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7화 〉 507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
* * *
아침이 되자마자 소환된 이민수는 입을 벌리고 침을 뚝뚝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 여기가 어디야?)
이 녀석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지금까지 소환할 때마다 반겨주는 장소는 자신이 살던 작은 투룸이었는데, 지금은 정원이 딸린 집에 와있으니까.
“어디긴 집이지. 야! 침 흘리지 마!”
(어, 어차피 묻는 것도 아닌데….)
“씁… 하여튼 흘리지 마. 더럽게 시리….”
혼령이라 흘린 침이 바닥에 묻는 건 아니었지만,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에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민수는 입가에 흘리던 침을 닦으며 다시 횡설수설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야? 혹시 너….)
유령이라 그런가? 눈치가 빠르군.
“맞아. 하이….”
(내 집을 빼앗은 것처럼 다른 죽은 사람 집을 빼앗은 거야? 지금이라도 포기해! 나 정도는 몰라도 이런 집에서 살 정도면 그렇게 허술하게 뺏을 수 없어!)
“….”
화난다.
걱정을 받아도 죽은 녀석에게 걱정을 받아서 화가 났다.
(지금이라도 자수를 하는 게…!)
“시끄러!”
(히익!)
내가 손을 올려서 때리려는 제스쳐를 취하자 녀석은 자주 맞아본 듯이 양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떠는 이민수를 보면서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설명해줬다.
“나도 생각이 있어 인마. 내가 왜 이런 집을 훔쳐.”
(내 집은 훔쳤잖아.)
“…그건 빌린거라고 하자.”
(…)
“하여튼 훔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하이볼 당첨됐어.”
(…뭐?)
나는 당연히 고민태에 대한 연관성을 거론하지 않고 그저 우연히 찍은 하이볼이라는 복권이 당첨됐다고 설명해줬다.
이민수는 기겁하면서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내가 그걸 매주 3만 원씩 사도 5천 원도 당첨이 안 됐는데….)
“그러니까 평소에 나처럼 착하게 살았어야지.”
(….)
이민수는 나를 짜증 나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그 녀석의 표정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즐기는 건 나중에도 또 할 수 있으니까.
“자, 그럼 출발하자. 그 협회인가 뭐시기인가로….”
..
..
나는 택시를 탄 채 감탄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이야…교통은 내가 살던 세계랑 넘사벽이네.’
나는 무인 택시 내부를 둘러보면서 계속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인 택시는 운전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쾌속으로 운행하며 목적지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심지어 옆에 보이는 차량들도 확인해보니 운전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자동차가 네트워크 시스템을 이용해서 무인으로 운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사고가 날일도 없고, 운전자들끼리 트러블이 일어날 일도 전혀 없었다.
다들 차에 탄 채 여유롭게 컨텐츠를 즐기거나, 세상 편하게 잠을 자기도 했다.
나는 그런 교통편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여유 되면 차나 사야지.”
(부럽다… 나도 하이볼 당첨됐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겠지.)
“….”
이 녀석은 아직도 지가 살아 있는 줄 아는 모양이네.
나는, 죽은 것도 까먹고 신세 한탄하는 이민수를 보면서 말했다.
“금방 도착할 거 같으니까 미리 말해 둘게. 필요한 말 이상으로 말 걸지 말고, 내가 질문할 때만 대답해.”
(알았어. 밖에서는 최대한 필요한 말만 꺼낼게.)
그렇게 사전 조율을 마칠 때쯤 무인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택시에서 내린 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한적하리라 생각했지만, 현재 건물 주변이 어수선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설마 여기에서도 시위하나?’
굳이 시위를 주도하는 협회 녀석들이 자신의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일 이유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어수선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저, 저게 뭐야!?)
“…?”
나는 이민수의 놀란 목소리에 딱히 반응하지 않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서 확인했다.
사람들이 밀집된 건물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상을 바꾸겠습니다!="" 기호="" 1번="" 구준병=""/>
구준병이라는 녀석의 얼굴은 정치인 현수막에 달려 있기에는 꽤 젊어 보였다.
심지어 외모만 놓고 보자면 훈남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아, 가끔 채널 돌리다가 짜증 나게 선거 광고 나왔던 게 기억나네.’
TV에서 선거에 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화랑 드라마 보는 거 방해해서 짜증 났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이쪽 세계의 투표 따위는 나랑 단 1도 연관이 없었다.
어차피 떠날 세상인데 투표 해봤자 뭐하겠는가.
그런데 이민수는 그런 내 마음에 반기를 들듯 활활 불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로 현수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들바들 떨며 바라보면 녀석이 내게 소리쳤다.
(저, 저번에 말했잖아! 저 녀석이야! 나를 이 꼴로 만든 게!)
..
..
나는 건물 주변에 한적해 보이는 공원 안의 벤치에 앉아서 건물을 유심히 바라봤다.
현수막도 현수막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목적지가 저 건물이었다.
6층으로 된 상가 건물에는 한 면이 전부 덮일 정도로 커다란 국회의원 후보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현수막의 주인이 바로….
(분명해… 저 얼굴이랑 이름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
<세상을 바꾸겠습니다!="" 기호="" 1번="" 구준병=""/>
이민수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나는 이민수의 조잘대는 말을 계속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구준병이라는 녀석에 대해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녀석에 대한 정보는 선거 홍보물과 지역 뉴스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대부분 뉴스에는 구준병이라는 녀석의 선행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나마 예전에 좀 튀는 기사들이 있었는데, 인류 보호 협회에서 활동하며 찍힌 멋들어진 사진들이었다.
내가 구준병 기사를 훑어보고 있자, 울분에 차 있던 이민수가 내가 보고 있던 화면을 보면서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뭐? 지가 세상을 바꿔? 그래, 바꾸긴 하겠지. 착한 사람들 버리는 세상으로….)
“….”
이민수가 미친 듯이 분노하고 있었지만, 인터넷에서 보이는 정보만으로는 구준병이라는 녀석의 흠결을 따로 찾아낼 수 없었다.
선거 홍보물에도 범법 행위가 단 1도 적혀 있지 않았다.
‘만약 이민수 말대로 구준병이 정말 그런 녀석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대단한 놈이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깐 생각해보자.’
원래 계획은 이민수의 신분으로 협회 사무실에 들러서 적당히 분위기를 관찰할 생각이었었다.
하지만 지금 협회가 있는 건물은 사람들이 굉장히 빼곡히 들락날락하는 탓에 되레 들어가기 쉽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한창 선거 운동 중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바로 입구컷 당할 것이다.
막상 도착하고 나서 공원에서 생각해보니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민수는 구준병이라는 녀석이 자기를 완전히 잊었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만약 아닐 수도 있잖아.’
이민수에게 들은 구준병의 행태를 떠올려보면 완전히 잊었을 것 같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일이다.
괜히 잊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봤다가 나와 이민수의 차이점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귀찮아질 것 같았다.
‘인류 보호 협회와 선거 사무실이 같은 건물이라….’
협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그 지지기반으로 정치 인생에 뛰어든 것 같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저 건물에 꽤 많은 비밀 자료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민수에 관한 자료를 찾아내는 게 최우선인데….’
숨어서 들어가는 건 밤중에 은신을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협회와 선거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건물은 보안시설 레벨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은신을 써서 몰래 들어가더라도 보안시설까지 뚫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뚫자니 문제가 커질 것 같았고….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 아르모니아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수호 님. 이민수를 이용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용? 어떻게?’
나는 그 이후에 조용히 아르모니아의 계획을 듣기 시작했다.
괜찮은… 아니, 엄청 훌륭한 계획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공원에 사람이 없는 것을 체크하고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응?)
눈치가 빠른 녀석은 내게 최대한 귀를 가져다 대면서 내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나는 혼잣말하듯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 프로그래머라고 했지?”
(응, 전직이긴 하지만….)
“좋아. 그럼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
나는 차근차근 이민수에게 명령을 하달하기 시작했다.
이민수는 내 말을 귀 기울이면서 최대한 집중해서 듣고 나서는 내게 말했다.
(그건 딱히 어렵지 않아 보여. 어차피 내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걸 알아둬서 뭘 하려고?)
“그건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일단 시키는 일이나 해.”
(끙…. 알았어.)
“좋아. 그럼 나는 잠깐 자리 좀 비울 테니까. 최대한 많이 알아놔. 저녁에 다시 이곳에 올 테니까.”
(엥? 어디 가게?)
나를 향해 멀뚱멀뚱 바라보던 이민수에게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데이트 갈 거야.”
(….)
성격에 맞지 않는 짜증 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
..
나는 이민수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한미소에게 연락을 걸었다.
한미소는 업무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내 전화 한 통에 쏜살같이 내게 달려와 줬다.
업무 시간임에도 이렇게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괜찮습니다. 저희와 거래해주신 고객님께서 필요한 용무가 있다면 와야죠.”
한미소가 소속하고 있는 업체는 대형 매물을 위주로 거래를 중개하는 업체였다.
업체에 소속하고 있는 중개인들은 한 달에 2건 이상만 거래를 성사시켜도 엄청난 수익을 내는 업체였다.
‘내가 낸 수수료만 5천만 원이면 말 다 했지.’
내가 집에 관련되어서 문제가 생겼다고 부르면 당연히 와줘야 하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고객보다 나처럼 흔쾌히 돈을 투척하는 고객을 잡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비우라고 지시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미소도….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가 사준 가방을 절대 잊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어제의 한미소는 냉정함을 가지고 있는 커리어 우먼의 느낌이었다면 오늘의 한미소는 새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여대생의 느낌이었다.
나는 한미소에게 어제처럼 식사 제안을 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어제 식사했던 호텔 괜찮으세요?”
“그… 네, 저는 어디든 괜찮습니다.”
한미소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대답을 바꾸지는 못했다.
참고로 저 대답은 내 최면의 효과가 아니었다.
‘어제 사준 가방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최면을 이용해봐야겠다.’
가방 버프가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
..
한미소와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정신 조작을 시도해봤다.
일단 말을 편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호칭,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상 정보를 나누는 것까지….
“오빠는 무슨 일하세요?”
“나? 그냥 회사 대표야.”
“와….”
대표는 대표지…. NTL 코퍼레이션의 COO니까.
그렇게 여러 번의 정신 조작을 시도하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정신 조작도 유도만 잘하면 기억 조작 못지않게 좋은데?’
기억 조작은 분명 치트같은 느낌이 강했다.
일단 사용만 할 수 있다면 완벽하게 기억을 조작하는 게 가능하니까.
하지만 게이지 소모가 엄청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만약 최면 게이지를 최대치인 100%까지 채웠다고 해도 이질적인 기억 조작은 엄청난 게이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아예 사용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에 비해서 정신 조작은 유도만 잘한다면 소량의 게이지를 소모해서 기억 조작 못지않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가령 지금처럼….
“미소야, 괜찮으면 여기 호텔 방에서 쉬다 갈래?”
“네? 그… 그건 좀….”
만약 내가 여기서 정신 조작으로 긍정의 대답을 내뱉게 한다면 한미소도 분명 이상함을 느끼면서 오히려 나를 경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유도를 하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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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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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생각으로 물어본 거 아니었어. 느긋하게 쉬면서 룸서비스로 디저트나 시켜 먹으려고 했지.”
“이, 이상한 오해한 거 아니에요. 그래도 좀 부담스러워서….”
“나는 네가 사진을 좋아하길래 호텔 룸 같은 장소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할 줄 알았어. 괜히 이상한 말 해서 미안해.”
“아… 그게….”
나는 우물쭈물하는 한미소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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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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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지가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한미소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쉬었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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