 않았네. 다만 네트워크에 들어간 틈에 누군가 몰래 침입했을 때를 대비해서 CCTV랑 감지 센서는 꼼꼼하게 설치해놓은 거 같아.’

애초에 그 무수한 함정이 설치된 복도를 몰래 통과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나는 복도를 이동할 때의 여유를 버리고, 주변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CCTV나 각종 센서에는 걸리지 않지만, 근처에 있는 강한철의 귀에는 흘러 들어갈 가능성은 존재했다.

‘그래도 생활 루틴이 철저한 녀석이라 지금은 선거 후보들 감시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야.’

강한철이 네트워크 세상을 빠져나오는 경우는 식사와 샤워, 그리고 생리 현상을 처리할 때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경우에는 루틴이 정해져 있었다.

‘잠도 네트워크 안에서 해결하는 거 같았어.’

네트워크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만 외부로 나와서 해결하고 다시 들어가는 식이었다.

심지어 소식하는 편이라 씻을 때가 제일 오래 나와 있는 시간이라고 보면 됐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통신으로 말했다.

‘아르모니아, 혹시라도 주변에 시호 기질창 뜨면 알려줘.’

[알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상태로, 심지어 이곳에서 시호를 만나는 건 피해야 했다.

시호가 내게 호감이 있다고 해도 내가 강한철의 뒤를 캐는 것을 보게 되면 변명도 쉽지 않고, 호감도가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컸다.

나는 아르모니아의 경계심을 믿고, 몸을 띄워서 제일 중요한 장소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여기다.’

벽을 뚫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넣어서 내부를 확인했다.

내부는 빛 하나 새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밀폐된 공간이었고, 무수한 전선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감탄했다.

‘이야, 여기가 무슨 주식장도 아니고….’

방에 설치된 무수한 모니터들은 가운데를 향해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모니터가 바라보는 장소에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이동시켜서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했다.

백옥 같은… 아니, 시체 같은 얼굴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

죽은 듯이 얌전히 누워있는 남자.

‘드디어 면상을 보는구만.’

강한철.

성전의 주인공이었다.

..

..

나는 기분 좋게 공중을 활보하며 소리쳤다.

‘와… 유령 상태 개쩐다. 이런 거 매일 경험하면 우울증은 안 걸리겠다.’

장애물과 중력의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들.

나는 유령이 된 것을 실감하며 집으로 향해 대기를 뚫을 듯이 날아가고 있었다.

‘빨리 가야겠다. 한미소랑 시호가 기다리겠다.’

은거지에 들어갈 때만 해도 중천에 있던 태양은 어느새 기울어서 붉은색 기류를 흘리고 있었다.

유령의 시간은 엄청난 스킬이었지만, 그만큼 단점도 존재했다.

‘돌아가기 빡쎄네.’

다시 원래 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직접 육체로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사용 제약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유령의 시간]­ 스킬의 유일한 사용 제약은 안전지대 안에서 사용 불가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안전지대가 없으니 전혀 의미가 없는 제약이었다.

귀찮은 건 그대로지만….

‘그래도 날아가는 속도가 빨라서 다행이다.’

전속력을 다하면 비행기 정도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아르모니아에게 말했다.

‘아르모니아, 다음에 갈 때는 워프로 갈 수 있는 거 맞지?’

[좌표를 확인했습니다. 워프로 자유롭게 이동 가능합니다.]

‘좋아.’

오늘 강한철의 은거지를 잠입한 건 그저 녀석의 면상이나 보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좌표.

워프를 하기 위해서는 좌표가 필요했다.

가령 내가 직접 이동한 곳은 영상을 토대로 좌표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알아낸 강한철의 위치는 시호의 꿈속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귀찮음을 감수하고 내가 직접 강한철의 은거지로 향한 것이었다.

‘뭐, 내부 시설도 내 눈으로 익혔으니 귀찮음을 감수할만한 이득이었어.’

나중에 강한철을 생포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지금 당장 원래 몸으로 돌아간 뒤, 은거지로 워프해서 강한철을 마법으로 죽일 수도 있었지만….

‘사살하면 얼마 준다고 했지?’

[사망 시, 보상은 300만 에넬입니다.]

‘너무 차이가 나는데….’

보상 에넬이 현저히 줄어들고, 무엇보다 에넬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뭐, 뭐지? 혹시 몸이 안 좋은가? 왜 이렇게 죽은 듯이 자는 거지…?)

가사 상태에 빠진 나를 걱정하는 시호가 보였다.

‘다른 몰라도 시호의 마음을 완전히 얻기 전에 강한철을 죽이는 건 안 되지.’

시호는 아직 강한철에게 정을 주고 있었다.

봉인을 풀어주고, 오랫동안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어준 남자.

아무리 시호가 나한테 호감이 생겼다고 해도 강한철을 버리고 쉽게 내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저 또한 수호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여우 혼령은 탁월한 인재입니다. 영입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합니다.]

‘오….’

아르모니아의 이런 모습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인재를 탐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네? 영입하는 거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예전에 레나를 영입하자는 내 제안에 아르모니아는 거부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야 레나를 영입하고 나서는 오히려 서로 손발을 잘 맞추면서 내 보조를 해주긴 했지만….

[싫어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

[그때 수호 님은 저를 미덥지 않아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

기억났다.

내가 레나를 영입하려고 했던 이유를….

‘아르모니아. 나는 그저 걱정돼서 그런 거야. 잠은 자는 게 좋잖아?’

레나의 영입 이야기는 아르모니아의 수면 패턴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안한 일이었다.

임무 중에 잠을 안 자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싶어서….

그런데….

[저는 수호 님을 보면서 단 한 번도 피곤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

뭐랄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르모니아의 말에 내심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더 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혹사를 또 어디선가 하고 있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기로 했다.

더 이상 걱정해봤자 오히려 아르모니아의 심기만 건드릴 것 같았다.

그렇게 침묵이 감도는 사이에 내 방에 있는 시호가 횡설수설하며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 설마 어디 아픈 건가!? 아, 안 되겠다. 일단 그 여자 몸에 들어가서 직접 찾아와야겠어!)

시호는 그렇게 외치며 다급하게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영혼 상태인 나를 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르모니아는 아까의 침묵을 깨며 내게 질문을 했다.

[혼령 상태로 만나지 않으십니까?]

아르모니아의 의도를 대충 느낄 수 있었다.

시호의 혼잣말을 들으며 그녀의 심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만나는 것에 행복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진짜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몸을 빌려서 만나는 것을 슬퍼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니 공감이 갔다.

나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때마다 다른 남자의 몸을 이용하면 거지 같을 테니까.

‘그야 만나는 건 쉽지.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안돼.’

[…?]

내가 영혼 상태로 나타나서 대충 거짓말을 두르더라도 시호는 내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 나를 반겨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끝나면 강한철에게 향하는 마음도 쉽게 끊을 수 없어.’

쉽게 얻은 건 쉽게 버릴 수 있다.

그에 비해서 어렵고, 오랜 기간을 참아오면서 얻은 것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쉽게 버릴 수 없다.

쉽게 마음을 얻은 나, 그리고 오랜 시간 어렵게 마음을 얻은 강한철.

그게 나와 강한철의 차이였다.

하지만….

‘하찮은 것 이상으로 귀찮게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무리 정이 들었다고 해도 귀찮음이 지속되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시호에게 있어서 강한철의 존재가 나와 이어지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그 순간 문뜩 한 가지 사실이 떠올렸다.

‘잠깐… 유령의 시간 쓰면 혼령 상태랑 똑같은 거잖아?’

[…?]

내 말과 동시에 내 방안에 울려 퍼지는 벨 소리가 내 귀를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한 번만 눌러도 되는 초인종을 미친 듯이 누르고 있었다.

예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바로 원래 몸으로 들어간 뒤, 일어나서 현관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터폰으로 상대방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실내 정원을 지나서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오빠! 괘, 괜찮아요!?”

한미소의 몸에 빙의한 시호가 내 품에 안기듯 달려들고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시호를 보면서 하품을 하는 척하며 물었다.

“흐아암… 왜 그래? 갑자기 찾아오고….”

“저, 전화해도 받지 않아서 너무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아, 미안. 내가 잠귀가 어두워서….”

나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호를 집 안에 천천히 안내하면서 다급하게 아르모니아를 불렀다.

‘아르모니아! 안 되겠어! 계획 변경! 빨리 진행하자!’

[혹시 문제가 생기셨습니까?]

‘응!’

나는 시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천천히 실내 정원을 걸어가며 집 안으로 향했다.

‘유령의 시간을 쓰면 영혼 상태라는 거잖아! 시호랑 섹스 할 수 있다고!!’

[….]

왜? 빨리 꼬시면 좋잖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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