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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여자를 빼앗는 방법-509화 (510/898)

〈 509화 〉 509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

* * *

100인치가량의 거대한 TV에서 선거 소식을 담고 있는 단조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거실을 조심스럽게 훑기 시작했다.

고작 해봐야 10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10초도 되지 않는 소식이 구준병의 입가를 찢어질 듯 들썩이게 만들고 있었다.

“크흐흐… 좋아. 여기까지 왔어. 이제 이주일만 지나면 끝이야.”

그의 시선은 TV에서 떨어진 뒤, 자신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 있는 노트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해서 F5 단축키를 누르며 자신의 투표율을 계속 확인했다.

0.1%가 오르면 다시 입가를 실룩였고, 0.1%가 다시 내려가면 이마에 새빨간 주름을 드러냈다.

“하아, 어차피 이길 건 알지만, 그래도 멈출 수가 없네.”

여론조사 결과 구준병의 예상 득표율은 65%였고, 2위인 후보조차 30%를 간신히 넘긴 상황이었다.

압승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씨발… 또 내려갔잖아? 아… 올라갔다. 흐흐흐….”

구준병은 조현병 환자조차 거리를 둘 정도로 표정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수하게 F5를 누르던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면서 극도의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씨발, 내일도 그 짓을 해야 하다니. 좀만 참자. 투표만 끝나면 지긋지긋하던 유세도 끝이야.”

그는 고개를 절레거리면서 다시 F5를 눌렀다.

“그런 얼간이들한테 고개를 숙여야 권력을 얻을 수 있다니… 세상 참 병신 같네.”

구준병은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자들에게 일말의 고마움조차 느끼지 않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용 가치가 있다면 거짓된 미소를 지으며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인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한계가 있었다.

“언젠가 바꾼다… 이딴 병신 같은 제도 따위는 내가 올라가면 다 바꿔주겠어.”

그는 그렇게 인류의 해악으로 치닫는 포부를 밝히며 다시 F5를 연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의미 없는 짓을 하는 순간이었다.

띠딕.

노트북에서는 비프음과 함께 도스창이 뜨면서 메시지 하나가 출력됐다.

{J : 잘 지냈나?}

구준병은 도스창의 메시지를 보면서 당황스러운 눈으로 모니터를 부라렸다.

‘뭐야!? J? 이 새끼 한동안 연락이 없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J라는 존재는 신원미상의 도우미였다.

과거에, 갑자기 자신의 컴퓨터를 해킹해서 메시지를 보내면서 무수한 도움을 주는 존재였다.

자잘하게 사기만 치던 구준병은 J 덕분에 협회도 만들고, 심지어 정치에 몸담을 기회까지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J의 메시지를 보면서 구준병의 표정은 마냥 좋지는 않았다.

‘이 새끼 잠잠해서 마음 편했는데… 또 무슨 일이야?’

자신의 성공을 거머쥐게 해준 존재였지만, 처음부터 순수하게 믿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J가 말해주는 수많은 정보가 사실이었고, 심지어 그가 알고 있는 건 성공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었다.

‘씨발, 내 사기 행적을 도대체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야?’

J는 그가 성인, 심지어 초등학교 때 저질렀던 범죄행위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부에 있는 기록을 말살할 정도면… 어느 정도 선에서 활동하는 놈인지 감도 잡히지 않아.’

그런 자신의 범죄행위도 전부 소거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일단 침착하자. 그냥 대화나 나누려고 연락해 온 것일 수도 있잖아.’

구준병은 고개를 절레거리며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린 뒤 현란하게 타건하기 시작했다.

{구 : 오랜만이야. 무슨 일이야?}

{J : 무슨 일이라….}

J의 뜸 들이는 메시지에 구준병은 침을 꿀꺽 삼켰고, 그의 다음 메시지는 그의 뇌를 잠시 멍하니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J : 내가 한동안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구 : 무슨 소리야? 나는 얌전히 있었어.}

{J : 여자 끼고 논 것도 얌전히 있었다는 거라면 내가 널 잘못 본 모양인데?}

‘이런 씨발! 그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그는 울화통이 치밀기 시작했다.

선거 기간 중에 유세 도우미로 들어온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접근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와 한 것이라고는 그저 같이 사무실에서 몰래 술을 마시고, 묘한 분위기를 이끌어 간 것이 전부였었다.

최소한 당선될 때까는 적당히 분위기만 이끌 생각이었다.

‘씨발, 당선되고 나서 따먹으려고 벼르던 년인데.’

그렇게 아쉬움을 속으로 쌓고 있자, 메시지가 다시 출력되었다.

{J : 명심해. 당선됐다고 끝이 아니다. 오히려 조심해야 할 타이밍이지. 계속 이런 식으로 새어 나가면 도움을 줄 수 없다.}

화면 속 J는 도움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구준병은 알고 있었다.

‘이 새끼가 말하는 도움이 없어지면 어떤 짓을 할지 뻔하지….’

언젠가 저 J의 신원을 밝혀내서 목을 쥐는 날을 꿈꾸던 구준병이었지만, 지금은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며 메시지를 치기 시작했다.

{구 : 미안해. 다음부터는 주의를 하….}

하지만 구준병은 메시지를 전부 치기 전에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띵동!

“뭐야? 이 시간에?”

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놓고 조심스럽게 비디오 폰 화면을 확인하면서 초인종을 누른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야? 아무도 없잖아? 뭐가 착오가….’

구준병은 그렇게 신경을 끄고, 다시 식탁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아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문 쪽으로 다가가면서 중얼거렸다.

“화, 확인을… 해봐야겠어.”

그렇게 그는 현관문을 활짝 열고 바깥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열고 나서 구준병의 눈에는….

“뭐야… 아무도 없잖아.”

구준병이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그의 시야에는 어떠한 인형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하던 구준병은 투덜거리면서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

“에이 씨… 아까까지 기분 좋았는데, 짜증 나는군.”

그리고 그렇게 그는 문을 세차게 닫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

내 옆에 있던 이민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문밖에서 두리번거리는 구준병을 보면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진짜 나왔네? 저렇게 나올 리가 없는데….)

이민수는 처음에 내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너무 무책임한 방식이라고 질타를 했었다.

고작 초인종 하나 눌렀다고 내부의 사람이 나온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말을 해왔다.

하지만 너무 간단하게 외부로 나온 구준병 덕분에 이민수의 논리를 박살낼 수 있었다.

(거참… 조심성 많던 녀석이 왜 저러는 거지?)

“….”

나는 이민수의 의문을 따로 해소해주지 않고, 같이 구준병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

최면 게이지 : 25%

=====

원래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했지만, 게이지 소모량 때문에 실패했다.

‘또 안에서 쓸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신중히 하자.’

나와 비올라는 구준병이 문밖으로 나온 사이에 조심스럽게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은신 상태로 몰래 들어간 뒤, 구준병이 집에 다시 들어오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제일 눈에 띄는 건….

이어서 사전="" 여론조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판세를="" 지도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커다란 TV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였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네.’

나는 바로 TV에서 신경을 끄고, 그다음으로 눈에 띄는 존재를 바라봤다.

‘노트북… 뭐지? 누구랑 대화하고 있네?’

화면에는 J라는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을 보니, 뭔가 평범한 대화로 보이지는 않았다.

(뭐지? 굳이 이런 도스창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고? 뭔가 이상하네.)

“….”

심지어 대화 내용도 심상치 않았다.

‘아르모니아, 일단 영상 킵해줘.’

[알겠습니다.]

아르모니아라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어련히 모두 기억해 놓겠지만, 나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미리 말해놨다.

그 순간이었다.

삑.

“…?”

(뭐야? 창이 꺼졌네. 이쪽에서 대화를 건 게 아니라, 상대방 쪽에서 원격으로 건 거였나 보네.)

이민수의 말대로 노트북에 있던 메시지 창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없어진 상태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뒷말이 내 의구심을 더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거참 희한하네. 구준병이 아무리 사람 좋은 얼굴을 해도 저렇게 빌빌 기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

원래 내 계획은 구준병을 재우고, 그의 컴퓨터나 집안을 뒤지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괜찮은 정보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은신 풀면 안 되겠어. 뭔가 이상해.’

구준병이 분명 자기 집 안에 CCTV를 설치하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아닌 타인이 설치했다면? 그것도 본인 모르게?

[현명한 생각이십니다.]

[수호 씨, 그럼 저 이거 계속 쓰고 있을까요?]

아르모니아와 비올라의 목소리가 통신으로 들려왔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비올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해줘.’

[네!]

그렇게 우리가 통신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이었다.

“뭐야. 누가 장난을 친 건 아니겠고… 설마 인터폰이 망가졌나?”

구준병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식탁에 앉아서 노트북을 바라봤다.

그리고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그거 말하려고 연락해 온 거였어? 하아… 사람 속을 제대로 뒤집어 놓고 그냥 가셨다?”

구준병은 식탁에 앉은 상태로 노트북을 계속 툭툭 치더니, 목소리로 짜증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하아, 기분 잡쳤네. 잠이나 자자. 내일도 미친 듯이 돌아다녀야 하니까.”

구준병은 그렇게 말한 뒤 노트북을 덮은 뒤, TV를 끄고 침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좋아. 굳이 귀찮게 수면을 걸지 않아도 돼서 좋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민수를 바라봤다.

(….)

귀신… 아니, 악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진 일주일 넘게 이민수를 봐왔지만,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매번 구준병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분노를 표출했지만, 지금 그의 표정에서는 살기가 담긴 새빨간 증오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이민수를 조심스럽게 손짓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 손짓을 본 이민수는….

(…알았어. 지금은 안되는 거 나도 알아.)

복수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나는 이민수에게 조용히 손짓하면서 구준병의 집을 수색해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알았어… 최선을 다해서 찾아볼게.)

아까의 증오가 그의 복수심을 불태우는 장작으로 변하면서 열정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민수가 그렇게 혼령 상태로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이에 구준병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냥 거실 바닥에서 침몽하면 되겠지.’

굳이 남자 새끼 침몽하는데, 침실까지 같이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수호 씨! 제 무릎 베고 누우세요.]

‘하하, 고마워.’

나는 그렇게 비올라의 배려를 받으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

내가 구준병의 꿈속에서 알아낸 정보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뭐 하는 놈이지?’

내가 알아낸 대단한 정보라는 건 구준병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저 J라는 녀석… 진짜 보통 놈이 아닌가 본데?’

구준병은 J라는 녀석에게 그렇게 휘둘리면서도 정체에 대한 실마리 하나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접근 방식이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노트북으로 강제로 접촉하는 경우부터 시작해서, 그가 보고 있는 TV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구준병이 허튼짓을 하면 그가 바라보고 있던 광고판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구준병도 J라는 녀석에 대해서 찾아보긴 했지만, 결국 실패했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감시 능력을 지녔다면 그 J라는 녀석이 이미 구준병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신기한 점은….

‘구준병이 자신에게 칼날을 들이밀어도 웬만하면 넘어가 준다는 건데.’

저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구준병이라는 존재가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거나, 아니면….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거나….’

나는 왠지 모르게 후자에 좀 더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협회에 대해서 적당히 알아내려고 했는데, 더 위험한 녀석을 알아버렸네.’

어떤 의미에서 구준병이나 협회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위험한 녀석을….

나는 꿈속을 정리하며 슬슬 나갈 준비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 녀석한테 솔직히 말해야 할까?’

원래 처음 목적은 구준병이 가지고 있는 이민수의 기억이었다.

구준병이 이민수를 어떤 식으로 기억하는지 따라서 그에 대한 접근 방식을 정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 1도 기억을 못 하고 있네. 심지어 꿈속에서도….’

구준병은 이용하고 버린 녀석들을 머릿속에 남겨 놓은 인간이 아니었다.

심지어 잊은 수준이 아니라, 그냥 삭제 수준이었다.

‘일단 적당히 둘러대자. 아예 기억을 못 한다고 말하면 그건 그것대로 멘탈에 좋지 않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꿈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환한 빛을 뚫고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내 시야가 점차 초점이 맞춰지면서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목소리가 내 몸을 경직시켜버렸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는지 당장 말해.)

전에 봤던 여우 혼령이…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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