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화 〉 504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영혼
* * *
처음에는 오해했었다.
이민수가 죽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고민태의 연구실에 잠입하다가 죽은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민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고민태를 죽이는 건 나도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그가 말하는 복수의 대상은 고민태가 아니었다.
(나는 협회에 꼬드긴 녀석… 그 녀석에게 복수해줘.)
“아하! 별거 아니네.”
(어!? 가능해?)
“복수라면 죽여달라는 거 아니야? 가능해. 나중에 죽여줄게.”
지금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 이 세계를 떠나기 전에 번개로 한번 지져주고 튀면 그만이다.
(주, 죽이는 거라니…. 그, 그건 역시….)
“….”
제 입으로 복수라고 단어를 내뱉고는 막상 극단적인 상황을 떠올리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죽은 놈이 왜 이렇게 패기가 없어….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보면서 말했다.
“설마 복수라는 게 그냥 넘어뜨려서 코라도 깨지게 만들어달라는 거였어? 그것도 가능하긴 해. 그게 더 귀찮아서 싫지만.”
넘어뜨리는 것쯤이야 풍속성 마법이나 지속성 마법을 쓰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다만 내 기준에서 죽이는 것보다 넘어져서 코가 깨지게 하는 게 더 힘들다는 게 문제다.
코가 깨지는 건 확률의 문제이지만, 죽이는 건 확정타로 가능하니까.
이민수는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 아니. 죽일 수 있다면 죽이는 게 좋은 거 같아. 진짜 악질인 녀석이라….)
그 이후, 이민수에게 그 녀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녀석은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그렇게 유혹하고 범죄적인 행위로 유인하는 짓을 일삼았다고….
‘악질이긴 하네.
[설마 성전의 인물일지도….]
‘아니, 그건 아니야. 확실해.’
겨우 그런 짓을 연명하면서 조디악에게 들키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
이민수를 이용해 먹은 놈은 그저 사람 등쳐먹는 것에 재능이 있는 놈 같았다.
일단 상황은 정리됐다.
내 신분의 주인인 녀석과 계속 소통이 가능하니,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신분과 관련되어서 문제가 생기면 이민수를 직접 부르면 모든 게 해결될 테니까.
그리고 집 문제는….
(일단 집은 마음대로 사용해도 돼. 어차피 나는 이제 못 사용하니까.)
“걱정하지 마.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
(….)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인마. 원한도 풀어주는데 그 정도 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냐?
1년 동안 집주인이 없는데, 집 상태가 정상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서 TV를 틀고는 이민수에게 말했다.
“일단 나중에 또 부를게. 오늘은 어차피 나가지도 못할 거 같으니까.”
사실 나가려면 나갈 수 있겠지만, 현재 레나를 함선에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워프할 때, 청소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바람에 연속으로 워프를 사용했고, 그 때문에 워프 게이지가 전부 소진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레나와 데이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비밀 임무 중이라 레나를 밖에 데리고 다니기 껄끄러웠다.
그렇다고 혼자 놓고 가는 건 더 싫었고.
이민수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나를 보며 우물쭈물하며 묻기 시작했다.
(저… 저기… 그냥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 방해하지 않을게!)
“안돼.”
(왜, 왜!?)
“….”
레나랑 섹스하려고… 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또 부를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쪽에서 대기하는 동안 그 인류 뭐시기 협회에 소속했던 녀석들한테 정보나 얻어놔. 네가 모르는 정보를 아는 녀석도 있을 거 아냐?”
(아, 알았어! 나처럼 복수하고 싶어서 이를 갈고 있는 녀석들이 있어. 다들 허심탄회하게 말해줄 거야!)
그거 다행이네.
그렇게 녀석이 다시 사후 세계로 가려는 순간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야, 잠깐만….”
(왜? 혹시 여기에 남아 있어도 된다든지….)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이민수를 보면서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IPTV 비번 뭐냐?”
(….)
무료 영화 존나 재미없을 거 같단 말이야. 빨리 말해줘.
..
..
다음 날, 레나가 함선으로 돌아간 뒤 나는 혼자 외출해서 도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버스를 탄 채 창밖을 내다보며 감탄했다.
‘와, 기술 쪽은 이쪽이 훨씬 뛰어난 거 같은데?’
아르모니아가 임무를 시작할 당시 내가 살던 곳과 과학력이 비슷하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르모니아의 기준이었다.
이곳의 과학 기술은 일단 내가 살던 현대보다는 최소 한 단계 이상은 진보해 있었다.
심지어 기술만 따지면 영사관 쪽보다 앞서 있는 느낌이 강했다.
모든 교통수단은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서 소음 하나 없이 이동했고, 모든 도로가 전기 스테이션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계속 자동 충전이 이루어져서 충전소도 필요 없었다.
심지어 모든 것이 자동화 되어 있어서 사람이 운전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시설을 이용하거나, 물건을 구매할 때는 지문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뭐 돈은 이민수 통장에서 나가는 거니까.’
이민수… 생각보다 모아놓은 돈이 꽤 있었다.
그 얼간이 단체에 들어가기 전에는 성실하게 돈도 모으고, 사치도 전혀 부리지 않던 성실한 놈이었다.
그런 성실함 덕분에 한동안 돈 걱정은 없어도 되겠다 싶었다.
‘통장에 천만 원 정도 있던데 그 정도면 일주일은 놀고먹을 수 있겠다. 다 써버려야지!’
[….]
어차피 1주일 후에는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해준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그만이니까.
‘설마 비밀 자금이라고 십만 원, 이십만 원 주지는 않겠지?’
여기 최저 시급 알바를 뛰어도 일급이 그것보다는 많을 거 같던데.
[부족함이 없는 금액을 보내겠다고 해왔습니다.]
‘에이, 이왕이면 에넬로 주면 좋을 텐데. 그걸로 돈을 만들어내는 게 편하지 않을까? 들킬 걱정도 전혀 없을 거고….’
[그들도 에넬은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쪽 세계의 돈은 무한하지만, 에넬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긴….’
사실 나도 그냥 해본 말이었다.
에넬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미 몸소 깨닫고 있었다.
에넬로 돈은 만들 수 있어도 돈으로 에넬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니까….
거기다 가치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1 에넬로 1만 원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1 에넬과 1만 원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건 아니다.
에넬은 에넬로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에 사용하는 게 최고의 사용 방법이다.
지금 우리 같은 경우에는 함선 업그레이드가 대표적인 예였다.
함선의 업그레이드는 에넬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버스가 안내음을 내며 천천히 멈춰서기 시작했다.
<이번 정차역은="" 생명="" 진보="" 기술="" 연구소입니다.=""/>
이곳이다.
생명 진보 기술 연구소.
조디악의 인물인 고민태 박사가 운영하는 한국 지부의 연구소였다.
연구소라고 하면 뭔가 하얀색의 삐까번쩍한 새삥 건물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눈앞에 보이는 건 연구소라는 표현보다는 캠퍼스에 가까웠다.
광활한 부지를 차지하고, 그 안에 수십 개의 연구소가 한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다.
연구소라기보다는 연구 단지라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그럼 내가 왜 이 연구 단지에 왔을까?
고민태를 만나러?
당연히 아니다.
고민태와 될 수 있으면 눈 하나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게 조디악의 조언이었다.
그와 연관성을 최대한 배제하는 쪽으로 임무를 진행해야 했다.
내가 이 연구 단지에 방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 눈에 연구 단지가 보였고, 울려 퍼지는 확성기 소리가 귀속을 때리기 시작했다.
<고민태는, 인류의="" 해악과="" 같은="" 실험을="" 중단하라!=""/>
그리고 확성기 소리가 마치는 동시에 내 고막을 찢을 듯한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양쪽 검지로 귀를 쑤셔서 막았다.
‘소리 한번 우렁차네….’
시끄러울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시위가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침에 봤던 뉴스는 아침이라 적어 보인 거였나? 점심 되니까 장난 아니네.’
나는 전날 레나와 같이 잠자리에 든 뒤 일어나자마자 별생각 없이 뉴스를 틀어봤다.
그런데 마친 뉴스에서 오늘 이 장소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었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모인 사람들의 숫자만 대략 1만 명은 넘어 보였다.
아까 내가 탔던 버스는 정류장에서 나를 내려준 후, 넘쳐나는 사람들 때문에 이 장소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갈 때, 개고생하겠군.’
시위가 끝나기 전에 눈치껏 빠져나가지 않으면 자칫 귀갓길이 지옥 길로 변할 것 같았다.
나는 붐비는 사람들 안에 최대한 들어가지 않으면서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은 왠지 어깨만 스쳐도 주먹질이 날아올 것처럼 동공에 분노를 이글이글하며 불태우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사람들이 덜 붐비는 장소를 맴돌고 있으니, 아르모니아가 내게 묻기 시작했다.
[수호 님, 이곳에 방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마 그저 시위를 구경하시려고 오신 겁니까?]
‘맞긴 맞는데…. 이 사람들 전부 기질창 보는 건 무리겠지?’
[남은 에넬로 가능은 하지만… 추천해 드리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 그냥 해본 말이야.’
기질창을 보는 것도 에넬이 소모된다.
평범한 인간의 기질은 2~3정도 에넬을 소모하고, 능력이 출중할수록 소모량이 증가하게 된다.
즉 1만 명의 기질창을 띄우려면 최소 2만의 에넬이 필요할 것이다.
대충 필요 에넬을 계산해보면 3~4만까지도 고려를 해야 했다.
있을지도 모르는 성전 녀석 찾겠다고 그걸 소비하기에는 너무 도박성이 짙었다.
‘그리고 여기에 없을 거 같기도 하고….’
신분을 숨기는 방식이 고작 사람들 틈 사이에 숨는 것일 리가 없다.
고민태가 바보도 아니고… 분명 이런 사람들 사이에 낀 인물들을 전부 추적해봤을 것이다.
[그럼 왜 이곳에 오신 겁니까?]
기질창을 볼 것도 아니고, 그냥 심심해서 왔다기에는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심플했다.
‘시험해보려고.’
[…?]
시위 단체 중앙 단상에 올라가서 소리치는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민태는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갈="" 악마입니다!=""/>
그는 광신도를 이끄는 사이비종교 교주처럼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확성기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최면술은 과연 어디까지 통할 것인가.’
단상 위에서 선동하는 남자를 집중하며 바라보자 그의 머리 위에 상태창이 하나 띄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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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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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무난했다.
내가 게이지를 채우기 시작하자 아르모니아가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최면술을 연습하실 것이라고 해도 굳이 이 장소일 필요가 있습니까?]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아.’
생각해봐라.
길 가다가 갑자기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경계심부터 들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창밖을 내다보면서 지나다니는 사람을 몰래 쳐다보는 것도 성미에 안 맞고….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은 유심히 쳐다보더라도 크게 의심을 받지 않아. 특히 저렇게….’
<고민태는 신의="" 노여움을="" 사게="" 만들어서="" 저희를="" 파멸시킬="" 악마입니다!=""/>
‘모든 사람을 눈에 담아야 하는 인간이라면 시험해보기에 최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시험해보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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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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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서 안 오르네….’
[아마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쯧… 하긴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게이지를 채울 수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사기지.’
심지어 게이지는 상대방의 능력에 따라서 속도가 달라진다고 설명에 나와 있었다.
‘하아…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 싫은데.’
[근처에 있는 사람들로 실험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아냐. 오히려 거리에 따라서 차는 속도가 다른지 확인하려면 저 인간을 통해서 시험하는 게 제일 좋겠어.’
귀찮긴 하지만, 나는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단상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분노에 차오른 모습을 하고는 있었지만, 어깨가 부딪힌다고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외곽 쪽에 있던 나는 시위대 중앙에 있는 단상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좋아. 이렇게 가까우면 게이지의 속도가 변하려나.’
내가 그렇게 의문을 가지며 확성기를 가지고 소리치는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오오오! 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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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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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해서 게이지를 채우자 금세 4%까지 차올라 버렸다.
일단 거리에 따라서 게이지를 채우는 속도가 달라지고, 심지어 일반인이라면 차는 속도도 무지하게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상 위에 있는 녀석은 자기가 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양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지만, 기질창에 띄워진 능력은 하찮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 공부는 하지 않은듯했다.
게이지는 고작 10분 만에 100%를 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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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게이지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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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완료됐다.
여기서 잠시 고민 타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떡할까….’
일단 성격은 안 좋아 보였다. 흥분도 잘하고, 단상에서 하는 짓처럼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도 즐기는 것 같았다.
나쁜 놈인가… 그렇다기에는 애매하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최고의 변명거리를 만들어서 그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이 집회 자체가 내 의뢰인에 대한 모욕이다!’
[….]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에게 명령을 걸기 시작했다.
내가 속으로 명령하자 바로 단상 위에 있던 녀석은 명령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제가!="" 제가="" 얼마나="" 굳은="" 의지를=""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왔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단상 위에 있던 녀석은 갑자기 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집회는 그 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분노했던 눈이 싸늘하게 식으며 혐오감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남자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옷을 벗으며 사람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를 보십시오!="" 여러분!="" 순수한="" 저의="" 모습을!!="" 의지가="" 담긴=""/>
“꺄아아아악!!”
“뭐, 뭐야! 오지 마!!”
나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며 슬며시 눈을 떴다.
‘어우, 눈 버릴 뻔했네.’
[기억 조작은 하지 않으실 겁니까?]
‘응, 여긴 위그드라실이 아니잖아. 오히려 실험해보려면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게 딱이지.’
아마 정신 조작만 걸린 상태라 나중에 최면이 풀리면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최면인지는 모를 것이다.
여긴 위그드라실처럼 감시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난장판이 된 시위대를 천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발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었다.
‘아르모니아… 저거 보여?’
[보입니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겠지?’
[수호 님의 반응을 보면 제가 보는 것과 동일한 것 같습니다.]
하늘에는…
‘나 빼고 아무도 관심 없는 거 보면 일단 저게 이쪽 세계 최신 정찰 기술은 아닌 건 확실해 보이네.’
기다란 여우 귀와 꼬리를 달고 있는 세련된 한복을 입은 여자가 하늘에서 둥둥 떠다니며 단상 쪽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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