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7화 〉 517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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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에게 침몽해서 본 내용은 대부분 현대에 와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봉인되어 있던 그녀를 강한철과 그의 사촌이 우연히 발견해서 풀어주고, 그녀와 같이 봉인된 물품을 강한철이 손에 넣은 것이었다.
그 물건의 정체는 바로 여의주였다.
여의주의 정확한 능력과 정체를 알고 싶어서 더 오래된 꿈을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의주와 관련된 과거를 보는 건 내 침몽 수준으로도 불가능했다.
결국 내가 알아낸 사실은 현재 그 여의주를 강한철이 소유한 상태고, 그 여의주를 이용해서 네트워크 속으로 정신을 넣을 수 있던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저 여의주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가 싶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여의주를 다룬다는 점에서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넘는다는 사실을 시호의 꿈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 여의주에 손을 대면 정신이 지배되거나, 폐인이 되어야 했지만, 강한철은 오히려 여의주를 주인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로써 알 수 있었다.
강한철이 성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
..
“스으….”
나는 내 품에 안겨서 새근거리며 자는 시호를 보며 통신으로 대화를 나눴다.
‘조디악이 생각보다 쉽게 믿었네?’
[여의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납득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여의주에 대해서 말하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서 믿지 않을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손쉽게 거래를 할 수 있는 시대였다.
이런 세상에 갑자기 여의주라든지 여우 혼령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쉽사리 믿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의주는 강한철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엥?’
[고민태도 여의주를 소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조디악은 단기 임무만 주어진 나에게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그런지 중요한 사실을 쏙 뺀 것이었다.
애초에 내 임무는 그냥 찾아주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조디악의 정확한 이야기를 토대로 고민태가 강한철에 비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민태의 능력은 여의주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의주를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지식이 그의 능력입니다.]
‘아하… 강한철처럼 영혼을 보거나, 여의주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여의주의 능력을 뽑아낼 수 있다?’
[정답입니다.]
수명… 그것도 젊었을 시절로 되돌리는 약을 만든 고민태.
그 약도 여의주를 연구해서 만들어낸 산물일 가능성이 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더 들었다.
‘뭐, 믿은 거야 그렇다 쳐도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건 신기하네.’
나는 시호의 꿈에서 본 정보를 토대로 조디악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걸었다.
그건 바로 성전의 인물을 같이 잡자는 것.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조디악은 1,000만 에넬까지 걸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고민태는 현재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정·재계에 있던 인물들이 대거 등을 돌리고 있고, 심지어 이번 선거 이후에는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매일매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데, 설상가상 그와 척을 진 단체의 인물들이 선거에서 당선될 유력한 후보들이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계속 아군이 등을 돌리고, 적이 늘어난다면 궁지에 몰릴 것이다.
심지어 지금도 손을 쓰는 족족 누군가에게 막혀나가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그 누군가의 정체는 일단 알아냈다.
[강한철… 이제야 알았지만, 지금은 손 쓰기 쉽지 않다고 답신이 왔습니다.]
‘일단 고민태가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네.’
강한철이 사는 곳을 알려준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그가 지금 은거하고 있는 장소는 그저 사람을 몰래 투입해서 잠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숨겨온 강한철이 허술한 장소에 살 리가 없으니까.
‘그 위치에 핵폭탄이라도 쏘는 거라면 모를까….’
정말 미친 척하고 쏘는 순간 고민태는 오히려 인류의 적이 될 것이다.
아니, 반대로 강한철이 핵폭탄 코드를 알아내서 고민태 연구소에 몰래 쏘는 게 훨씬 빠르겠지.
그리고 그 상황을 토대로 에넬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나서서 강한철을 잡아보겠다고 조디악에 제안을 건 것이었다.
조디악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고….
그리고 조디악이 내 제안을 받으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생포해달라고 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는 사살해도 되지만….]
‘보상이 줄어들겠지?’
[맞습니다.]
생포해야 하는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굳이 이유를 알 필요도 없고….
‘좋아. 그럼 일단 계획을 세우자.’
[일단 첫 번째 문제는 국내 선거입니다.]
일단 강한철을 잡기 위해서는 불리한 판을 뒤집을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선거가 흘러가게 되면 고민태에게 창을 겨눈 녀석들이 전부 당선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강한철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고민태의 유혹에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투표는 원격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술이 발전했지만, 투표는 내가 살던 세계와 동일했다.
직접 투표소에 가서 출력된 용지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 투표 방식이었다.
만약 투표까지 원격으로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결과를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강한철의 능력은 그저 네트워크를 유영하는 능력이 아니다.
모든 네트워크 방어 체계를 손가락 튕기는 것보다 손쉽게 잠입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정·재계에 몸담은 녀석들을 협박하고 다녔겠지.
[현재 선거 판도가 불리하고, 만약 그것을 뒤집더라도 더 큰 문제가 존재합니다.]
‘투표는 아날로그지만, 집계는 결국 디지털로 기록하는 거니까….’
만약 판도 자체가 뒤집혀도 집계하는 순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천천히 변경하면 그만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해결하실 방법이 있으십니까?]
‘있지. 내가 생각한 방법은….’
나는 아르모니아에게 내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그 방법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계획을 짜자. 아깝긴 하지만… 이번에 받은 에넬 100만 여기서 다 쓰자.’
[알겠습니다. 워프 횟수 증가와 말씀하신 스킬 습득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대답과 함께 내 기질창에 하나의 스킬이 생성되어 있었다.
나는 기질창에 띄워진 스킬을 보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버는 건 힘든데, 쓰는 건 순식간이네.’
아깝지는 않았다.
지금 배운 스킬은 애초에 배우려고 벼르던 스킬이기도 하고, 선거 판도를 바꾸기 위해서 꼭 필요한 스킬이었다.
나는 기질창에서 눈을 떼고….
‘그럼 나머지는….’
내 옆에서 새근새근하며 잠에 빠져 있는 한미소를 바라봤다.
내 눈앞에는 창 두 개가 나를 기다리듯 둥둥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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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소 (종속 1단계)*
성벽 :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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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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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호가 빙의된 상태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섹스를 한 건 한미소여서 그런지 종속은 어렵지 않게 걸 수 있었다.
문제는….
‘시호는 안되네.’
시호에게 몇차례 종속을 걸어봤지만,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일단 육체에 빙의된 상태라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대로 시호가 한미소에게 빙의할 때는 최면 게이지도 그렇고, 수면도 그렇고 육체의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 빙의를 풀면 그때 한 번 더 종속을 걸어봐야겠다. 일단….’
나는 한미소의 배에 띄워진 분홍색으로 빛나는 음문을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흐응….”
한미소의 몸에 빙의된 시호가 내 손길을 느끼더니, 신음과 함께 살짝 뒤척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배가 따뜻해지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시호의 미소를 보며 아랫배를 계속 쓰다듬었고, 이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띄워졌다.
‘내가 임무는 실패해도 너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시호.’
나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한미소의 성벽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강한철은 문을 열고 자신의 방이자, 작업실에 들어오면서 한 여자의 웃음소리를 캐치했다.
(흐흐흐….)
“….”
살짝 하울링이 섞인 여성의 목소리만 들어서는 자칫 한이 맺혀서 흐느끼는 여성의 울음소리로 오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는 강한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히히히…. 프흐흐….)
“….”
그녀의 얼굴에는 한이 맺힌 슬픔 따위는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우상과도 같은 아이돌 콘서트를 직관하기 전날 기대감 때문에 잠을 설치는 여자아이의 얼굴뿐이었다.
자신이 온 지도 모르고 실실 웃어대는 시호를 보며 강한철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요새 왜 저러지? 저번에는 기분이 안 좋다 싶더니, 이번에는 재미있는 거라도 봤는지 계속 웃네.’
하지만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실실거리며 웃는 시호의 모습을 처음 본 강한철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자리로 향하고, 앉아서 시호를 뚫어지게 바라봐도 그녀는 강한철이 온 줄도 모르고 계속 웃을 뿐이었다.
(히히히, 아 증말이지….)
“….”
강한철은 시호의 웃는 모습은 좋았지만, 한편으로 궁금증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강한철은 결국 머리까지 올라온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실실 웃는 시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시호, 뭐 재미있는 거라도 봤어?”
(아, 또 떠올리니까 진짜 창피하네. 푸히히.)
“….”
시호가 언제나 혼잣말을 하며 산다는 건 강한철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혼령이고, 남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보니 강한철이 없을 때는 혼잣말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곤 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정신을 놓고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강한철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건 더욱이 충격적이었다.
‘요새 내가 신경 못 써줘서 그런가?’
강한철은 최근 선거를 앞두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 바쁜 생활 덕분에 시호와 나누는 대화는 부탁하거나, 보고를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강한철은 시호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를 불렀다.
“시호.”
(흐흐흐….)
“시호!”
(으캭! 깜짝이야!!)
아까까지는 소녀의 미소로 실실 웃던 시호가 화들짝 놀라며 우렁찬 목소리를 내면서 여우처럼 튀어 올랐다.
쫑긋 세워진 여우 귀와 빳빳하게 쭉 뻗은 여우 꼬리가 인상적이라고 하면 인상적이었다.
왜냐면 강한철은 시호가 저렇게 경계하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놀라는 건 처음이네.’
강한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미안,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하아… 깜작이야. 언제 왔었어?)
“조금 전에.”
(휴우….)
시호는 안도하며 강한철이 들리지 않게 또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안 들었겠지?)
“응? 뭐, 재미있는 거라도 봤어?”
(으, 응? 아, 아냐! 아무것도! 그냥 예, 예전 생각이 나서! 하하….)
“…그래.”
강한철은 더 이상 물어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며 모니터에 화면을 띄워서 한 장면을 재생시켰다.
재생되는 장면에는….
사, 사후 피임약… 효과 좋은가요?
한미소라는 여자가 여자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네, 피임률이 99.9%라고 할 정도로 효과가 좋은 약이에요. 다만 공복에 복용하는 게 좋고, 메스꺼움이 동반될 수 있어요.
한미소는 의사의 설명을 충분히 들은 다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진료실 밖으로 나가서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하아… 미쳤지. 내가 왜 그랬지?
혼잣말의 내용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도 대충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신은 안 돼. 이 나이에 결혼하는 건 진짜 싫어.
강한철은 여자의 혼잣말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그런 녀석한테 좋다고 달려들고는 이제 와서 후회나 하고….”
(….)
시호의 침묵과 함께 화면에서는 한미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만약에 임신하면 어떻게든 책임을 묻고, 만약 안 되면 이걸 빌미로 적당히 선물 좀 받고 다른 여자한테 소개해주자.
한미소는 친절함이 담긴 표정으로 섬뜩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당사자가 들으면 굉장히 상처를 받을 만한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강한철은 그런 그녀의 말에 오히려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역시 끼리끼리 논다고 결국 저 여자도 궁지에 몰리니까 본색을….”
강한철이 한미소를 향한 비아냥과 함께 시호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드러….”
처음이었다.
강한철은 시호를 만나고 나서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호는 진짜 한이 맺힌 구미호의 표정으로 한미소를 쳐다본 채 어금니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저 쓰레기 같은 년이….)
“시호!”
강한철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큰소리로 시호를 불렀고, 시호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평소의 얼굴로 바꾸더니 그에게 되물었다.
(까, 깜작이야! 놀랐잖아. 소리 좀 지르지 마….)
“미… 미안.”
강한철은 다급하게 사과를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시호, 평소랑 너무 다른 거 같은데…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응? 나야 언제나 그대로지!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
“응? 아직 낮인데, 어디를?”
(그런 게 있어!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잠깐만! 시호!”
시호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대답하고는 쏜살같이 벽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강한철의 부름을 무시하고 날아가던 시호는 무수한 벽을 뚫고는 한참을 날아가고 나서야 외부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사람이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산골.
그중 제일 높은 산꼭대기를 뚫고 나온 시호는 살벌한 무표정으로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쓰레기 같은 년이었어… 오빠한테 그런 생각을 품어?)
시호는 그렇게 증오심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날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아… 푸하하.)
시호는 갑자기 살벌한 표정을 지우고는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삼백 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오빠라고 부를 사람이 생길 줄은 몰랐네. 흐흐… 빨리 보러 가자!)
시호는 귀와 꼬리를 살랑거리며 어디론가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