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2화 〉 512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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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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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가 한미소의 몸에 들어가자마자 원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최면 게이지가 사라지고, 한미소가 가지고 있던 게이지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더불어서 아르모니아가 놀랄만한 사실을 한 가지 더 알려줬다.
[수호 님. 여우 혼령의 기질창이 변했습니다.]
‘뭐?’
나는 한미소와 나란히 떠 있는 시호의 기질창을 바라봤다.
시호의 기질창에는….
[페로몬 : 미세한 중독]
한미소가 가지고 있던 페로몬 중독이 전염되듯 그녀에게 퍼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아마 육체를 탈취한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부작용…?’
나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한 채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서 한미소에게 기울였다.
“여기 분위기 좋다. 그치?”
“하하… 네.”
아까까지 내게 아양을 부리던 한미소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저 어색하게 웃는 한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한미소가 내 행동에 맞춰서 잔을 들어 올렸고, 잔이 부딪치면서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챙.
잔의 공명음과 함께 아르모니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빙의 의식은 타인의 육체에 들어가는 능력입니다. 그 때문에 육체에 깃든 페로몬 기질이 그녀에게 잠깐이지만 전염이 된 것 같습니다.]
‘빙의 의식을 풀면 저것들도 다 풀릴 거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후유증이 생길 가능성이 있겠지만, 육체를 탈취할 때만큼 깊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대박….’
이건 기회다.
진짜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찬스였다.
최면술과 페로몬 기질.
이 두 가지가 온전히 적용된 상태.
만약 이 기회를 놓치면 저 시호라는 혼령을 이용할 방법이 영영 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시호가 한미소의 기억만 적당히 읽고 나서 더 이상 나한테 흥미를 잃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한미소의 몸에 들어간 시호는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가다가 코로 냄새를 킁킁 맡고는 갑자기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흐엑….”
“응? 왜 그래? 혹시 속 안 좋아?”
“아, 아니에요! 향이 변했나 이게…? 하하하….”
시호는 다시 와인잔을 입술로 가지고 가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간신히 와인을 들이킬 수 있었다.
빙의 대상인 한미소가 허세를 좋아하다 보니 와인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보니 빙의 대상에 맞춰서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와인바에 오게 된 것도 한미소가 원해서 온 거였으니까.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라….’
나는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미소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그동안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내가 갑자기 옆자리로 가자, 시호가 당황하면서 나를 살짝 밀치기 시작했다.
“아! 오, 오빠… 가, 갑자기 이러면….”
“에이 왜?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앉는 줄 알겠다.”
“미안해요. 그런 의미는 아닌데….”
시호의 표정에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이대로는 자칫 그녀가 먼저 빙의 의식을 풀어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컸다.
‘그 전에 손을 써야지.’
나는 속으로 비릿하게 웃으며 속삭이듯이 그녀의 귓속에 말했다.
***
“30분만 이렇게 같이 있자? 응?”
“아….”
성수호는 시호가 빙의한 한미소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그녀의 귓속에 대사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 그럴까?’
시호의 빙의 의식 해제 욕구를 잠재워 버렸다.
“그, 그러죠. 뭐. 하하….”
“한잔 더 마시자.”
“네.”
시호는 홀린 듯이 남자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신호에 따라 와인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뭘까… 이 한미소라는 여자의 몸이 문제인 건가?’
빙의 의식은 상대방의 육체를 빼앗고, 기억을 엿볼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하지만 빙의 의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제약 조건이 필요했다.
그건 바로 동화율.
동화율이 낮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방의 몸에 들어갈 수 없는 게 빙의 의식의 단점이었다.
하지만….
‘아냐… 이 한미소라는 여자와의 동화율은 높았어. 생각보다 몸을 조신하게 잘 지켜왔어.’
시호는 지금까지 몇차례 빙의 의식을 실패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 실패한 대부분의 여성이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동화율이 높은 여자들은 대부분 시호가 표현한 것처럼 조신하게 몸을 잘 지켜온 여자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처녀.
‘한나처럼 압도적인 동화율은 아니지만, 이 여자와의 동화율도 만만치 않게 높은 거 같아. 그런데 왜 이런 거지?’
한미소에게 처음 빙의했을 당시 시호에게 덮쳐졌던 기운은 취기뿐만이 아니었다.
시호의 머릿속에 헤집고 들어온 정체불명의 감각이 지금도 그녀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시호는 아까까지 혐오스럽게 느껴졌던 남자의 눈빛에 빠지듯 그를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분명 아직도 그에 대한 혐오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계속 그 혐오감이 옅어지면서 시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기억을 훑어보는 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
지금 당장 빙의 의식을 풀 수 있었지만, 시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 생각에 대해서 아예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남자에게 더 달라붙기 시작했다.
시호의 본능이 이 남자와 붙어 있으라고 그녀를 유혹했다.
‘나는 남자 몸에 못 들어가잖아? 이 여자를 이용해서 경계심을 느슨하게 만들어서 정보를 얻자. 그때까지는….’
남자가 시호와 눈을 마주치면서 그녀의 손을 꼭 잡기 시작했다.
시호는 자기 손을 잡고 미소를 짓는 남자를 보며 같이 미소를 지어줬다.
‘계속 내가 감시해야겠어.’
..
..
시호는 옥상 담벼락에 앉은 채 검게 칠해진 하늘 위에 수 놓은 별들을 보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내가 왜 그런 거지?)
시호의 원래 목적은 감시였다.
강한철에게 구준병과 대립하고 있던 후보 쪽에 후원금을 건넨 남자를 감시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었다.
후원금을 건넨 남자의 이름은 이민수.
과거 행적이 숨겨져 있었고, 갑자기 하이볼 벼락에 맞은 남자.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사실 따위는 시호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호는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내가 왜 그런 거지?)
시호는 우연히 이민수와 가까운 사이의 여자를 알아낸 뒤, 원래 계획에 없던 빙의를 시도했다.
한미소의 기억을 훑어본 뒤, 자신들이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미소의 몸에 빙의한 시호는 그녀의 기억을 살펴보기는커녕 남자에게 휘둘리기만 했었다.
처음에는 옆자리에 앉고, 그다음에는 어깨동무, 그리고 손을 잡았다.
거부감?
잠깐뿐이었다.
시호가 남자의 온기에 흠칫하며 놀란 모습을 보이면 남자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시호의 경계심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손이 예쁘다는 둥, 몸에서 향기가 난다는 둥….
(그냥 유치한 말일 뿐인데….)
시호는 남자가 속삭인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기 손바닥에 깍지를 낀 남자의 손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시호가 관심과 호감을 느꼈던 남자는 자신의 봉인을 풀어줬던 강한철뿐이었다.
시호는 오늘 만났던 남자의 손을 떠올렸다.
(한철이보다 많이 크고… 뜨거웠어.)
비록 타인의 몸이었지만, 자기 손을 완전히 감싼 열기를 담고 있는 남자의 손.
그 남자가 자기 손에 깍지를 끼면서 손바닥에 온기를 전해주자 정작 경계심이 풀린 건 시호 본인이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남자의 손과 더불어서 그녀의 코로 들어온 남자의 체향이 그녀의 정신을 흐트러뜨려 놓았다.
(사내놈이 무슨 놈의 향수를 그렇게 쓰냐….)
빙의하기 전에는 한미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시호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빙의하고 나서 남자의 체온과 체향을 맡으며 잠깐이나마 한미소가 왜 그렇게 애교를 떨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지속적인 스킨쉽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분명 그때는 행복했다.
그때는….
문제는 빙의가 풀렸음에도 자신에게 남겨져 있던 남자에게 향하는 이성의 감정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멍청아!!!)
시호는 귀가 달린 머리를 심하게 헝클어뜨리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난동도 잠시였다.
한껏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멍한 눈을 한 시호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 만나자고 했지?)
시호는 한미소의 몸에 빙의한 상태로 남자가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눈치 보지 말고 와.
명령조에 가까운 남자의 말.
그리고….
…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대답.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렸음에도 어떠한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세세히 대화를 해봐야겠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했던 대답을 합리화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
이민수에 대해서 알게 된 지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강한철은 의자에 앉은 채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강한철의 갑작스러운 짜증에 당황한 시호가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강한철은 옆에 시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거렸다.
“그 이민수라는 녀석… 집에 접속할만한 전자 제품이 거의 없어.”
남의 집에 참견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강한철에게 그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가 가진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네트워크가 연결된 기기가 없다면 그의 능력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전자 기기조차 이민수는 그렇게 잘 사용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거의 쓰지 않고 있어. 카메라에는 이상한 스티커를 붙여놔서 보이지 않고, 집에 가면 화장실에 던져놓는 건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강한철의 능력은 그저 네트워크를 유영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아무리 강력한 암호로 막고, 인터넷 신호를 강제로 끊어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소프트웨어 수단의 방어로는 강한철의 능력을 절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수단이 동원된다면 아무리 그라도 해도 방법이 없었다.
이민수처럼 물리적으로 카메라를 가리고, 아예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 핸드폰을 둔다면 강한철이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설마 뭔가 알고서 그러는 건가? 아냐… 고민태도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 그 녀석이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알 리가 없고….”
시호는 짜증을 내는 강한철을 보면서 놀라 하고 있었다.
‘(한철이가 이렇게 짜증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모든 세상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이 세상에서 강한철이 닿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까지 그를 귀찮게 하는 존재가 있다면 고민태가 전부였다.
이렇게 강한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반인? 시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본 적 없는 그의 분통이 터진 모습에, 시호는 손바닥을 쥐었다 펴면서 어제 잡았던 그의 손을 떠올렸다.
‘(그 녀석… 확실히 뭔가 있어 보여.)’
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강한철에게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한나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떨까?)
강한나.
강한철과 동갑의 사촌 남매이며, 강한철과 마찬가지로 시호를 볼 수 있는 여자였다.
강한철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강한철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냐. 지금 한나는 연구소에 잠입한 상태라 사시사철 감시당하고 있어. 괜히 쓸데없는 일로 움직였다가는 일이 틀어질 수도 있어.”
(그럼 내가 할까?)
“…뭐?”
시호는 강한철 앞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한복을 입은 채 폴짝거렸다.
(나 빙의 능력 있잖아. 그 이민수라는 녀석이랑 붙어 다니는 한미소라는 여자한테 빙의해서 이민수 집에 감시 장치를 설치해볼게.)
시호는 이미 빙의한 적이 있음에도 강한철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저번에 와인바에서 있었던 일을 한철이도 계속 보고 있었어. 그때 내가 들어가서 그 남자랑 하하 호호 놀았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실망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강한철에게 빙의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 여자한테 빙의해서 다가가면 분명 이민수라는 남자의 집에 수월하게….)
“안돼.”
(응? 왜?)
“그냥… 그건 하지 말아.”
강한철은 짜증이 서려 있던 표정을 지우고, 엄중히 경고하듯 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허용할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왜? 내가 빙의해서 접근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너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아.”
(….)
평소라면 강한철의 저런 강압적인 태도에 흐뭇하게 바라봤을 시호였다.
하지만 지금 시호는 이상하게 자신을 막으려는 강한철의 모습에 뭔가 답답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가 시호의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눈치 보지 말고 와.
그저 가볍게 내뱉은 대사처럼 보였지만, 그 말을 들었던 시호는 계속 그 대사가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아냐… 역시 내가 해야 해.)’
시호는 그렇게 결심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당분간이라도 내가 지켜볼게. 진짜 위험한 녀석일 수도 있잖아.)
“…알았어. 이런 일 시켜서 미안해.”
(으이구! 우리 사이에 미안하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하하하… 고마워.”
(한동안 내가 지켜볼 테니까. 너는 중요한 일을 맡아서 해. 만약 특별한 사안이 생기면 그날 저녁에 바로 말해줄게.)
“응.”
시호는 강한철의 환한 미소를 보면서 생각했다.
‘(별거 없는 녀석일 거야. 그 여자한테 빙의하고 좀 놀아주다 보면 술술 불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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