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8화 〉 508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
* * *
“그럼, 쉬었다 가요.”
“아, 괜찮겠어?”
“…어?”
한미소는 자기가 대답해놓고 어리둥절해하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쳐다보던 한미소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괘, 괜찮아요. 그런데 오빠한테 민폐 같아서….”
이것이 바로 정신 조작의 장점이었다.
내가 무작정 정신 조작을 걸었다면 이상함을 느끼면서 거절했겠지만, 이렇게 욕망의 씨앗을 뿌려서 흔들리는 상황에서 본인도 모르게 말하게 만들면 의심을 못 하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이 실수로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한미소와 있으면서 그녀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말하게 만드는 것도 이 방식을 사용한 것이었다.
마음속에 오빠라는 호칭을 쓸까 말까 고민하는 타이밍을 만들고, 그 순간 명령으로 확정 짓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신 조작으로 최면을 걸더라도 상대방이 전혀 의심을 못 하게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 게이지 소모도 적어지는 거 같고?’
식사하면서 한미소에게 걸었던 정신 조작의 게이지 소모는 대부분 15%를 넘지 않았다.
이렇게 대화를 유도하면서 최면을 거니, 생각보다 수치가 확 낮게 잡히고 있었다.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저 호감도가 올라가서 저항이 적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계속 차근차근 실험해보자.’
한미소 덕분에 정신 조작에 관해서 꽤 많이 알 수 있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한미소를 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가자.”
그럼 이제 기억 조작을 실험해볼 차례였다.
..
..
서서히 해가 가라앉으며 어둑해져 가는 바깥 풍경과 더불어서 호텔은 우리를 배웅 하듯이 노란 광채를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오빠,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기억 조작에 관한 실험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가 한미소와 내가 잤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나야말로 즐거웠어. 내가 괜히 시간 잡아먹은 거 아니지?”
“설마요.”
한미소는 기다랗고 부드러운 손으로 내 손바닥을 잡고는 피식 웃기 시작했다.
“오빠 덕분에 오히려 내가 휴가 나온 기분인걸요?”
첫째 날과 둘째 날이 달랐고, 오전과 오후가 달랐다.
한미소는 나와 만난 지 고작 이틀 만에 완전히 친분을 쌓은 오빠 동생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정신 조작뿐만 아니라, 기억 조작을 쓴 결과였다.
하지만 기억 조작을 쓰면서 한 가지 뼈저린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억 조작은 정신 조작이랑 다르게 편법이 통하지 않네.’
기억 조작은 아무리 말주변을 잘 놀려도 결국 사용하는 최면 강도에 맞게 게이지를 소모했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터치부터 시작해서 점차 늘려나가면서 손을 잡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한미소의 손을 살며시 주무르며 미소를 지었다.
“즐거웠다니 다행이네.”
“그래도 너무 자주는 안 돼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걸리면 진짜 잘릴 수도 있어요.”
“알았어.”
아쉬운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새로운 여자, 그것도 한미소 정도 되는 여자와 섹스하고 싶은 건 남자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내 진짜 목적은 그녀를 이용해서 최면술에 대한 이해도를 최대한 높이는 것이었다.
‘뭐, 임무 끝나기 전에 완성하면 그만이지.’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며 한미소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낮이 아니라, 밤에 만나자.”
“흐흥~ 그 정도는 해드리죠.”
그렇게 나와 한미소의 첫 데이트는 성대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
..
뚱한 표정의 혼령 하나가 나를 보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좋겠다. 누구는 열심히 일하는데, 누구는 즐겁게 데이트나 하고….)
“….”
이 녀석은 누구 덕분에 그 일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정전기 같은 미세한 전류로 그 감각을 일깨워주고 싶었지만, 나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적당히 넘어가 줬다.
내가 귀찮은 표정으로 협회 건물을 바라보자, 이민수는 알아서 자기가 알아낸 정보들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일단 네가 말한 대로 건물 내부에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몰래 내용을 엿들어봤어. 그런데 생각보다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더라.)
구준병은 이민수에게 저지른 짓을 다른 녀석에게도 밥 먹듯이 하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들키지 않고, 잘살고 있다면 이런 시기에는 더욱더 입을 조심할 것이다.
(그나마 알아낸 정보는 요새 밤·낮으로 선거 유세를 다닌다는 것뿐이었어.)
‘선거 유세라….’
하긴 저렇게 현수막을 걸어놓을 정도라면 한창 총력전을 벌이고 있을 시기일 것이다.
‘잠깐… 그렇다면….’
나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손짓을 했다.
내 손짓에 귀를 기울이며 다가오는 이민수에게 나는 조용히 묻기 시작했다.
“선거 유세 위치랑 시간 알려줘.”
..
..
아침부터 마이크에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러분 저!="" 구준병을="" 뽑아주신다면="" 국민의="" 일꾼으로="" 세상을="" 고쳐나가겠습니다!=""/>
고성방가 수준의 확성기 소리가 내 인상을 자연스럽게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내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대부분 사람은 확성기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발걸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선거 유세가 시끄러운 건 만국… 아니, 우주 공통인가 보네.’
[기질창을 띄워드리겠습니다.]
아르모니아의 말과 동시에 저 멀리 차량 위에서 소리치는 남자의 기질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구준병
[교활함], [사리사욕], [교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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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대단한 녀석이다. 뭐하나 남을 위한 기질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두 자기 자신의 욕심과 관련된 기질뿐이었다.
‘한편으로 대단하네. 저런 기질을 가졌으면서 필요하면 굽히고, 노력한다는 거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바로 건너편 카페에 들어가서 구경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카페에 들어가서 창밖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구준병을 바라봤다.
키는 대략 170 후반에 체격도 건장한 편이었다.
하지만 제일 눈에 띄는 건 외모였다.
잘생겼냐? 그건 좀 애매했다. 잘생겼다는 표현만으로는 뭔가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구준병의 얼굴을 보면서 느낀 점은 사람의 겉과 속이 절대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야… 진짜 사람 좋은 얼굴하고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기질창이 없다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선거 유세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던 사람들도 구준병의 얼굴을 보고 대부분 표정을 풀고 있었다.
이민수가 왜 처음에 혹했는지 알만했다.
이쯤이면 이민수가 또 조잘조잘 떠들었겠지만, 지금 당장 그는 내 주변에 없었다.
괜히 구준병을 눈앞에 두면 또 시끄럽게 떠들 것 같아서 일부러 협회 건물에 던져 놓고 온 상황이었다.
‘괜히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 계속 엿듣는 게 본인을 위해서 좋겠지. 그럼, 시작해보자.’
나는 빨대로 커피를 쪽쪽 빨면서 게이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수많은 최면 게이지들이 머리 위에 떴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단연코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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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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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내가 왜 남자 새끼 눈깔을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봐야 하냐….’
[….]
나는 그 이후로 구준병의 선거 유세를 따라다니면서 원하지 않게 남자의 눈을 종일 보는 신세가 되었다.
..
..
나는 구준병을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다시 출발지점이었던 협회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처 공원에 앉아서 이민수의 보고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히 원하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선거에 집중하느라 그런지 협회는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고 조용하더라.)
“쓰읍….”
원래도 연락망만 구축하고 필요할 때만 모이는 집단이었는데, 최근에는 선거 기간 때문에 아예 잠잠해진 것 같다는 것이 이민수의 추측이었다.
그렇다고 보안이 허술하냐?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CCTV는 말할 것도 없이 꼼꼼하게 설치되어 있고, 대형 보안 업체와 연계되어 있어서 몰래 잠입하는 건 불가능해.)
내부에 원하는 자료가 있는데,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진짜 물리적인 방법을 이용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그야 진짜 중요한 데이터는 구준병의 집에 있겠지만… 몰래 들어가는 건 그쪽이 더 힘들겠지.)
“….”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협회를 기반으로 정치에 뛰어드는 녀석이라면 그냥 평범한 집에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사무실보다 보안이 훨씬 더 철저한 거주지에서 지내고 있을 테니까.
마침 협회 건물에 있던 주차장에서 고급 세단 한 대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가려나 보네.)
이민수가 혼자 중얼거리듯 알려줬지만, 굳이 그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나도 저 차에 타고 있는 녀석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
구준병
[교활함], [사리사욕], [교만함],…
=====
‘계획을 변경해야겠어.’
협회 사무실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은 지금 당장 효용성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직접 몰래 잠입해야 하니까.
“구준병의 집으로 가자.”
(야, 아까 내 말 못 들었어? 심지어 거기는 경비원도 많이 있을 거야.)
“경비원? 오히려 편하겠네.”
(…뭐?)
나는 멍하니 묻는 이민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아르모니아에게 말했다.
‘아르모니아.’
[네.]
아르모니아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저 멀리 떠나고 있는 차량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 부패한 정치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비올라 대기 시켜줘.’
마법 소녀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
..
아닌 밤중에 우렁찬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민수입니다!)
“저는 비올라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 저야말로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비올라의 상큼한 웃음에 이민수는 넋이 나간 듯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아니, 이런 말 하면 실례인가!? 죄, 죄송합니다!)
“후후후….”
비올라가 난처하게 웃으며 나를 힐끗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얼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침착하시길 바랍니다. 대부분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반응입니다.]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나라고 해서 이민수의 행동을 보면서 무작정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비올라 정도 되는 여자가 나타나면 대화를 이끌어보려는 몸부림을 치는 건 남자로서 당연할 테니까.
한번 놓치면 평생 보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이 이민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어떻게 아냐고?
‘저 새끼 보면 예전에 내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얼간이 같았는지 보여서 더 짜증 나.’
[….]
내가 예전에 비올라를 처음 봤을 때도 비슷하게 행동했으니까.
(아! 호,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
그야 그때의 내가, 이 새끼보다는 훨씬 나았겠지만….
나는 손을 휘적이면서 이민수를 진정시켰다.
“일단 잡담은 나중에 해. 구준병의 집은 확인해봤어?”
(아!? 화, 확인했어! 3201호야. 정문 쪽에는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고, CCTV도 엄청나게 널려 있어서 몰래 들어가기 힘들 거야.)
경비원도 마찬가지지만, CCTV에도 절대 걸리면 안 된다. 나중에 꼬리가 잡히면 나 또한 곤란해지니까.
나는 무작정 선의로 이민수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성전 쪽 인물과 연관성이 느껴지는 녀석들의 뒤를 캐는 것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범법행위가 걸리는 건 피해야 했다.
나는 정면에 보이는 아파트를 보면서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일단 출발하기 전에 실험이나 해보자.”
(실험?)
나는 비올라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비올라. 은신 써줘.”
“네!”
비올라는 활기차게 대답하며 에테르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리고 순식간에 비올라의 주변에 투명한 막이 생성되면서 몸이 사라져 버렸다.
(어!? 뭐, 뭐야! 사, 사라졌어!)
“오케이. 일단 유령도 못 보는 거네. 다음은….”
나는 통신으로 아르모니아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쾌한 답을 받을 수 있었다.
[비올라 씨의 은신은 그저 기척을 숨기거나, 사물과 동화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함선의 화면에도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 CCTV나 경비원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좋아.’
모든 준비가 마무리됐다.
위치는 이민수가 알아냈고, 잠입하는 건 비올라의 도움을 받으면 됐다.
하지만 이민수는 결정적으로 마지막 문제를 내게 제기했다.
(몸을 숨길 수 있다면 들키지 않기야 하겠지만… 집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이민수도 비올라의 은신을 보더니, 현관문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내가 프로그래머였지만, 이런 집의 보안을 뚫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건 아니야. 애초에 분야가 다르기도 하고….)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
나는 비올라의 투명한 막 안에 들어가면서 말했다.
“본인이 문을 열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